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풀까지 먹여 잘 다려놓은 식탁보를 들고 이거 너무 유난떠는 게 아닌가, 하고 금아는 잠깐 망설였다. 망설이다가 어쨌든 금아는 식탁보를 씌웠다.

식탁이, 그리고 그 주변이 금방 환해진 것 같았다. 본래는 거무튀튀한 색깔의 나무 식탁이다. 하얀 무명천이 씌워지니 정갈하고 고급스럽게 변했다.

그릇장 안에 모셔져 있는 크리스탈 촛대 두개를 꺼내다 놓을까, 금아는 잠시 또 생각했다. 촛대까지 갖다놓으면 그야말로 유난일 거다. 그러나 금아는 촛대를 갖다놓기로 했다.

촛대 두개가 놓인 하얀 식탁. 이제 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화려하고 빛깔 고운 꽃이 가운데 있으면 더욱 풍성하고 근사한 식탁이 될 것 같다. 그런데 꽃을 사려면 다시 나가야 한다.

아까 슈퍼마켓에 들러 양상추랑 빵이랑 이것 저것을 사면서도 꽃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하긴 간단하게 저녁을 준비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은아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저녁을 만들 생각조차도 않고 있었으니까.

햄버거를 점심으로 먹고 마악 떠났다고, 세 시간 후쯤, 그러니까 저녁 다섯시 경 집에 도착 할 것 같다는 은아의 전화를 받은 것은 금아가 피트니스 센타를 마악 나서려고 할 때였다.

“괜찮니?”

금아는 간단하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한들 위로가 될까. 그래도 꽤 오랜기간 인연을 맺었던 남자인데, 결혼약속까지 했던 남자인데, 아이까지 가졌던 남자인데, 그랬던 남자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인데 괜찮니?

비도 조금씩 오기 시작하고 네 마음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하겠니. 엄마가 같이 있어서 참 다행이긴 하지만…..

“응, 언니…”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은아가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안 괜찮으면 어쩌겠어….”

그래, 괜찮아질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하고 금아는 말했다. 가엾은 것. 말은 태연하게 해도 속이 말이 아닐 거다…..

언니, 저녁 좀 해 놓을래? 하고 전화기 속에서 은아가 말했다.

“햄버거로 대충 떼워서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배가 고플 것 같아. 나 갑자기 해물 크림 스파게티 먹고 싶은데 언니가 좀 해놓으면 좋겠는데….”

해물 크림 스파게티는 금아가 제일 자신있게 할 줄 아는 음식이다.

오징어랑 새우랑 조개 사다 놓은 게 냉동실 어디에 있을 게다, 하고 옆에서 엄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파게티 국수도 남은 게 꽤 있을 거고. 엄마가 덧부쳤다.

그러지 뭐. 금아는 쉽게 대답했다. 그까짓 것 어렵지 않지 뭐. 내 사랑하는 동생 은아가 먹고 싶다는데 얼마든지 해 주지……

‘내 사랑하는 동생 은아’라는 부분에 금아는 힘을 주어 말했다. 은아가 어색한지 히힛, 하고 전화기 속에서 웃었다.

“왜 웃니? 너 내가 사랑하는 동생 맞잖아……”

그렇다. 세상에 남은 가족이라고는 세 사람 뿐이다. 은아는 내 사랑하는 동생이고 그리고, 그리고. 엄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니,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왜냐면 어쨌든 엄마도 불쌍한 사람이니까.

금아는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서둘러 집에 도착했다. 스파게티 국수를 찾아놓고 냉동실에서 엄마가 말한 해물들을 꺼내 싱크대에 내놓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금아는 그냥 평소처럼 해서 먹을 생각이었다. 식탁을 꾸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어 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머리에 떠오른 생각, 오늘 저녁 식탁을 근사하게 한번 차려보자는 것이었다.

 

그래, 누구의 생일도 아니고 기념일도 아니지만 오랫만에 세식구가 둘러 앉을 식탁, 엄마와 은아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지게 한번 꾸며보자......

 

금아의 기분은 무척 고조되어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왔다는 성취감 때문이었다.

밤마다 운동을 하러다니고 있다. 하루밤도 빼지 않고. 그런데 어젯밤은 빼먹었다.

며칠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어 약을 먹고는 계속 누워 있었다. 안 하던 운동을 갑자기 해서 몸살이 난 것일까. 아무래도 며칠은 쉬어주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몸이 회복될 것 같다. 그런데도 운동하러 나가는 시간, 밤 열한 시쯤 되니 자꾸 시계가 봐졌다. 좌불안석이 되었다. 이럴까, 저럴까 이불속에서 망설이던 금아는 마침내 벌떡 일어섰다.

 

아무래도 운동을 하지않고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호기롭게 일어서던 금아는 머리를 짚으며 다시 침대로 주저앉았다. 독한 감기약을 먹은 몸이라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 오늘밤은 포기하자…

금아는 작정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잠에 곯아 떨어졌다.

눈을 뜨니 오전 10시였다. 꿈도 꾸지않고 잘 잔 것 같았다. 집안은 조용했다.은아와 엄마는 은아의 남자를 만나러 떠나고 없었다.

금아는 일어나 물부터 한잔 마셨다. 그리고 집안을 여기저기 걸어보았다. 몸이 가뿐했다. 그 정도면 얼마든지 운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아는 냉장고를 뒤져 찬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 얼른 운동을 하러 갈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금아가 마침내 아름다운 중독, 운동에 중독된 것일까.

그날 아침, 안개 낀 숲속에서 정기훈의 입술을 받고나서 금아는 자신에게 약속했었다.

더 이상 흐트러져 있지 않기로. 일어서기로.

오늘 저울에 올라 재 본 결과 8파운드나 빠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부터 빠진 살이 그대로 유지가 된 데다 한달동안 열심히 한 운동때문이다.

“무리하지 말아요. 무리하게 강행하면 중간에 포기하고 마니까 천천히 욕심내지 말고. 알았지요?”

피트니스 센타에서 만난 정기훈이 금아에게 이른 말이다.

금아는 혹시라도 정기훈과 마추칠까봐 일부러 밤늦은 시간을 택했다. 밤 열 한시, 열 두시 쯤. 그래서인지 그동안 정기훈과 한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랬는데 일주일 전 쯤 새벽에 갔다가, 사실 그날은 밤늦게 영화를 보다가 운동갈 시간을 놓쳤다. 그리고는 새벽 4시까지 잠이 안 와서 침대에서 뒤척뒤척하다가 새벽에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피트니스 센타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그날 새벽 정기훈과 딱 마추치고 만 것이다.

정기훈은 운동을 마쳤다고 했다. 한 시간전에 와서 운동하고 떠나는 참이라 했다.

“야아~. 이거 반가운 걸?”

정기훈은 금아를 얼싸 안았다.

“미단씨로부터 운동을 다닌다는 얘긴 듣긴했지만 한번도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우렁각시처럼 나 몰래 살짝 왔다가나 했더니 오늘 이렇게 마주치고 말았네?”

정기훈은 금아의 어깨를 감싸쥐듯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지금 무슨 운동을 해요?”

금아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딱히 정해진 거라고는 없이 이것저것 기분내키는대로, 닥치는대로 조금씩 하고 있기에.

금아가 대답을 못하는 이유를 눈치챈 듯 정기훈이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어요, 좋았어. 어떤 걸 하는 게 문제가 아니죠. 일단은 금아씨같이 움직이길 싫어하는 고귀하신 몸이 예까지 행차하신 게 중요하지. 안 그래요?”

금아가 듣든 말든 연신 주절대는 정기훈이었다.

“잘 모르겠으면 낮에 와서 트레이너의 지도를 받아요. 이렇게 죄진 사람처럼 남의 눈을 피해 오지 말고”

남의 눈을 피해, 그러니까 정기훈의 눈을 피해 일부러 밤 늦은 시간대를 골라서 왔던 걸 정기훈은 알까, 하고 금아는 생각했다. 보고는 싶지만 결코 보아서는 안 될 사람일 것 같기에……

“어쨌든 대단해요, 대단해!”

대단한 것은 정기훈이다. 정기훈은 오십살을 몇년 앞두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옆눈으로 슬쩍 쳐다본 정기훈의 몸은 무척 훌륭했다.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날렵하고 매끈했다.

올봄, 처음 견적을 내겠다고 찾아왔을 때 옷속에 감추어진 몸이 괜찮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저렇게 늘씬한 몸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시간을 투자했을까.

“나는 한국에서부터 늘 운동을 했어요. 미국와서는 일에 치이다보니 한국에서처럼 시간정해 놓고는 못했지만 틈이 날 때마다 했어요. 운동은요, 하다 말다 하면 안 됩니다. 생활화되어야 해요. 밥 먹고 나면 우리가 양치하잖아요.양치질 하듯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구요”

금아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기계와 기구를 만져보이고 시범을 보이던 정기훈은 여기서 두시간 거리에 있는 한 가게에 아침 일찍 예약이 잡혀 있다면서 떠났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이 차도 한잔 못해서 미안해요, 금아씨!”

정기훈이 사라지고 나서 금아는 한참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옆에 있을 땐 불편하기 그지 없어서 얼른 가버렸으면 싶던 정기훈이었다. 막상 그가 없어지고 나자 갑자기 온몸이 바람 빠진 풍선같아졌다. 맥이란 맥은 다 빠진 사람처럼 손끝 하나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저 남자는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금아는 바닥에 앉아 생각했다.

생각하면 코끝이 시큰거릴 정도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무 희망도, 열의도, 의지도, 기대도 없이 젖은 빨래처럼 널부러져 있는 금아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용기를 주고 관심을 주는 사람. 그래서, 보라. 하루하루를 그저 식충이처럼 밥만 축내고 있던 금아가 이렇게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일어서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아직 완전히 일어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는 않는다.

 정기훈으로 인해, 그 남자로 인해서. 그의 성의를 봐서라도 그냥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될 것 같기에. 일어서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기에.

그뿐이다.

그러나, 그러나 자꾸 욕심이 난다. 정기훈의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 그 욕심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금아는 생각한다. 한여름에 눈이 내리는 일만큼 가능성 제로의 욕심이다.

 

그래서 금아는 마음을 다스린다. 현재에 만족하자고. 정기훈이 가끔 걸어주는 전화에 만족하자고....

금아는 그릇장에서 은제 포크와 나이프 세벌을 꺼내 가지런히 식탁에 놓았다. 이왕이면 정식으로 다 꾸미자 싶어서였다.

엄마와 은아를 위해 맘 먹고 차릴 식탁, 멋지게 차려야지.

접시는 어떤 걸로 할까.

요리에 별 관심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는 엄마는 그릇 욕심만은 많아서 비싼 그릇들을 찬장 가득 가지고 있었다. 금아는 그릇장과 식탁을 몇번이고 왔다갔다 하면서 접시를 골랐다.

좀 있다가 해물을 대충 손질해 놓고 샐러드거리를 만들어 놓으면 된다. 소스는 엄마와 은아가 도착하기 30분 전 쯤 만들고 국수는 도착해서 삶아도 늦지 않다.

금아는 휴대전화를 보았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가서 꽃을 사와야겠다.

금아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명색이 꽃집에 가는 사람이다. 집에서 입던 차림새로 갈 수는 없다. 방금 갈아입긴 했지만 레깅스와 후드 셔츠다. 외출복은 아니다.

옷장은 열면서 금아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 외출복과 집에서 입는 옷을 구분하게 된 자신이 대견해서.

금아는 청바지와 핑크색 스웨터로 갈아 입었다. 얼마전에

미단이가 사다 준 스웨터다. 금아의 살 빠진 기념으로 사다 준 스웨터.

미단이를 생각하면 금아의 가슴이 훈훈해진다.

미단이는 금아가 운동을 하러 다니자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얘, 이왕이면 나랑 같이 다니자. 난 퇴근하고 갈 수밖에 없는데 넌 남는 게 시간인 사람이니까 네가 내 시간에 맞춰서 같이 다니자구. ”

금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말고 나중에…..”

왜냐면 아직도 사람많은 데 가는 것이 불편하니까. 나중에 살을 좀 더 빼고 자존감을 좀 더 회복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 수 있을 때, 그때 같이 다니자…..

밤 늦게는 피트니스에 사람이 거의 없다. 서너명 있다해도 약속이나 한 듯이 금아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 모두 금아와 같은 이유로 온 사람들일까. 주위에 일절 신경을 쓰지 않고 모두 제 할 일, 그러니까 운동에만 집중들 한다. 그래서 맘이 편하다. 공기처럼 스며들어 가서 머물다 나오는 일이.

아, 그러고보니!

금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금 전에 피트니스 센타를 다녀왔다. 밤이 아닌 낮에 말이다!

어쨌든 운동을 해야 한다는데 마음이 앞서고 급해서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과 남편을 직장에 보낸 후 온 젊은 주부들로피트니스 안이 많이 붐볐다.

오오! 이건 놀라운 변화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별로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다니! 그들에게 전혀 신경 안 쓸 수 있었다니!

금아는 전화기를 찾아 든다. 미단이에게 이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

“응, 금아야. 웬 일?”

“미단아……”

호기롭게 전화를 하긴 했지만 갑자기 목이 메인다. 그래서 금방 말을 못하는 금아다.

이쪽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미단이가 걱정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금아야?”

“………..”

“왜 그러냐구? 또 무슨 일 있어?!”

“……….”

“금아야?”

“……….”

금아가 애써 눈물을 참고 말한다.

“그냥 네가 너무 고마와서… 너같이 좋은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와서…..”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미단이.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는 미단이.

“너 술 먹었니?”

“아니….”

술을 입에 안 댄지 한 달째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부터다.

“미단아. 나 조금전에 운동하고 돌아온 길이야”

금아는 설명을 한다. 피트니스 센타 안에 사람들이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인지를 못했다는 사실을. 다른 때 같으면 열번도 더 망설이다가 끝내는 단념하고 말았을 일, 그러니까 사람들로 가득 찬 피트니스 센타 안을 혼자 당당하게 걸어들어가서 씩씩하게 운동을 마치고 나왔다는 사실을 미단이에게 설명한다.

“와아, 놀랍구나!”

미단이는 여지껏 그랬듯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준다.

“대단하다. 우리 금아!”

“이제 너랑 같은 시간대에 운동하러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래. 이제 그래도 되겠다”

금아는 목욕탕으로 걸어가서 불을 켠다. 거울 앞에 선 금아의 모습이 나타난다.

“미단아. 나 지금 네가 사준 스웨터 입고 있어”

화사하고 곱다. 봄의 기운같은 색깔이다. 핑크색이라니, 다른 때 같았으면 튀어보일까봐 아예 입어볼 엄두도 못낼 색깔.

“그래? 그것봐 예쁘지? 핑크색이 참 좋은색깔이라니까. 사랑스런 여성을 더욱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는 색깔....”

미단이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는다.

“얘, 너 운동갔다와서 샤워도 했을 거고 예쁜 스웨터까지 입었으니 정기훈씨한테 연락해서 점심이나 사달라고 하지 그러니?”

“………..”

갑자기 미단이의 입에서 나온 정기훈이란 이름에 금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싸르르, 하고 한 줄기 아픔이 온다. 정기훈, 그 남자. 손 내밀기에는 너무 먼 곳에 있는 사람. 하늘에 있는 태양같은 사람…….

“전화해 봐, 지금!”

“………”

전화 해요 하고 정기훈이 몇번이나 말했었다. 그러나 한번도 전화할 생각을 못했다. 그냥 자신이 없다. 정기훈은 지금 그냥 불쌍한 여자인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 뿐이다. 괜히 섣불리 마음을 주었다가 나중에 어떻게 감당을 할까. 그래서 무섭다. 상처받게 될까봐….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게 될까봐, 많이 무섭다.

“아니.나 지금 꽃 사러 나가야 해…”

“꽃?”

“응. 오랜만에 꽃을 좀 살까 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분홍색 장미를 사다가 식탁에.. 오, 그나저나 미단아!”

미처 생각을 못했다. 오늘 저녁 식사에 미단이를 초대할 생각.

“오늘 우리집에 저녁 먹으러 와라. 간만에 해물 스파게티 할 거니까…..”

미단이가 식탁에 같이 앉는다해도 전혀 이상하고 어색할 것 없다. 엄마와 은아는 오히려 더 반가와 할 거다.

“그으래?그러지 뭐…..”

미단이가 순순하게 대답한다.

“그래, 그럼 저녁에 봐. 퇴근하고 곧장 오렴”

전화를 끊으려는데 미단이가 잠깐만, 하고 금아를 제지한다.

“금아야"

 

"응? "

 

“오늘 저녁에 정기훈씨도 같이 부르면 안 될까?”

“뭐라고?”

“엄마랑 은아랑 너랑 나뿐이잖아.정기훈씨가 끼인대도 별로 나쁠 것 같지는 않은데?”

“…………”

가당치도 않아, 하고 말하려다 금아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정기훈, 그가 와 주기만 한다면야. 엄마도 별말을 안 할 것 같다. 엄마도 예전의 그 기세등등하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엄마가 반가와 할 수도 있겠다. 연못처럼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집안, 넉살좋고 활달한 정기훈이 분위기를 띄울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정기훈씨를 초대해.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야, 그 사람 바쁘지 않으면 올 거 야! 백프로 올 거야!”

미단이가 그 남자를 어떻게 안다고 저렇게 확신을 할까.

“그게…….”

“금아야. 인연은 내가 만들어 가야 해.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다간 허송세월만 하게 된다? 여자라고 나서지 못할 게 뭐 있어? 적극적일 땐 적극적이야지…..”

“미단아......"

 

"넌 개구리같아. 봄이 벌써 왔는데 땅속에서 마냥 움추리고 있는 개구리. 이제 뛰어나가야 해. 봄이 왔어. 봄이 왔다고!"

“엄...엄마한테는.....엄마한테는 뭐라고 얘기를 해?”

“마루 잘 깔아 줬다매? 마루 잘 깔아 줘서 고마와서 초대했다고”

그렇다. 엄마는 정기훈에 대해 매우 호감적이다. 아주 꼼꼼하고 세밀하게 작업을 마쳐주었다면서 칭찬을 많이 했었다.

“아니면 아예 터놓고 엄마한테 얘기 하든지. 우리 둘이 현재 사귀고 있습니다….”

미단이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 금방 웃음을 그치더니 말했다.

“정기훈이 너한테 좋은 감정 있어….”

“………..”

“정기훈씨랑 가끔 통화하거든. 너 때문에 통화해. 며칠전 그러더라. 너 좋아한다고….”

“……….”

“주눅들어 있지 마. 그냥 여자대 남자야. 주눅들게 뭐가 있니. 당당해져라, 금아야. 남자들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여자를 좋아해”

정기훈씨한테 꼭 전화해서 저녁에 오라고 해라, 하고 몇번이나 당부한 후 미단이는 전화를 끊었다.

금아는 화장실 벽에 기대에 멀거니 거울 안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살이 빠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뒤룩뒤룩한 모습이다. 언제부터 히끗히끗 세기 시작한 머리는 무쓰발라 짱짱하게 뒤로 빗어 묶지 않으면 여전히 날아 갈 듯 부스스하다.

 

처진 볼과 처진 눈꺼풀과 거친 피부와 이마와 볼에 불그스레한 여드름 서너개를 달고 있는 여자가 자신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핑크색 스웨터를 입은 채 우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정말로 충격이다.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니!

정기훈씨가, 키 크고 잘 생기고 호방하고 유머스럽고 몸매 훌륭하고 제네럴 컨트렉트 라이센스까지 가지고 있는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나를, 나 같은 여자를 좋아 할까. 나를 놀리는 것은 아닐까. 그냥 수작을 한번 부려보는 것은 아닐까. 내가 마구 흐트러져 있어 쉬워보이니까 심심풀이 삼아 한번 휘저어 보려고, 그럴려고 …..

금아는 한달 전 새벽 숲속에서의 정기훈의 따뜻하던 입술을 떠올렸다. 그리고 틈틈이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정기훈의 다정한 목소리도 떠올렸다. 그렇다. 그 남자는경솔하거나 가벼운 성품의 사람이 아니다.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함부로 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그냥 장난으로 여자에게 접근할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미단이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 남자 정기훈이 나를,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금아의 얼굴이 열에 들뜬 사람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의 단축 버튼 하나를 눌렀다. 저장만 해놓고 그동안 한번도 눌러보지 못한 단축 버튼, 정기훈에게로 거는 전화의 단축버튼이었다.

“야아,금아씨!”

정기훈은 기다렸다는 듯 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요, 금아씨? 오늘 아침부터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더니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군”

정기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금아씨가 전화를 다 해 주고 오늘 내가 복권 맞았는데?!”

막상 전화는 했지만 그냥 정기훈의 말만 듣고 있는 금아다. 입을 열수가 없어서. 마침내 해내고야 말았다는, 전화를 하고야 말았다는 흥분에 가슴이 마구 와랑와랑 떨렸다. 그보다 더 금아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정기훈이 자신의 전화를 반갑게, 아주 반갑게 받아주었다는 거다. 오랜시간을 기다린 사람처럼 들뜬 목소리로 자신의 전화를 아주 반갑게 받아주었다는 거다.

“잘 있었어요? 요즘은 내가 바빠서 한 사흘 전화를 못했네. 오늘 쯤 한번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더랬죠”

“예에…..”

뭐라도 대꾸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금아는 예에, 하고 대답했다. 예에, 하는 대답말고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뭐하는데요? 뭐하고 있어요?"

 

".........."

 

 

"나 지금 시간 있는데 커피 한 잔 할래요?"

 

저녁에 저희집에 오실래요?제가 없는 솜씨지만 저녁을 대접하고 싶은데 하는 말을 꺼내야된다고 생각하지만 금아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냥 가슴만 마구 방망이 치듯 여전히 떨릴 뿐.

 

 

“좀 있다 나올 수 있어요? 우리 만납시다!"

"죄송..해요..저…꽃..꽃집에 가..가야 해서…..”

“꽃집?”

“꽃…꽃을 사야 해서….그..그래서…그래서 꽃집에….”

정기훈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말했다.

“꽃집에를 간다고? 그래요, 그럼 꽃집에서 만납시다. 어느 꽃집이죠?”

“……..”

“그러고보니 내가 여지껏 우리 금아씨에게 꽃 한번을 안 사주었네요. 떡 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래요. 꽃집에서 만납시다. 빨간 장미꽃 한다발을 금아씨에게 안겨주고 싶네요…..”

“………..”

“어때요. 우리 꽃 사고나서 커피 한 잔 해요. 괜찮죠? 대답해 봐요”

“예…예에.. 괜….괜..괜…찮아요...."

 

그래, 만나서 저녁 초대에 대한 말을 하자.

“좋았어요, 그럼”

전화를 끊고 금아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호흡을 가다듬느라 숨을 크게 내쉬는데 갑자기 눈물이, 아까 미단이에게 전화할 때처럼 이유없이 눈물이  났다.

금아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오늘 저녁 성찬을 준비하려면, 촛불이 켜지고 꽃이 식탁 한가운데 놓인 풍성하고 멋진 성찬을 준비하려면 한가하게 울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정기훈을 만나 꽃을 전해받고 그를 초대하겠다는 말을 전하고 그리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시다 들어오려면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금아는 고꾸라질 듯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은아로부터 선물 받아 한번도 쓰지 않고 넣어둔 립스틱이 어디 있을 것이다. 그 빛깔 고운 립스틱을 발라야지.

 

금아의 마음이 허둥지둥 급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