최근, 교회를 나가고 있습니다. 구원받아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서. 집에서야 귀신꼴을 하고 있더라도 하느님을 만나러 가니 그래도 사람의 모습을 갖춰야겠는데 제대로 된 화장품이 한 개도 없어요. 작년 가을, 한국가서 쓰라고 지인이 갖다준 화장품은 친구들 다 줘버리고 왔기에. 옷 색깔에 맞춰 립스틱이라도 몇 개 사야할 것 같아서 동네 근처 ‘월마트’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가보는 월마트는 늘 그렇듯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어요. 인파의 물결을 헤치고 코스메틱 섹션에 갔는데, 어머나, 이게 웬일!?나는 뒤로 넘어갈 만큼 놀랐습니다. 화장품은 물론이고 치약, 의약품, 샴푸 등 조금이라도 값나갈 만한 물건들은 모조리 꽁꽁 자물쇠가 채워진 진열장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다이아몬드를 파는 보석상이 따로 없습니다. 철통같은 보안입니다. 예전엔 마음대로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본 후 골라서 계산대에 가져가면 되었었는데. 이제는 눈으로만 대충 보고 짐작하고 결정한 후 구입의사가 확실해지면 물건을 꺼내줄 직원을 불러야 합니다. 직원이 물건을 꺼내 준다해도 끝이 아닙니다. 직원의 에스코트하에 같이 계산대로 가야 합니다. 직원이 보는 앞에서 캐쉬어에게 돈을 지불한 후에라야 구입 절차가 끝납니다. 꼴랑 립스틱 몇 개를 사는 일이 그렇게 복잡해졌습니다. 참 기가 차고 어이가 없더군요.

그러고보니 매장 안에도 남색 조끼를 입은 건장한 남자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눈매로 사방팔방을 호시탐탐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도둑놈들이 매대의 물건들을 그냥 들고 나갈 경우에 저지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습니다. 예전엔 없던 광경입니다. 오죽 도둑들이 설쳐댔으면. 도둑들이 떼를 지어 상점들의 문을 마구 부수고 싹쓸이를 해간다지요. 경찰이 출동해도 할 수있는 일이 없답니다. 견디다 못한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미디어에서 봐서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목격하고 나니 정말이지 참담했습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어요. 이 미국이란 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하는 걱정과 비탄의 한숨말입니다. 미국은 요즘 치안이 최악 상태입니다. 우리 동네에도 걸핏하면 도둑들이 들고 차 유리창이 깨집니다.

집으로 가는 길 옆 곳곳 역시 엉망진창입니다. 예전엔 파란 잔디들과 예쁜 화초들이 운전자의 눈길을 사로잡던 화단. 지금은 홈리스들이 판치고 있습니다. 이불과 옷과 술병과 깡통 등 잡동사니들이 가득가득 실린 쇼핑카트들과 텐트들이 홈리스들의 고단한 삶을 대변해 주듯 여기저기 질서없이 마구잡이로 널려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홈리스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고즈넉한 주택가인 우리 동네에도 간혹 홈리스들이 보입니다. 오죽하겠어요. 렌트비가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최근, 지인의 딸이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차린 곳이 방 두개짜리 아파트라고 합니다. 나름 싼 곳이라는데도 한달 렌트비가 3200불. 전기세야 예전부터 물론 각 개인이 내는 거였지만 공짜였던 물값, 쓰레기세도 요즘은 따로 낸다고요. 그래서 한 달에 집에 들어가는 돈만 4천불이라고. 도대체 얼마나 벌어야 한달 4천불의 렌트비를 내면서 먹고 살 수 있을까요.

나 미국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홈리스는 구경도 못할 정도였어요. 다운타운 쪽, 버스 정류장, 기차 정거장에나 가야 서넛 볼 수 있었을까. 그때 나는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나같은 사람도 이렇게 직장잡고 잘 사는데 나태하고 게을러서 홈리스가 되었을 거라고 함부로 판단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지요. 한 달에 천불의 여윳돈이 있는 가구가 미국인구의 30%도 안된다는 기사를 봤는데 너나 할 것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면서 빠듯하게 살다가 실직을 하게 되면 어쩔수 없이 홈리스가 되고마는 거겠지요. 지난 달 9일, 한인 홈리스인 최 모씨가 LA의 길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올해 서른 네살밖에 안 된 최 씨. 그도 한때는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겁니다.

곧장 집으로 가려다가 차를 돌려 한국마켓으로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장 본 게 석달 전이라 이것저것 살 게 많았습니다. 리스트에 적어 놓았던 물품을 서너개 집어나가는데 세상에 만상에라는 한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오른 겁니다. 고추장이고 라면이고 국수고 콩나물이고. 거의 배는 오른 것 같아요. 5년전에는 100불로 충분했던 장보기가 지금은 137불을 지불해야 같은 양의 식료품을 살 수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긴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물랐습니다.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가격에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가 최소한의 물품들만 샀는데도 거의 백불 돈이 나왔네요. 정말이지 갈수록 미국살이가 강팍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같아서 다시 한숨이 푹푹 나왔어요.

한국 마켓에서 나오는 길 한 쪽에 ‘99전 온리 스토어’가 있었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상점이었습니다. 미국 땅에 발을 디딘 후부터 지금까지 애용하던. 문밖 나서는 걸 싫어하는 나였지만 적어도 한 달에 한 두번은 꼭꼭 들리던.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끝내 문을 닫는다지요. 문 닫는다는 소리에 얼마나 놀랐던지요. 얼마나 안타까왔던지요. 운전하면서 고개를 빼고 쳐다보니 아닌 게 아니라 ‘전품목 폐점세일’이라는 문구가 창문마다 붙어 있고 주차장에는 차가 한가득입니다. 이제 종이 가방이 필요할 때, 생일 카드가 필요할 때, 자잘한 생활용품이 필요할 때 어디로 가야 할까요. 나의 이민생활에 작은 활력소가 되었고 나의 이민 생활 한 부분을 차지했던 상점 하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 한적한 사거리에 파라솔을 쳐놓고 딸기를 팔고있는 히스패닉 여자가 보입니다. 차를 세우고 딸기 두 박스를 샀습니다. 집에서 5분 거리의 코스코에 싸고 싱싱한 딸기가 지천이지만 길에서 과일 파는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차를 멈춥니다. 그리고는 필요치 않아도 무조건 두어박스 삽니다. 언젠가는 지인들과 쇼핑을 갔다가 주차장에서 플라스틱망에 담긴 오렌지를 파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해는 지고 있는데 팔다가 남은 오렌지가 상당히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지인 수대로 사서 안겨주었는데 낭패를 당했습니다. 보기엔 싱싱한 빛의 오렌지였는데 수분이 바짝 말라 푸석푸석해서 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먹을 수 없더라도 나는 또 삽니다. 다 팔아도 몇 백불이 될까 말까한 과일들을 놓고 땡볕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이 너무 측은해서. 그들에게 작으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나의 이민 초창기를 생각하면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건물 청소를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깡통을 모아 팔던 나의 이미 초창기. 넝마같이 초라하고 비루하고 가난했던.

30여년 전, 나는 미국에 처음와서 방 하나짜리 아파트에서 살았어요. 하루종일 가도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굴속같이 컴컴한, 저소득층만 사는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의 낡고 더러운 아파트였습니다. 아주 오래된 고물 냉장고는 성에가 늘 끼어서 일 주일 한 번은 전원을 끈 다음 제거를 해야했고요. 젊은 흑인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라서 그런지 걸핏하면 경찰차가 사이렌 소리도 요란하게 밤낮으로 출동하고 그렇지 않으면 밤 늦게까지 쿵짝쿵짝하는 음악소리가 벽을 울려서 잠을 설쳐야하는. 25전짜리 동전 네 개를 넣고 공동세탁실에서 빨래를 해야했는데 가끔 빨래바구니가 통째로 없어져요. 남의 더러운 옷들을 갖다가 뭘하려는 건지.

그 당시의 초창기의 이민자들이 한 일은 건물 청소, 접시닦이, 플리마켓 장사 등 허드렛일이었습니다. 나 역시 저녁에는 건물 청소를 했고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을 했지요. 당시엔 ‘투잡’은 예사였고 더러는 ‘뚜리잡’까지 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 지인 하나는 낮에는 군부대 식당에서 일하고 밤에는 청소, 그리고 주말에는 플리마켓에서 흑인들과 히스패닉을 상대로 티셔츠와 모자를 팔았어요. 또 한 지인은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는데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면서 매일 밤근무를 자처했습니다. 낮에는 또 식료품점에서 일하고. 잠이 모자라서 늘 벌겋게 충혈되어 있던 그의 눈.

긴 시간의 육체적인 노동으로 몸은 늘 지쳐있었고 내가 이런 험한 일을 하려고 미국까지 왔나하는 자괴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비롯한 우리 초기 이민자들은 미국살이가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돈’이 모였었거든요. 돈 모으는 재미에 고생하는 줄도 몰랐었거든요. 영어와 기술을 요하지 않는 직장이라서 수입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아파트세 내고 차 굴리고도 꽤 돈을 저축할 수 있었지요. 물가가 너무너무 싼 덕분이었습니다. 먹거리는 더할 수 없이 풍족했고요.

오렌지 한 자루가 5불, 바나나 한 다발이 1, 2불이었고 한국에서는 미국부대 다니는 고모를 통해서야 겨우 맛볼 수 있었던 옥수수 버터, 비프 핫도그 한 팩이 1불 언저리였습니다. 한국에서는 귀하디 귀해서 진짜 부자들만 먹을 수 있는 소꼬리, 우족, 삼겹살은 아주 헐값이었고요. 한국에서 가난하게 살아서 소고기에 한이 맺혔던 한 지인은요. 푹 고은 소꼬리 곰탕만 삼시 세끼 먹다가 콜레스톨이 확 올라가서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더군요. 내가 미국에 올 무렵, 한국에서는 썰어서 말린 바나나칩이 유행했었습니다. 내가 그 바나나칩을 아주 좋아했는데 많이 사먹을 수는 없었어요. 너무너무 비싸서. 미국오니까 그 바나나칩이 베개만한 큰 봉지로 단돈 몇 불입니다. 환장을 하면서 얼마나 실컷 먹었던지 머리카락까지 바나나처럼 노랑물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그때는 LA갈비 또한 얼마나 쌌던지요. 밤낮없이 일하다가 주말에는 LA 갈비 파티를 벌였습니다. 요즘은 비싸서 예전처럼 자주 먹지 못하지만 얼음에 채운 차가운 맥주와 숯불에 구운 LA 갈비는 이민자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상징같은 음식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 고생한 후 모두들 집을 샀습니다.그때는 집값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을 때니까. 집 사고 몇 년 후에는 너나 할 것없이 비지니스를 시작했지요. 세탁소, 식당, 그로서리 마켓 등등. 마침내 사업체의 주인들이 된 거지요. 그때 고생을 같이했던 이민자들 치고 나중에 잘 살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으리으리한 고급주택에, 고급차에. 한국에서 어렵게 사는 형제나 친지들을 불러다가 자립하게 해준 사람들도 꽤 됩니다. 그때는 모든 게 가능했던 시기라서. 희망의 파랑새를 잡을 수 있었던 시기.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만 하면 ‘아메리칸 드림’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거든요.

지금 미국땅에 발을 디디는 이민자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이 가능할까요. 힘들게 노력하면 그에 대한 보상이 따르던 미국이 다시 될 수 있을까요. 미국은 예전의 미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상태인 것 같은데. 망해가고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