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걸린 시계는 6시 1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진은 하릴없는 사람처럼 아까부터 시계를 확인하고 있다. 6시가 넘었을 때부터 1분에 한 번씩.

시계를 쳐다보는 미진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시계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미진의 얼굴빛은 점차 창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해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불안해하고 당혹해하고 있다는 게 나타나고 있었다. 미진은 시계를 보고나서 다시 앞자리에 있는 저스틴을 쳐다보았다. 그는 컴퓨터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미동도 없다. 컴퓨터에 거의 가려진 이마와 그의 안경 위로 컴퓨터 화면에서 새어나온 빛이 명멸하고 있다. 저스틴 쪽을 쳐다볼 때마다 볼 수 있는 똑같은 광경.

미진은 생각했다. 저렇게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을 거라면 가만히 일어나 나가버려도 모를 것 같긴 한데. 그러나 어쨌든 간다고 인사는 해야 한다, 고 미진은 생각했다. 사람이 남아 있는 걸 알면서 모른척하고 바람처럼 소리 없이 빠져나갈 수는 없다….

미진은 허리를 비틀어 자신의 엉덩이가 닿아 있는 의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까 휴지를 두껍게 덧대어 놓아서인지 다행히 물기가 조금 마른 것 같다. 문제는 바지 뒤쪽으로 묻어 있는 자국인데. 미진은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런 궁상스런 짓은 하지말아야지…..생리대 하나 아끼려다 이런 곤란한 지경까지 오다니…….

늦은 점심을 먹은 후 화장실에 들렀을 무렵 더 이상 지체말고 갈았어야 했다. 더구나 오늘은 양이 많은 둘쨋날 아닌가. 그러나 그때 미진은 생리대를 갈지 않았다. 찜찜한 걸 좀 더 참았다가 몇 시간 후 갈게 되면, 그러니까 퇴근 무렵 갈면 저녁 늦게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래서 생리대 하나를 절약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런데 미진의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았다. 평소때보다 유난히 양이 더 많았던 가 보다. 생리대를 넘쳐나온 피가 미진이 입고 있는 베이지색 바지의 뒤를 흠뻑 적시고 의자에까지 흔적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는 걸 알았을 때, 다행히 사무실엔 미진 혼자밖에 아무도 없었다. 부랴부랴 화장실로 달려가 바지를 벗어 수돗물로 빨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미진이가 입은 바지가 두꺼운 면바지였다. 그릇닦는 세제를 묻혀 마구 비벼대서 배어난 피를 대충 뺄수 있었으나 세계지도처럼 넓은 얼룩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누가 봐도 생리혈인 줄 알 수 있을 만큼.

축축한 엉덩이로 일을 하면서 미진은 간절히 바랐다. 나갔던 저스틴이 들어오지 않기를. 들어오지 않고 퇴근한다는 전화가 걸려 오기를. 그러나 한 시간 후 저스틴은 들어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퇴근할 생각을 않고 마냥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제 시간에 퇴근하는 법이 거의 없는 저스틴이지만 오늘만은 제발 퇴근시간을 지켜주었으면 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고 만 것이다.

“저…….”

연신 시계 한 번, 저스틴 쪽 한 번을 쳐다하면서 안절부절하던 미진이 드디어 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할 일이 남았으면 집에 가서 하던가. 남 퇴근도 못하게 뭔 심술이람. 저스틴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석고같은 얼굴이다. 그리고 눈. 차갑고 서늘한 눈. 쓰고 있는 안경의 유리속에서 빛나고 있는 차갑고 서늘한 눈.

“퇴, 퇴근 안 하세요?”

미진이 더듬거리면서 간신히 한 마디 한다. 빨리 이 사무실을 나가주었으면 하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조금전의 괘씸한 마음이 들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하다. 평소처럼, 그냥 일상적인 말처럼 들리게 하려고 애를 썼으므로. 자신의 곤란한 상황을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미진이다.

“여..여섯시가 아까 넘..넘었는데…..”

저스틴이 아무런 감정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세요”

“………”

“나 신경쓰지 말고 가세요”

“………”

“ 내가 있든 없든 퇴근시간 정확하게 지키라고 수차례 말했을 텐데?”

지키고 싶지, 퇴근시간을. 그동안은 당신이 지시한대로 당신이 남아 있든 말든 여섯시만 되면 칼같이 나갔단 말이야. 그런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당신이 빨리 먼저 떠나가주어야 할 만한 상황에 처해 있단 말이야. 미진은 마음속으로만 외친다. 만약 당신이 나가지 않으면 나는 당신 나갈 때까지, 그때까지 꼼짝없이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한단 말이야.

저스틴은 다시 컴퓨터 화면쪽으로 고개를 숙인다. 미진이 퇴근을 하든 말든 자기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미진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몸짓, 저스틴이 먼저 나가기를 포기해야겠다는몸짓이다. 미진은 스위치를 눌러 컴퓨터를 껐다. 그래, 계속 그러고 있어다오. 나를, 내 뒷 모습을, 몇십전짜리 생리대 하나 아끼려고 피 칠갑을 한 엉덩이를 제발 보지 말아 달라구. 미진은 자리에서 일어서 의자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핸드백을 챙겨들었다. 몸을 마악 돌리려고 할 때였다.

“내일 저녁…”

아까처럼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저스틴의 목소리가 미진의 귓가에 날아와 앉았다.

“내일 저녁 회식은 어디에서 할까요?”

“………..”

“지난 번 거기 이탈리아 식당 좋던데 이번에도 그리로 정할까요?”

“……….”

사무실 식구인 저스틴과 미진, 그리고 지금 한국방문중인 정선우와 매월 둘째 주 금요일에 하기로 한 회식에 대한 얘기다. 지난 번 정선우가 추천해서 갔었던 이탈리아 식당, 참 마음에 들긴 했다. 분위기도 음식도 서비스도 실내 장식도. 그리고 실내를 가득 채우던 음악도. 음식값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게 흠이긴 했었지만.

“어때요? 거기?”

저스틴이 다그치듯 물었다. 미진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거기 괜찮아요?”

저스틴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묻는다.

“대답해요. 괜찮죠? 금요일 저녁이라 기다리지 않으려면 예약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정… 정 선생님도 안 계신데…우….. 우리 둘밖에 없는데……”

더듬거리듯 간신히 한 마디 하는 미진. 그녀의 귓가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지난 번 그 식당, 강위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치에 있는 ‘절벽(cliff)’이란 근사한 이름의 식당. 그날 저녁을 생각하면 미진은 가슴이 뛴다. 호흡이 가빠온다. 정선우가 전화를 받으러 잠깐 밖으로 나간 사이. 절벽밑으로 검게 흐르는 강이 통유리창을 통해 훤히 내려다보이는 식당안에 둘만이 남겨졌다. 하얀 식탁을 마주하고 저스틴과 미진 단 둘만.

비록 상관이긴 하지만 젊고 잘 생긴 남자가 미진의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고 몰래몰래 곁눈으로 훔쳐만 보던 빛나는 남자가, 눈 부셔서 감히 똑바로 눈을 마주하지 못하던 남자가 바로 눈 앞에 앉아 있었다. 미진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둘만 있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애꿏은 와인 글래스만 움켜쥐고 시선을 창밖으로 두고 있었다. 얼른 정선우가 돌아와 불편한 분위기를 깨트려 주길 빌며. 그런데 이를 어쩌나. 미진의 마음 한 켠으로는 정선우가 돌아오지 말고 그대로 가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하니!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다니. 그 때를 생각하면 미진은 스스로 놀란다. 누구보다 정숙하고 현숙한 여자라고 자신하고 살아왔던 미진이었다. 단 한순간도 헛된 생각이나 한눈을 팔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살았다고 자부했던 미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동안 그런 엄청난 상상을 하다니.

미진의 바람과는 달리 정선우는 금방 돌아왔다. 자리는 다시 아까처럼 화기애애해졌다. 오늘 저녁은 유난히 와인맛이 좋다면서 연거푸 세 잔을 주문해 마신 저스틴은 적당히 취해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정선우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잠시 피하기 전, 하고 있던 몇년 전의 유럽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했다. 프랑스의 어느 시골 식당에서 만났던 천사같이 아름다웠던 한 부인과 그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저스틴의 얘기가 거의 끝날 무렵 정선우의 전화기가 다시 울었다. 정선우는 양해를 구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한국에 사는 노모가 심한 치매기가 있어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병원에 있어 나을 병이 아니라서 집으로 모셔야 한다고 했다. 형제들이 누구 집으로 모실 것인가에, 그리고 각자 한달에 얼마씩 추렴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해 전화를 자꾸 걸어 온다면서.

정선우가 나가고 미진과 저스틴은 다시 침묵속에 남겨졌다. 미진은 어둠속에 잠긴 강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스틴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누군가가 같이 끼어 있으면 괜찮은데 저스틴과 단 둘이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어색하고 어색해서. 사무실에서는 둘만 있어도 괜찮은데 밖에 나오니 보통 이상한 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시선을 애써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진은 곧 고개를 돌려 저스틴을 바라보아야 했다. 나 좀 봐요 하고 저스틴이 미진을 불렀던 까닭에. 저스틴의 두 눈이 미진을 쏘아보고 있었다. 뜨겁고 강렬한 눈빛으로. 저스틴은 석고처럼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 표정에 비해 눈빛만은 서늘하고 깊은 사람이었다. 이끼가 많이 끼어 있는 오래된 우물처럼 깊고 서늘한 눈빛. 그 서늘하고 깊은 눈빛이 다르게 변해 있는 것이다. 그 뜨거운 눈빛으로 미진을 바라보면서 저스틴은 말했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가끔 당신 생각을 해요”

미진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 앉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면서…. 잠 안 오는 밤 소파에 누워서…..당신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

“미진이란 여자, 결혼하지 않은 여자였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도……”

".............."

"내가......"

내가, 하고 저스틴이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정선우가 돌아왔다. 정선우가 말했다.

“아무래도 가까운 시일내로 한국에 한번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한국에 살고 있는 동생들이 네명이나 되는데 갖가지 핑계들을 끌어다대면서 서로 어머니를 안 모시려고 야단들이라서요. 장남인 제가 나가서 확실하게 교통정리를 하고 와야겠네요….. "

화제는 자연히 요즘 노인들의 수명과 치매로 옮겨졌다. 미진도 그 화제에 끼어 들었으나 머릿속은 미로같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저스틴은 자로 잰듯 정확하고 냉철하고 진중한 남자였다. 술에 취했다고 마구 허트러져 심중에 없는 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미진이가 지금껏 보아온 저스틴은. 그런 남자의 입에서 나온 세마디. 집에 혼자 있으면 가끔 당신 생각을 해요……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면서…. 잠 안 오는 밤 소파에 누워서…..당신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미진이란 여자, 결혼하지 않은 여자였으면 참 좋겠다 ……

저스틴이 방금 한 말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예, 예, 아, 그러셨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고 건성으로 대화에 장단을 맞추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게 한달 전 저녁이었다. 정선우는 일 주일 전 한국으로 떠났다. 금방이라도 떠날 듯한 정선우의 한국행이 늦어진 것은 만기일 지난 여권을 새로 만드느라. 보름 예정으로 떠났으니 다음 주면 정선우는 돌아 올 것이다. 회식은 정선우가 돌아와서 셋이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일주일 늦게 한다해도 상관없을 회식. 그런데.

“둘만이면 어때요? 둘이라고 회식을 못 할 것은 없으니까….”

“………….”

“그 식당 좋지 않았어요?”

미진이 대답을 하지 않자 저스틴이 물었다. 아까보다 약간 톤이 올라간 목소리다.

“예….예에…좋…좋았어요…..”

“싫으면 말해요. 당신 말대로 우리 둘뿐이니까 그냥 가까운 식당으로 가도 좋아요”

“……….”

당신이 결혼하지 않은 여자였으면 참 좋겠다는 저스틴의 말은 미진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왜냐면, 왜냐면. 미진 역시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고 있었으므로. 미진에게는 직장이라고는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결혼한 후 지금까지 무위도식하고 있는 남편이 있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밤이나 수세미같이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는 남자가 미진의 남편, 창민이었다. 가족의 생계가 미진의 갸날픈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철이 돼도 맘에 드는 옷 한벌을 못 사입으면서. 어떻게하면 하루종일 가도 햇볕 한 번 안 드는 아파트이긴 하지만 렌트비를 밀리지 않고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흘들이로 고장나는 고물차를 싸게 고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나날들.싱크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장마철의 행주처럼 쿰쿰한 냄새를 풍기며 시들어가고 있는 미진의 인생.

현실이 가혹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미진은 늘 생각했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혼자였다면 비상의 날개를 펼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 상상은 그저 상상으로만 끝날 뿐이었다. 왜냐면 피할 수 없는 현실, 죽어도 혼자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현실이 눈 앞에 있었다 . 케이, 제이 쌍둥이 딸이 있었다. 엄마가 이 세상의 전부인 귀엽고 영특한 딸들. 혼자 힘들게 생계를 책임진 엄마를 늘 가엾게 생각하고 재롱을 떠는 보배들이 있었다.

그날 저스틴의 말은 깊은 떨림으로 미진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갖혀있는 듯한 막막함 속에 있는 미진에게 반짝이는 빛이 되었다. 그러나 그 떨림은 한달이란 시간이 가면서 점차 미진의 머리에서 옅어져갔다. 왜냐면 저스틴은 그 이후에 두번다시 그 어떤 다른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정선우가 한국에 간 후 단 둘만이 남겨진 사무실. 매일 얼굴을 보면서도 저스틴은 그 전에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표정과 감정없는 목소리와 얼굴로 업무에 대한 얘기만 할 뿐이다. 미진은 그날 저녁 뜨거운 눈빛을 보내던 사람이 맞나 싶어서 저스틴의 얼굴을 흘깃거리며 몇번이고 훔쳐보았었다. 저스틴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미진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술 취해 농담 한 마디 한 걸 가지고나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구나. 혼자서 떨려하고 황홀해 했구나. 미진은 마음을 추스렸다. 진정시켰다. 그런데 그 남자가, 큰 키에 선이 고운 얼굴에 누가봐도 그리스 조각같이 생겼구나 할 정도의 아름다운 남자가 다시 그 식당엘 가자 한다. 단둘이서 저녁을 먹자 한다.

“그…그럼…그…그렇게 해요….”

미진이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이상하게 저스틴 앞에서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업무와 관계된 것도 그냥 평범한 대화도 다 어렵고 힘들다.

“그렇게 하다니요? 그 이탈리아 식당으로 가는 것? 아님 근처의 식당으로 가는 것?

“이…이탈리아….”

당연히 이탈리아 식당이지.

“그럼 예약할께요 “

저스틴은 툭 던지듯 말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미진은 핸드백으로 엉덩이를 가리고 비척거리며 뒷걸음질 반, 옆 걸음 반으로 해서 출입문 앞에까지 걸어갔다. 미진은 문을 열기 전 저스틴이 있는 쪽을 흘낏 쳐다본다. 저스틴은 여전히 이쪽을 쳐다보지 않고 얼굴을 컴퓨터 화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미진의 가슴에 작은 서운함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사람이 나가는 데도 쳐다보지도 않다니.

미진은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한단 한단 천천히 걸음마를 막 배운 아이처럼 내려오면서 버릇처럼 한숨을 다시 내쉰다.언감생심 쳐다보지 못할 남자다. 그런데도 미진은 욕심이 난다. 내 남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룰 수 없는 욕심을 미진은 부려본다.

미진은 아이들 둘이나 낳은 여자다. 처녀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몸매이긴하지만 서른을 넘기면서 얼굴 여기저기 자리잡기 시작하는 주름살이 고민인 여자. 어느 누구의 눈길을 끌지 못할 것 같은 평범한 아줌마다. 돈도 미모도 재능도, 내세울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여자다. 더구나 ‘결혼’까지 한 . 미진에 비해 저스틴이 가진 조건은 눈부시다. 미진이 일하고 있는 ‘아시아나 마켓’의 하나뿐인 아들인 것이다. 원래는 저스틴의 형이 아버지와 함께 경영하던 마켓이었다. 지난 겨울 저스틴의 형이 사고로 불시에 세상을 떠나자 다른 주에 살고 있던 저스틴이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마켓을 맡게 됐다.

미진은 장례식장에서 본 저스틴의 첫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다부지고 근육질로 생긴 형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의 저스틴의 모습을. 저스틴은 키가 컸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먼 조상대에 서양인 피가 섞이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반듯한 이목구비에 음울하고 서늘한 눈빛이 첫 대면에서도 인상에 남았다. 형이 불의의 사고를 세상을 떠났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유난히 절절한 저스틴의 눈빛은 그날 미진에게 크게 각인되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저스틴은 큰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다. 쓰고 쓴 실연의 상처. 대학때부터 알아서 동거까지 했던 여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버렸다고 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집안에서도 다 인정한 여자. 그리스 여자라고 했다. 저스틴이 여자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그리스까지 몇번이나 찾아갔으나 실패했다는 것이다. 미진은 그 소문을 듣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저스틴의 우울한 눈빛은 실연의 상처로부터 기인된 것이었구나.

저스틴은 말이 별로 없는 남자였다. 저스틴의 형이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참견하면서 지시를 내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데 반해 저스틴은 직원들이 각자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처음 사무실에 온 날 저스틴은 누구든지 으레껏 하기 마련인 ‘잘 부탁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회계일에 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알 터이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 처럼 알아서들 하세요”

딱 그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는 탁월하고 유능한 비지니스 맨이었다. 대학때 경영학을 전공했다더니 그는 직원들과 손님들을 다룰 줄 아는 남자였다. 그는 직원들과 잦은 접촉을 했다. 처음 몇달간 저스틴은 사무실에 붙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출근해서는 매장안에서 거의 시간을 다 보냈다. 아시아나 마켓은 이층에는 재고 창고와 저스틴과 미진이 있는 회계 사무실과 직원 휴게실이 위치해 있었고 일층 전면이 매장인 구조였다. 저스틴은 매장안에서 상주하다시피 했지만 직원들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지시를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손님들의 불편사항과 종업원의 에로 사항에 귀를 기울였다. 손님과 직원들로부터 전해들은 불편과 에로사항은 일 주일안에 시정하거나 개선시켰다.

또한 종업원들 월급을 10% 일괄적으로 올려 사기를 잔뜩 북돋아 놓았다. 결근 안 하는 종업원과 손님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종업원, 그리고 성과가 눈에 보이는 종업원은 휴가와 상품권을 수여하는 포상제도를 실시했고 각 부서별로 한달에 한번씩 회식을 하게 했다. 일 년 열두 달 가야 음료수 한잔 건네는 법이 없는 형과는 달리 역시 비지니스를 전공한 사람이라 다르다는 말들이 직원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매장내 식품들도 다 교체됐다. 예전에는 이름도 없는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 진열대를 뒤덮고 있었다. 저스틴은 그런 제품들을 거의 다 폐기처분하고 한국 제품으로 바꾸었다. 가격은 약간 올랐으나 믿을 수 있는 식품만 취급한다는 전략이 주효했다. 매상이 배로 뛰어 올랐다. 단 육개월만에 이룬 성과요, 변화였다. 마켓 일에 전혀 경험이 없는 저스틴을 염려하고 걱정해서 가끔 저스틴과 같이 출근을 하던 아버지 한 사장은 더 이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작은 아들이 예상외로 마켓을 잘 운영을 하고 있으니 한숨 푹 놓고 마나님과 골프 여행이나 다니며 장남 잃은 슬픔을 달래고 있다던가.

일층으로 향하는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훅 밀려왔다. 동시에 쏴 하고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빗소리가 들린 것 같다고 미진은 생각했다. 사무실 유리창으로 빗방울이 돋는 것을 본 것도 같다. 얼룩진 바지에 신경쓰느라 비가 온다는 데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미진이었다.

비가 오고 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미진은 핸드백을 뒤져 차 열쇠를 꺼내려다 문득 손길을 멈추었다.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창민이 차를 쓰겠다고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불러서 전철을 타고 출근을 했던 것이다. 전철역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별로 멀지 않은 거리이긴 하지만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겨울의 꼬리를 몰아내려는 듯 제법 강한 빗줄기다.

지금 미진에게는 우산이 없다. 비가 오리라고는 예상을 못했기에 가져오지 않았다. 미진은 또한 핏물이 얼룩덜룩한 바지를 입고 있다. 그런 꼴을 하고 어떻게 전철역까지 걸어간단 말인가. 비가 와서인지 어둠은 짙게 내려와서 깔려 있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긴 했지만 걸어가다가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미진은 비오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궁리했다. 전철역까지만 무사히 걸어갈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빈 자리가 있으면 앉아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꼼짝을 않고 있으면 될 것이고 자리가 없으면 벽을 등지고 서 있으면 될 것이다. 일단 전철역으로 가는 게 문제이긴 한데. 핸드백으로 머리를 가리는 게 좋을까, 엉덩이쪽을 가리는 게 좋을까 궁리하다가 문득 미진은 아침에 케이와 제이가 했던 부탁을 생각해낸다. 저녁에 떡볶이를 해달라던.

퇴근한 후 마켓에 들르리라던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틀어져 버렸다. 빈 손으로 집에 가야 한다. 떡이재료를 사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두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실망을 줄 생각을 하니 미진의 가슴이 답답해온다. 핸드백으로 엉덩이를 가리고 미친 척하고 마켓에 들어갔다가 갈까, 생각하면서 미진은 미간에 주름을 모은다. 핸드백으로 뒤를 가리고 있는 꼴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떡하지? 이럴 때 스웨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스웨터 등판이 엉덩이 쪽으로 가게 해서 허리에다 묶으면 감쪽같이 가려질 건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출구가 있는 계단 아래서 엉거주춤 서 있는 미진이다. 전철을 타러 갈지 마켓에 들러 아이들이 부탁한 떡복이재료를 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미진이다. 하루종일 컴퓨터 좌판을 두드린 양쪽 팔과 어깨와 고개가 뻐근하게 아파오고 있었고 투나 샌드 위치 한 쪽으로 점심을 떼운 뱃속은 텅 비어서 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 얼른 집으로 가고 싶다. 오늘따라 차를 가져오지 못한 게 미치게 아쉽다. 차를 가져오지 못 할 상황을 만든 창민이 밉다.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춥고 을씨년스런 날씨를 헤치면서 바람처럼 빠르게 운전해 집으로 가고 싶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다음 보송보송한 융으로 만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밝고 따사한 불빛 아래서 딸 아이들과 떡볶이를 만들어 먹고 싶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어디까지나 미진의 머릿속 상상일 뿐 갈 길이 멀었다. 날은 칠흙같이 어둡고 빗발은 조금씩 더 거세지고 있었다. 미진은 자기도 모르게 계단위에 스르르 주저 앉았다.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 전철역을 향해 걸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창민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고 생각을 했으나 미진은 얼른 머리를 흔들어 창민을 털어냈다. 신문사 직원들과의 모임이 여섯시라고 했다. 지금 창민은 미진이란 존재는 아랑곳없을 터였다. 밖에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천둥번개가 치든지. 하루종일 힘들게 일한 미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비를 흠뻑 맞으며 전철역으로 걸어가든지 말든지 창민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을 터였다. 여지껏 그 남자, 창민은 그런 식이었으므로. 부부로서 최소한의 자비심이나 동정심조차 보여주지 않는 남자가 창민이었다.

모르긴해도 집안은 엉망일 터였다. 아침에 전철을 타려고 일찍 나오느라 채 마치지 못한 설거지가 아직도 산더미같이 개수대에 쌓여있을 것이고 자고 일어나서 몸만 쏙 빠져나갔을 침대는 그냥 그대로 있을 것이다. 창민이 바르고 나간 무스 병이니 로션병이 두껑이 열린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만약 창민이 미진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남자라면 대충은 치우고 나갔겠지만 그 남자에게 그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미진은 무릎위에다 팔꿈치를 세우고 머리속으로 양손을 쑤셔 넣었다. 애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는 결혼생활. 양가 부모와 하객들 앞에서 했던 맹세를 지키느라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는 결혼생활. 두 딸 때문에 억지로 지탱해 가고 있는 결혼생활. 그 결혼생활이 오늘같은 날은 더욱 더 굴레같다는 생각을 하는 미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