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씨의 어머니는 그 추운 겨울, 양말도 신지 않은 채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이씨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요양원으로 운전해 가는데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얼른 가서 제이씨의 얼굴을 봐야한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떠져 있었습니다. 나를 보지 못하고 가서 눈을 감지 못한 것일까요.

“미안해요.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지 못해서……”

그때서야 눈물이 마구 쏟아져내렸습니다. 죽을 끓여오겠다고 떠났던 게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냥 거기에 있을 것을,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제이씨 혼자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간 것입니다. 미안해요, 혼자 외롭게 가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나는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눈을 감겨주었습니다.

“눈 감고 편히 잘 가요, 내 사랑……"

입이 벌어져 있어서 타올로 턱을 받쳐 다물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를 낮게 틀어 그의 귀 부분에 갖다 놓아주었습니다.

나는 침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을 끌어 안았습니다. 체온이 남아 있어서 몸은 따뜻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그의 마지막 체온을 느끼고 싶을 뿐.

연락을 받은 친구들과 가족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병실에 들어서다가 죽은 사람을 끌어안고 있는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시체를 수습해 갈 직원들도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아무 말 못하고 의자에 앉아 내가 침대에서 내려오기를 마냥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이씨 어머니가 내게 그만 내려올 것을 종용했습니다.

“아가, 그만 내려 오거라. 네가 그러면 그 아이가 발길이 무거워서 떠나가지 못한다…..”

시체를 수습해 갈 직원들도 더 이상은 기다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차갑게 식기 시작하는 제이씨의 몸에서 내 몸을 떼어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일곱 시간이나 죽은 제이씨 옆에 같이 누워 시간을 보냈답니다. 내게는 아주 짧은 시간같았는데 자그마치 일곱 시간이나 그렇게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내가 제이씨에게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잘 했는지 잘 알고 있는 요양원측의 배려로 그렇게 많은 시간이 허용이 됐던 것입니다.

지퍼 백에 그의 몸이 들어가는 순간, 나는 사람들의 손길을 만류하고 다시 그의 얼굴에 뜨거운 키스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키스였습니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 나중에 하늘에서 다시 이어갑시다…..

그의 장례식.

그는 평생 외로운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죽어서는 넘쳐나는 문상객들로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은 내가 특별히 주문한 수백송이의 하얀 장미꽃으로 곱게 장식되었습니다. 나는 나랑 30년을 함께 한 성경책을 그의 관속에 넣어주었습니다. 윤승준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새벽에 1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 교회에 갈 때 내 품에 안겨 있던 성경책이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내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는 내가 평소에 해 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정신이 있을 때 그가 유언처럼 내게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은영이 네가 해준 반지를 꼭 나랑 함께 묻어 줘……”

공교롭게도 제이씨는 엘리자벳의 맞은 편에 묻혔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쓸쓸하거나 공허한 날이면 두 사람을 찾아갑니다. 두 사람의 무덤에 꽃을 꽂아주고 비석을 닦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오곤 합니다.

나는 가끔 생각합니다. 앞으로 제이씨같은 사람을 내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건장하고 남자다운 풍채를 갖춘 그였지만 매우 온화하고 자상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나를 아기처럼 대해주고 더할 나위없는 사랑을 주었지요. 그래서 내가 더욱 그에게 빠져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평생 사랑다운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나였기에 말입니다.

올 1월18일로 제이씨가 떠난지 10년 째가 되었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제이씨와 함께 했던 추억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의 따뜻한 목소리, 푸근한 마음씨, 그리고 아름다운 미소를. 특히 그의 노래솜씨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수를 배출할 정도로 그집 식구들이 모두 노래에 소질이 있었는데 특히 제이씨는 노래를 참 잘했습니다. 유머 감각과 재치 또한 뛰어난 사람이었지요.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웃느라고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였어요. 항상 나를 웃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보내고 나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특히 제이씨가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때였습니다. 전화를 하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그의 목소리가 미칠 듯이 그리웠습니다.

입맛없을 때는 그가 차려주던 맛깔진 식탁이 더욱 생각났습니다. 그 큰 덩치 어디에 그런 음식 솜씨가 숨어 있었는지 그는 내 입맛을 용케도 잘 알고 늘 맛있는 음식을 해서 나를 기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제이씨가 떠나고도 그의 어머니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 어머니는 정말로 나를 당신의 딸처럼 여겼습니다.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나의 건강을 염려하는 전화를 했습니다. 맛있는 거라도 만들면 밤 열두시에라도 나를 불러서 챙겨먹였습니다.

제이씨가 떠나가고 3년 후 쯤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부엌에서 미끄러져서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하직하게 된 것입니다. 떠나가기 사흘 전 어머니가 내게 전화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 그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아가.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구나. 날 덥다고 찬 것 너무 많이 먹지말고. 알았니? 별다른 일은 없고 그냥 우리 아가 목소리 한 번 들어보려고 엄마가 전화했다. 시간되면 전화 좀 해주려무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전화멧세지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수백번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그 인자한 음성은 아직도 내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우지를 않았거든요. 지금도 가끔 들어보곤 합니다.

어쨌든 나는 참 행복한 여자입니다. 제이씨로부터, 그리고 그의 어머니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한도 원도 없이 실컷 넘치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스산하고 외로웠던 나의 삶이 그들로 인해 풍성하고 넉넉하게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추억거리가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젊을 때의 추억만을 되새김질하면서도 얼마든지 노년의 삶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사람일까요.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는 백골이 진토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제이씨에게 아직도 미안한 게 있습니다. 그를 단 한 번도 우리집에 초대를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몇번 얘기했다시피 제이씨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딱 한가지 못한 게 있습니다. 그를 집에 초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때문이었습니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나는 아이들을 우선했던 엄마였기 때문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를 집안에 들이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제이씨의 존재를 일절 얘기하지 않은 것은 물론, 제이씨를 집에 초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이씨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 궁금해했습니다.

“정 아이들에게 나란 존재를 알리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집 구경은 할 수 있쟎아. 아이들 없을 때 단 십분이라도 좋으니 집 구경을 좀 시켜 줘.”

그러나 나는 못 들은 척 했습니다. 그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입니다. 제이씨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후회가 있다면 바로 그거였습니다. 그렇게 속절없이 떠날 줄 알았다면 소원을 들어줄 걸. 휠체어에 태워서라도 데려가서 집 구경을 시켜주는 건데…….

그렇게 나는 자식 교육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엄마로서의 위엄과 품위를 지키느라 애를 썼던 것입니다.

혼자 세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물론 아이들이 보지않는 구석에서지요. 언제나 강하고 씩씩한 모습만 보여주어야 했기에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나는 혼자 울면서 다 감당하고 극복해야했습니다.

그렇게 자식교육에 혼신을 다한 덕분일까. 세 아이들 다 훌륭하게,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했습니다. 경찰로, 사업가로, 간호원으로. 어딜 갔다 내놓아도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들로 성장한 것입니다.

나는 윤승준과의 약속을 생각했습니다. 윤승준과 이혼할 때 나는 단단히 약속했더랬습니다. 내 한몸 부서지더라도 아들 둘을 꿋꿋하고 훌륭하게 키우겠다고요. 그렇게 키워서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겠다고요.

윤승준은 아이들을 내주면서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더랬습니다. 그리고 몇번이나 다짐을 했었더랬습니다.

“정말이지? 너 혼자 아이들 대학까지 다 공부시킬 수 있다, 이거지? 남들이 모두 우러러볼 수 있는 사회인으로 만들 수 있다 이거지?”

그때 윤승준은 말했습니다. 중간에 아니다 싶으면 자기가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요. 나는 철저하고 단단하게 약속했습니다. 윤승준의 말대로 하겠다고.

내가 그렇게 미국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쓴 것도 어찌보면 윤승준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나 혼자 아들들을 대학 공부까지 가르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거든요.

어쨌든 나는 혼자의 힘으로 아이들을 훌륭하게 잘 키웠습니다. 이제는 윤승준과의 약속을 지킬 차례였습니다. 그러나 윤승준의 연락처를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국와서 처음 한두해는 서로 연락이 오갔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안부를 묻는 정도의 연락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끊어졌습니다.

나는 한국의 윤승준을 찾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한국의 한 텔레비젼 방송을 이용한 것입니다. 당시 KBS의 ‘가요무대’라는 프로그램에 소식이 끊어진 해외 동포들과 국내인들의 연락처를 서로 찾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프로그램에 내 사연을 적어보냈습니다.

1977년도에 헤어진 아이들 아빠를 찾습니다. 헤어질 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 아빠인 윤승준을 찾습니다,라는 내용의 사연과 함께 아이들의 어릴 때 사진, 윤승준과 나와의 결혼사진등을 보냈습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윤승준은 책과 신문만 볼 뿐 텔레비젼을 일절 보지 않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나 혹시라도 윤승준의 누나들이라도 보게되면 연락을 해주겠지,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습니다.

내가 보낸 사연은 2009년, 2월 15일에 텔레비젼으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한달이 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나는 무척 실망을 했지요. 그런데 누가 옆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 민수 아빠가 재혼을 해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지금 살고 있는 부인과 아이들때문에 아마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일 거야….”

그말을 들으니 안심이 좀 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재혼해서 잘 살고 있을 거라는 말에 마음이 놓이더군요. 그러나 어쨌든 약속은 지켜야 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아이들을 윤승준에게 보여주어야 했어요. 그리고 아이들도 아빠를 무척 보고 싶어했어요. 매일 엄마를 마구 때리던 광폭하고 무서운 남자라는 기억밖에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핏줄이 당기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나봅니다. 아주 쉽게 찾을 길이 생겼으니까요. 어떻게 해야 윤승준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당시 친하게 지내던 ‘진아’라는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아언니가 내 얘기를 다 듣더니 말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내 친척 오라버니가 검찰청의 유수한 간부야. 내 그 오라버니에게 부탁해 볼께”

세상에! 사흘만에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윤승준을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데 그때까지 재혼을 않고 혼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윤승준의 전화번호를 받아 적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한때는 증오하고 소름끼치게 싫었던 남자였지만 내 첫정이기도 했던 남자, 내 사랑스런 아들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남자 윤승준. 온갖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나는 지체않고 윤승준의 전화번호를 돌렸습니다.

“여보세요……”

쇳소리가 약간 섞인 윤승준의 목소리.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변함없는 그 목소리…..

“저, 은영이예요……”

처음엔 윤승준이 내 목소리를 잘못 알아듣는 것 같았습니다. 민수 엄마입니다, 하고 재차 말하자 그제서야 나란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 같았어요.

그는 연신 헛기침을 해댔습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내가 전화를 해올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한 것이겠지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화했습니다……”

나는 30년 전 이혼할 당시 우리가 했던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금방 감동과 감격으로 들떴습니다.

“정말이야?정말로 우리 아들 둘이 그렇게 잘 성장했단 말이야?”

내가 말했습니다.

“그때 내가 말씀드렸지요.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그날 이후부터 나는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비자를 쉽게 받기 위한 초청장을 만들고 비행기 표를 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한달이란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윤승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도착할 테니 아이들 데리고 마중을 나오라고.

그때가 2009년 5월이었습니다. 윤승준의 연락을 받고 며칠동안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윤승준이 어떻게 변했을까. 서로 알아보기는 할까. 처음 대면하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까. 여러가지 생각이 실타래처럼 얽혀서 내 머리를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윤승준도 이제는 많이 반성하고 변했을 터이니 그가 원한다면 같이 합쳐 살겠다고요. 어쨌든 아이들 아버지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엄마와 아버지가 같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합치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아들 이름으로 초청해서 미국에 불러들이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윤승준은 미국에 와 사는 것이 꿈인 사람이었습니다. 나랑 한국에 살 때 몇번이나 미국 이민을 시도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민 대행업체에게 돈만 뜯기는 일을 몇번이나 당하고 이민의 꿈을 접었던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미국에 올 방법만 있다면 열번이고 올 사람이 윤승준이란 사람인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윤승준이 도착하는 날.

나는 그를 맞으러 공항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날 공교롭게도 제이씨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나의 절친한 친구와 아들들이 공항에 나갔습니다.

제이씨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는 윤승준을 만나러 한국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윤승준이 이곳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예약을 해두었거든요.

식당이 저만치 보이자 내 가슴이 흥분으로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기대와 설레임이 마구 교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윤승준을 다시 만나는 데 대한 반가움과 기쁨도 없쟎아 약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척 궁금했습니다.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예전처럼 멋지고 잘 생긴 모습일까?

식당문을 밀고 들어가자 저만치 두 아들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나는 그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지요. 그리고 나는보았습니다.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가는 기척을 듣고 몸을 일으키는 한 ‘노인’을. 머리가 회색으로 쇠고 비쩍 마른 노인. 등이 구부정한 노인. 볼품없이 늙은 노인. 그는 윤승준이었습니다.

우리는 얼어붙은 듯 서서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둘다 말이 없었어요. 참으로 어색하고 어색하고 또 어색한 해후였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오랫만이예요……”

윤승준도 내 손을 잡으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래…..”

곧 진아 언니가 퇴근하고 와서우리 테이블에 합석했습니다. 왜냐면 한국에 사는 진아언니의 조카가 윤승준과 동행을 했기때문입니다. 윤승준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혼자 미국 여행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아 언니 조카의 비행기표며 체류경비를 일체 우리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윤승준과 같이 온 것입니다.

진아 언니 조카는 완전 모르는 남이지요, 내 두 아들들과 딸은 한국말을 전혀 못하지요. 윤승준과 얘기를 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제이씨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온 길이라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재회의 기쁨으로 즐거워야 할 식탁은 무겁고 조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진아 언니가 옴으로 썰렁하던 분위기는 조금 화기애애하게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웃으면서 먹고 마셨습니다. 나는 애써 윤승준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몇십년만에 처음 보는 아버지에게 별다른 감흥이나 호기심도 없는 눈치였습니다. 윤승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직장에서 미국쪽 무역업무를 맡아 일한 사람답게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윤승준이었지만 두 아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대충 얘기는 해주긴 했었지만 그래도 자기 피를 받은 아들들의 직업이 궁금하지도 않을까요.

식사가 끝난 후 진아 언니의 조카는 진아 언니와 함께 돌아가고 아들들은 각자 자기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까지 결혼을 않고 나와 함께 살던 첫째 딸과 윤승준은 우리집으로 왔습니다.

“ 뭐 마실 거야?”

거실에 앉아 두리번거리고 있는 윤승준에게 나는 반말로 말했습니다. 반말이라뇨? 예전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못하고 속수무책 당하면서 순종하던 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당당했으니까요. 자신만만했으니까요.

“그냥 쥬스나 있으면 한 잔…..”

나는 쥬스 한 잔을 따라 윤승준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작은 아들이 쓰던 방으로 윤승준을 안내했습니다. 윤승준은 피곤했는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습니다. 나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그의 얼굴을 마주 하지 않은채 어색하게 서서 화장실이 어딘지 이것저것 필요한 사항을 알려주었습니다.윤승준 역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잘 자요......"

돌아서 나오려는데 윤승준이 나를 불렀습니다. 도어 손잡이를 잡은 채 나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어 내 등 뒤로 들려오는 윤승준의 목소리.

“너 나 무섭지 않니?”

참 어이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섭기는 내가 왜 무서워요?지 까짓게 뭐라고. 아직도 나를 예전의 은영이로 생각하고 있는 윤승준이 참 가소롭고 가증스러웠습니다. 나는 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거만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웃기고 있네…..”

내가 비웃듯이 말하자 윤승준이 흠칫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다시 말했습니다.

“야, 윤승준! 네 까짓게 뭔데 무섭니?”

“뭐…뭐라고?…..”

“나 예전의 은영이가 아니야. 네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던 은영이가 더 이상 아니라구!”

내친 김이었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꼿꼿하게 선 채로 예전에 윤승준이 내게 가했던 그 무시무시한 폭력에 대해 줄줄 얘기를 했습니다.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이 흘러내려서, 목이 메어서 몇번이나 중간에 얘기를 끊어야 했습니다. 참 살다보니 그런 일도 오더군요. 가슴속에 켜켜히 쌓인 아픈 기억을 낱낱히 꺼집어내어 당사자에게 마구 퍼부어 주는 그런 날도 오더군요.

한참동안 묵묵하게 내 얘기를 듣던 윤승준이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내가 그랬니? 나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

그때 나는 느꼈습니다. 윤승준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정이 완전히 떠나가는 것을. 한때나마 부부의 정을 맺었던 남자에게 남아있던 손톱만큼의 연민이 얼음 녹듯 싸늘하게 녹아버리는 것을 .

나는 그와 합치겠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아들들을 통해 미국에 초청해서 살게 해주겠다는 생각도 버렸습니다.

지가 인간이라면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원한 것은 단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 한 마디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려고 했습니다. 윤승준이 만약 미국에 와서 살 생각이 없다면 아들들을 종용해서라도 매달 생활비라도 부쳐주려고 했었습니다. 왜냐면 그의 행색이 무척 초라하고 궁해보였거든요.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윤승준에게 열려 있던 내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것이지요.

윤승준은 한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가 돌아갈 때 나는 온갖 물건들을 다 사주었습니다. 시계, 카메라, 비타민, 의류, 커피, 비프 저키……큰 대형 가방 두개의 지퍼가 안 잠길 정도였으니까요.

이번이 생전에 윤승준을 보는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두 아이들도 이번이 아버지를 보는 마지막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핏줄이 당겨 간절하게 한 번 만나 보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를 대하면서 예전, 나를 향한 폭력의 기억이 떠올라서 싫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공항에서 나는 다이아몬드 여섯개가 박힌 남자용 십자가 목걸이를 윤승준에게 주었습니다. 윤승준이 말 없이 목걸이를 받았습니다. 그도 이번 만남이 마지막인 것을 인지했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어요.

나는 말했습니다.

“어쨌든 잘 가세요…..그리고 부디 건강하세요…….”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우리의 인연은 이제 이것으로 완전히 끝이다, 앞으로 두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자 그렇게 눈물이 나더군요. 그냥 윤승준이란 인간이 가엾고 불쌍했습니다. 윤승준의 눈에서도 눈물이 고였어요.

“그래, 은..은영이 너도…아니..민.민..민수 엄마도 건강하게 잘…잘 있어…..”

그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윤승준이 말했습니다.

“수고했어. 아이들 훌륭하게 키우느라 진짜 수고 많이 했어......"

"예에......."

"은...은영아...너를 많이 사랑했어....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

".............."

"너를 너무 많이 사랑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어........"

윤승준으로 부터 그런 말을 듣는데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구,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일에는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과를 듣고 마음을 돌리기에는 때가 늦어버렸습니다. 나의 마음이 꽁꽁 닫혀버렸습니다. 한겨울에 땅 굳듯이 굳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