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오가 손을 내밀었다.

 

미진은 그 손을 잡지 못했다. 선생님 앞에서 꾸중듣는 아이처럼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뿐. 갑자기 목이 메여서, 눈물이 복바쳐 올라서였다.

그렇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마냥 그러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진은 고개를 들었다.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심해 들어 가요”

조심해 들어 가요, 하고 말하던 유현오가 미진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커진 유현오의 눈에 놀라움이 담겼다.

“미진씨……”

유현오가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미진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유현오는 약간 당황하는 듯 했다. 그의 입에서 가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유현오는 묵묵히 미진을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 표정은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알아요. 말 안 해도 다 알아요…...

“갈….갈께요…..”

미진이 힘들게 겨우 한마디 했다. 미진은 차문 손잡이를 잡았다.

“고….고…고맙….고맙습니다…..”

차밖으로 두 발을 내리면서 미진은 고개를 비틀어 유현오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태워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기운 내요....."

 

"안녕히 가세요..."

“그래요….또 봐요…..”

미진은 유현오의 차에서 내렸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머금은 빗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미진의 온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진은 핸드백으로 머리를 가리고 아파트 쪽을 향해 뛰었다. 미진이 사는 아파트는 대로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있었다. 미진은 출입문 앞에 도착해서 뛰기를 멈추고 몸을 돌렸다. 회색 승용차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빗속에 서 있었다. 앞을 향해 뻗어 있는 두 줄기의 헤드라이트 안에서 빗물의 입자가 먼지처럼 부옇게 떠다니고 있었다.

미진이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승용차는 가볍게 빵, 하고 클랙션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현오. 미진이 ‘유 선생님’이라고 칭하는 그를 만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허기지고 춥고 피곤하고 지친 상태에서 한 시간 이상을 걷고 타고해서야 간신히 집에 올 수 있었을 거니까. 차로는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몇 배로 걸려야 했을 거니까.

멀거니 비오는 밖을 내다보며 출입문 층계에 앉아 있던 미진의 눈앞을 미끄러지듯 지나쳐가던 승용차가 다시 후진해 왔을 때, 그리고 그 차안에 유현오가 타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미진은 뛸 듯이 반가왔다.

혹시라도 저스틴이 알아차릴까 그렇게 노심초사했던 일, 핏자국으로 얼룩진 바지를 입은 뒷 모습에 관해서 유현오한테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은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긴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걸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걱정이 안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잽싸게 타고 내리면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정말 유현오가 그 시간에 그 장소에 나타난 것은 그냥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춥고 을씨년스럽고 축축한 저녁에 집에 돌아갈 일이 막막해서 망연자실 앉아있는 미진을 도우려 한 신의 뜻이었을까.

유현오가 말했다.

아시아나 마켓에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근처 보험회사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혹시나 싶어 건물 뒷쪽으로 와 본 거라고.

미진의 퇴근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지만 그냥 그쪽으로 한번 와보고 싶더라고 했다. 그랬는데 미진이 일하는 사무실에 불이 켜져있더라고 했다. 모두 퇴근해 컴컴할 줄 알았던 사무실에 불이 환하니까 어, 이거 횡재했는 걸?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올라가서 뜨거운 커피나 한잔 얻어마셔야지 하다가 어쩌면 육개월 전에 온 아시아나 마켓 둘째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주춤했다고 했다.

“그 새 사장, 엄청 의욕적으로 일 한다며? 그 사장일 거라고 생각했지. 퇴근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미진씨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겠지. 정선우는 아직 한국에 있을 테고 말이야.”

이층으로 올라가보려던 마음을 단념하고 나니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더라고 했다.

“미진씨가 커피 하나는 참 맛있게 타잖아. 그 커피는 미진씨 사무실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는 거라서 말이지….”

아쉬운 마음에 파킹랏을 한바퀴 돌고는 그냥 돌아가려는데 회계사무실로 올라가는 출입문 계단에 누가 앉아 있더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미진이더라고 했다.

“그 시간에 미진씨가 그렇게 앉아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미진 역시 어디서 나타난지 모를 승용차가 앞에 섰을 때 그 안에 유현오가 타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했었다. 왜냐면 그 시각, 그 장소에 유현오가 나타날 일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 시각, 그 장소에 미진이 있으리라고 유현오가 상상을 못했던 것 처럼.

그러나 둘은 거짓말같게도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었고 장마철에 잠깐 나온 햇볕을 본 사람들처럼 서로를 반가와했다.

미진은 일단 크게 안도의 숨부터 내쉬었다. 비를 맞으며 전철역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그리고 유현오라면 구구절절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사실이 미진을 편안하게 했다. 집에까지 좀 태워다 주실래요 하면 유현오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그러라고 할 사람이었으니까.설사 미진이 바깥에 발가벗고 서있는 모습을 보았다 해도 흉보지 않고 손가락질 하지 않고 이유를 묻지 않고 담요부터 덮어 줄 사람이었으니까.

유현오는 그럴 사람이었다. 그는 사려깊고 진중한 남자였다. 미진보다 나이가 열살 가까이 많아서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미진에게는 오빠같이 아버지같이 푸근하고 든든한 기분이 드는 남자였다.

미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미진을 차에 태웠을 때 유현오는 사정설명을 묻지 않았다.

오늘같이 기분 처지고 별로인 날 미진씨같이 아름다운 여성을 차에 태우다니 영광인 걸 하며 어울리지 않는 너스레를 떨었을 뿐이다.

히터를 틀고 있었던 듯 유현오의 차 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축축하고 습한 바깥과는 완전히 딴 세상같이. 그리고 차안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장송곡같이 장중하고 무거운 클래식이었다. 자기 취향이 아니었으나 미진은 웃으며 한마디 했다.

“좋네요. 오늘 같이 비오는 날 잘 어울리는 음악 같은데요”

미진의 말에 유현오가 쑥스러운 듯 흣, 하고 웃었다.

“베토벤의 교황곡 7번 2악장이예요…… “

“베토벤…”

“노동치는 사람과 클래식 음악. 안 어울리는 조합이지요? 안 어울려도 할 수 없어요. 오늘은 그냥 들어두어요. 다음엔 미진씨가 좋아하는 걸로 틀어 드릴 테니까”

우현오의 말에 미진도 흣, 하고 장난스레 웃었다.

“제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 줄 알고?”

“글쎄, 지금부터 애쓰면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미진은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온몸을 엄습해오던 조바심과 불안감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따뜻한 차를 타고 집으로 바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분이 좋아진 미진이었다.

유현오는 전기 냉동 기술자다. 아시아나 마켓의 회계사인 정선우와 대학동창이다. 조수 한 사람을 데리고 ‘프리 랜서’로 일하고 있긴 하지만 아시아나 마켓에 거의 소속된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마켓안에 설치된 수십대의 냉장고, 냉동고, 고기 절단 기계, 아이스 머신등을 거의 전담하고 있는 사람이 유현오이기 때문이다. 기계에 문제가 문제가 생겼다하면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유현오기때문이다. 유현오 역시 아시아나 마켓에서 호출이 오면 밤과 낮과 새벽을 가리지 않는다. 만사 제쳐놓고 번개같이 달려 간다. 그리고 깔끔하고 말끔하게 처리를 해준다. 뛰어난 기술에 비해 가격도 별로 높지 않다. 그래서 아시아나 마켓 측에서는 이 동네의 다른 기술자보다 유현오를 일순위로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나의 금전 출납은 미진이 맡고 있다. 작은 액수의 수표 한장도 미진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나갈 수 없다. 유현오와 미진은 그렇게 서로 알고 된 것이다. 수표를 끊어주고 받아가는 사이로.

유현오가 수표를 받으러 사무실에 올 때마다 미진은 커피를 끓여 주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었다.정선우와 같이 있을 때가 많았지만 간혹 정선우가 외근 중일 경우에는 둘만 일때도 있었다. 처음엔 단 둘이 있는 게 어색하고 거북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런 마음이 옅어지게 만드는 남자가 바로 유현오였다. 진중하지만 소탈하고 농담도 잘 하나 결코 가볍지 않고 남의 사정을 잘 헤아릴 줄 아는 태평양같이 넓은 마음의 소유자.

미진이 안전벨트를 매자 유현오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난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데 미진씨는 어때요?”

“…………”

예전에는 좋아했었다.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를 때. 그러니까 내일의 양식과 렌트비를 걱정해야 하는 실생활이 가까이 있지 않을 때. 낭만과 꿈을 우선으로 했을 때.

지금은 싫다. 구질구질하고 냄새나고 깔끔하지 못한 듯한 그런 느낌이 싫다.그리고 비가 옴으로 야기되는 이런저런 불편이 싫다. 오늘만해도 그렇다. 비만 오지 않았더라면 차갑고 축축한 계단에서 바깥을 내다보며 그렇게 청승을 떨지 않았어도 될 일 아닌가. 덕분에 유현오의 차를 타보는 호사를 누리긴 하지만.

미진은 곁눈으로 차안에서 슬쩍슬쩍 유현오를 쳐다보았다.

정선우와 동갑이니까 올해로 사십 다섯살인 남자다. 늦게까지 혼자 지내다가 여섯살 연상의 이혼녀, 더구나 남매까지 딸린 미국 교포 여자와 결혼해 미국에 왔다는 사람이다.

“그때 우리 동문회에서 굉장했었지. 유현오 저 자식, 절대 맨정신이 아니라고, 정신병원에 집어 처넣어야한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까.”

정선우의 말이다. 그러나 그 연상의 여자는 결혼한 지 몇년만에 세상을 떠나버렸고 그 후 지금까지 유현오 혼자 그 남매를 자신의 자식처럼 키우며 살고 있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순애보의 남자가 바로 유현오이다.

반대편 차선의 불빛이 유현오의 얼굴위로 흐르듯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가 둘이나 딸인 연상의 이혼녀와의 결혼이라는 엄청난 일을 덜컥 저질러 부모가슴에 못을 박았던 남자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선이 고운 남자의 얼굴이다. 어느 시골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나 음악 선생님이라고 했으면 딱 어울릴 섬세하고 선한 얼굴.

세상 사람들이 놀랄 만한 결혼을 할 정도의 뚝심과 투지와 도전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여지지 않았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점잖고 신중하고 과묵한 남자의 어디에 그런 열정이 숨어 있었을까.

“유 선생님. 저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스럼없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농담도 주고 받을 정도로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어느날이었다. 마켓 주방에 새 아이스 머신을 설치해주고 땀범벅이 돼 유현오가 나타난 날 오후, 미진은 여느때와같이 커피잔을 내밀었고 유현오는 그 커피를 맛있게 마셨다.

미진은 평소 유현오에게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을 떼었다.

정선우는 외근중이고 저스틴도 마켓에 나가있어 사무실엔 미진 혼자뿐이었다. 할 일도 별로 없고 낮잠이라도 잤으면 싶은 나른한 오후에 유현오의 출현은 미진을 기쁘게 했다. 미진은 장난이 가득한 표정과 목소리로 물었다.

“용기가 어디서 났어요?”

“용기라니?”

“부모님을 실망시켜가며 주위사람들을 경악에 빠트려가며 결혼을 감행한 용기말이예요”

“……….”

유현오가 대답을 하지 않고 미진을 바라보았다.

“유 선생님은 외아들이었다면서요. 부모님의 상심이 말도 못하게 컸을 텐데 어떻게 그런 결혼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요…. ”

미진은 덧붙혔다.

“그런 엄청난 일, 용기가 없으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거잖아요….”

유현오는 정선우의 책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팔짱을 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유현오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미진이 뭐라고 한 마디 더 하려는데 유현오가 고개들 들면서 입을 열었다.

“미진씨는 그걸 용기라고 표현하는군. 많은 사람들이 만용이라고, 한 때의 철없는 객기라고 치부하던데…. ”

유현오는 정선우의 책상위에 놓았던 종이컵을 우그러트려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서 말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은 일생에 한 번 정도는 목숨을 걸 정도로 불 같은 사랑을 하지요. 사랑의 강도와 수치를 1에서 10까지로 표현한다면 10정도의 사랑, 아니 10을 넘어 12까지도 가능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유현오가 잠시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랑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미진이 말했다.

“한마디로 한국에서는 꽤 잘 나가던 위치에 있던 분이셨다고 들었어요. 명예, 지위, 돈등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쟁취해도 좋을 만큼 그렇게 그 사랑이 중요했나요?”

조금은 주제넘은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유현오가 말 한 그 사랑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전제가 깔린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현오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감정이 배제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가 들면 젊은 날의 추억을 되새김질 하면서 산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평생 되새김질 할 추억거리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그만하면 되었지 않아요”

“그렇지만..”

유현오가 자신을 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미진은 물러 설 수 없었다.

정선우도 알아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던 유현오의 결혼의 이유를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것만 같은 괜한 오기같은게 생겨서. 오기도 오기지만 솔직히 말하면 미진은 얼굴도 모르는 유현오의 여자에게 질투를 느꼈던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여자였길래, 얼마나 멋진 여자였길래 한 남자의 영혼을 그렇게 세차게 흔들어 놓았을까. 한 남자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을까.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결혼도 일종의 거래라면 거래잖아요. 그런데 유 선생님은 손해도 엄청 손해보는 결혼을 하신 것 같아서요. 되새김질 할 추억거리와 맞바꾸기엔 유 선생님이 잃은 게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괜찮으시다니 제가 할 말은 없지만…..”

그렇게 말하며 미진은 생각했었다. 이 남자, 유현오처럼 나와 창민도 불 같은 사랑을 했었을까. 10을 넘어 12까지 넘나드는사랑을 했었을까.

창민을 사랑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사랑했기에 결혼까지 했다. 단지 아버지와 다르다는 이유로 창민을 사랑한 것이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던 아버지. 폭력적인 아버지. 무능하기만 해서 가족을 한번도 제대로 부양하지 못했던 아버지. 엄마의 갸느린 어깨에 기대어 평생을 기생한 아버지, 그러니까 참다운 아버지와는 완전 거리가 먼 사람이 미진의 아버지였다.

바람직하지 못한 아버지상(像)을 가진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편감으로 아버지와는 정반대인 남자를찾는데 치중한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술먹는 모습을 지긋지긋하게 보고 자란 여성들은 술 먹는 남자를 혐오하고 경멸하면서 남편감의 일순위로 술을 입에대지 않은 남자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미진도 그랬다. 창민을 선택한 것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이유,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남자’라는 극명한 사실 하나에만 온 중점을 두느라 다른 결점이나 약점을 보지 못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뒤에 감추어져 있던 사실, 무능과 게으름을 간과한 것이었다. 가장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부양의 책임감이 없는 남자는 최악의 남편과 아버지라는 사실은 미진은 결혼후에야 깨달았었다.

아버지로부터 항상 맡아야 했던 술냄새를 맡지 않아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창민을 선택한 미진. 창민과의 결혼을 아버지를 피하는 도피처인 줄 알았던 미진. 그리고 지금, 이 모양 이꼴이다.

“후회같은 것, 그런 것은 안 하세요…..”

미진이 그렇게 물었을 때 유현오는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말했다.

“후회, 하지요. 그냥 평범하고 착한 여자만나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볼 걸, 하는 후회. 그러나 그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후회 하지 않아요. 만약 그 시간을 되돌린다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그나저나 미진씨…..”

유현오가 고개를 들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몇가지 물어봅시다. 나도 미진씨한테 궁금한 것 많아요"

유현오가 미진에게 물었다. 미진의 남편에 관해. 그리고 현재의 결혼생활에 관해.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됐어요?”

“………”

“유학을 왔다고 들었는데 왜 공부를 끝마치지 못했어요?"

벌써 10년 가까이나 된 이야기다. 태산같이 크고 높은 꿈을 품고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창민은, 그리고 미진은 둘 다 유학 올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진이 미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때 담임 선생님 덕분이었다. 모든 방면에서 특출하고 공부도 뛰어나게 잘 하는 미진을 아깝게 여긴 고등학교 은사가 유학 비용을 책임져 주기로 했다. 미진의 꿈을 이룰 때까지 매달 지원금을 보내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온지 2년만에 그 고등학교 선생님이 갑작스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당연히 지원금은 끊어졌고 어떻게 해야 할지 기로에 서 있는 판국에 설상가상으로 임신이 돼버렸다. 그렇게 조심을 했는데도 아이가 들어서고 만 것이다. 그것도 쌍동이로.

이래저래 공부는 자연스레 중단돼버렸고 아이를 낳은 후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직업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왜냐면 창민을 바라보고 있다가는 두 아이와 함께 굶어죽게 생겼었으므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미진과는 달리 창민은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홀어머니와 두 누나가 갖은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한 덕분이었다. 창민은 졸업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직장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채 지금까지 무위도식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컴퓨터 게임을 하는 일. 멋진 게임을 개발해 미국 회사에 거액을 받고 넘기겠다는 허황된 꿈을 품은 채. 그리고 교포신문에 글을 투고하는 일. 글 재주가 있는 창민은 대학때 사보기자를 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 한 교포신문 문예현상모집에 당선이 됐었다. 그래서 몇천불의 상금을 받아왔는데 그 돈이 결혼해서 창민이 벌어온 유일한 수입이다.

“유 선생님이 왜 결혼했는지에 대해 묻다가 제 신세타령을 풀어놓은 셈이 됐네요…”

이야기를 마친 미진이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을 때 유현오는 웃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없이 미진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친정식구한테도 하지 못했던, 자갈밭을 맨발로 걸어가는 듯한 고통스런 이야기를 – 특히 학업을 그만두어야만 했던 부분을 이야기 할 때 미진은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왜 그날 유현오에게는 다 털어놓을 생각을 했을까.

현상황이야 어쨌든 직장에서의 미진은 상냥하고 친절했다. 그래서 아시아나 마켓 전 직원들이 미진을 좋아했다. 또한 마켓과 연관되어 있는 수십처의 거래처 직원들도 미진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중 미진이 기댈 수 있는 사람,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유현오 역시 아시아나 마켓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다. 남자고 미진보다 나이가 많고 평소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과거와 신상을 털어놓을 만큼 친한 상대가 아니다. 유현오같은 사람이면 얼마든지 더 좋은 조건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런 결혼을 했으며 지금도 혼자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미진 역시 궁금했다. 그래서 그냥 가볍게 그 궁금증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는데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됐다.

미진은 그날 꽤 긴 시간을 주절주절거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치 의사앞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처럼.

사실 그날 미진은 유현오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제가요, 가슴이 많이 아파요. 그리고 사는 게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워요. 어떤 땐 그냥 주저앉고 싶어요.......

그렇지만 유현오는 생판 남이다. 오빠도 아니고 삼촌도 아니고 친한 친구도 아니다.

미진은 안간힘을 쓰면서 그 비명을 참아냈었다.

소리내어 지르지 않은 비명이 유현오에게 들렸던 것일까.

한참동안 미진를 묵묵히 바라보던 유현오가 계속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미진에게로 걸어왔다.

“힘내요…..”

유현오는 미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쓰러지지 말아요…….”

왜 그랬을까, 그때.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낸 미진은 그날 유현오의 가슴에 쓰러져 울고 싶은 걸 참느라고 또 애를 써야했다.

꾹꾹 억지로 눌러놓은 풍선이 마침내는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팡, 소리를 내며 박차고 올라 오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로 억지로 버티어내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짐이 힘에 부친다는 걸 알고 있었던 미진이었다. 그 짐을 다 내려놓고 누군가의 품에 기대어 울고 싶었고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었다. 그랬는데 그날 유현오한테는 그러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는 듯 미진이 끊어 준 수표를 집어들면서 유현오가 말했다.

“미진씨도 아는 거겠지만…..”

유현오는 말을 한번 끊었다가 미진을 쳐다보았다. 유현오는 미소지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채 생활에 치여 시들어가는 미진을 진심으로 안타까와하는 듯 했다.

“ 이 또한 지나가리라……..”

출입문쪽으로 걸어가던 유현오가 몸을 돌려 미진쪽으로 걸어왔다. 유현오는 미진의 어깨를 다시 가볍게 두어번 두드렸다.

“지금 현실이 시궁창같겠지만, 그래서 하루하루 견디는 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다 지나가게 돼 있어요…….”

유현오가 사무실을 나가고 나서도 미진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을 올려 유현오의 손길이 닿았던 어깨부분을 만져보면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미진의 어깨를 두드려 준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힘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다….

그날 그랬던 것 처럼 유현오는 내릴 채비를 하는 미진의 왼쪽 어깨를 두어번 두드렸다. 또한 말했다. 기운 내요……

진심이 담긴 그 따뜻한 말에 미진의 가슴이 울컥한 것이다. 눈물이 복받쳐버린 것이다.

나는 지금 너무 지친 거야…

미진은 중얼거리며 핸드백에서 열쇠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열쇠를 구멍에 꽂았다. 그러나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냥 멀거니 서 있기만 하는 미진.

열쇠를 비틀어 문을 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미진이었다. 문을 열어보나 안 열어보나 뻔한 일이었다. 창민은 아직 안 들어왔을 거고 케이와 제이는 아직 이웃에 있는 베이비 시터인 쟈시와 할머니네에 가 있을 거였다.

하루종일 비어 있던 집안. 아침에 미진이 해놓은대로 그대로 있을 집안. 어쩌면 더 어질러져 있을 집안. 미진은 이제 그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미진이 들어가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창문을 활짝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는 일이었다. 지은지 100년 가까이나 되는 오래된 아파트라, 하루종일 가야 햇볕 한 번 안드는 어두운 곳이라 실내는 늘 이상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곰팡이 냄새같기도 했고 언제 깔았는지 모를 눅눅하고 찐득한 카페트에서 풍겨져 나오는 냄새 같기도 했고 아침저녁으로 해먹는 김치 된장 오징어 냄새 등 온갖 음식물들이 뒤범벅이 된 냄새같기도 하다.

냄새때문이라도 그 집에서 이사나가고 싶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가 될까. 지금 미진의 형편으로서는 요원하기만 할 뿐.

집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는 코에 익어버려서 그런지 둔감한데 바깥에서 집안으로 들어 갔을 때는 그 냄새를 참아내기 어렵다. 어떤 땐 구역질까지 올라오려 한다. 그래서 겨울이나 여름이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창문을 열고 단 몇분이라도 환기를 시켜 냄새를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덜 말라 축축한 바지를 벗어내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아침에 하다만 설거지를 마저하고 집안을 대충 정리한 후 아이들을 데려와야 한다. 오늘 떡볶이 재료를 사오지 못한 것에 대해 아이들을 잘 납득시켜야 하는데. 뭘 좀 먹이고 씻기고 좀 놀아준 후 재워야 한다. 늘 하던 일,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일을 또 해야한다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싫다는 생각이 든다.

미진은 따뜻하고 아늑하던 유현오의 차 안을 생각한다. 그냥 그 차를 타고 어디든 멀리 가버릴 걸…..

그럴 수 없는 게 아이들 때문에, 그렇다. 아이들 때문이다. 두 아이를 임신하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게 되었지만 미진은 단 한번도 아이들을 낳은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지금 힘겹게 버티고 있는 미진을 지탱하는 것은 단 하나, 아이들이다.

얼른 들어가야지. 얼른 들어가서 옷을 갈아 입은 후 아이들을 데려와야지. 그러나 마음뿐이다. 미진은 열쇠가 꽂힌 아파트 출입문만 내려다보고 서 있다.

비는 여전히 오고 있고 미진은 문밖에서 그렇게 석고처럼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