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 삼십년 넘도록 매해 남편으로부터 생일선물을 받는 한국의 친구가 있습니다. 참 대단한 남편을 둔 친구입니다. 올해 생일에는 천만원 가까운 샤넬백을 받았답니다. 어떻게 생긴 건지 구경하고 싶다고 했더니 사진을 보냈네요. 밤색같기도 하고 짙은 보라 같기도 한 오묘한 색깔의 크로스백이었습니다. 고등학생같이 여리여리한 몸매의 친구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참 이상도 하지, 친구의 샤넬백이 예쁘고 근사하기는 했으나 갖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듭니다. 샤넬백뿐만 아니라 그 어떤 값진 물건을 봐도 관심이 안 생깁니다. 돌덩이를 보듯 무덤덤해요. 시어머니가 남기고 간 물건들 중에는 다이아몬드목걸이 사파이어반지 등 비싼 보석들이 좀 있었어요. 모두 외며느리인 내 차지였습니다.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내 취향과 맞지 않기도 했습니다만 전혀 욕심이 안 납니다. 보석함째 남편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헐값에라도 다 팔아버리라고.

열등감이 많은지 자존감이 낮은지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오해해서는 걸핏하면 삐치는 지인이 있습니다. 최근, 이 지인이 또 삐쳤습니다. 나는 삐친 줄도 몰랐는데 옆에서 누가 귀띔해 주어서 알았어요. 전후사정을 살펴보니 피식, 웃음이 날 만큼 사소한 일이었는데 그녀는 이번에도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는 노여워하고 있네요.

예전같으면 몇날 며칠 잠을 설쳤을 겁니다. 부주의하게 내가 왜 그랬을까, 상대는 또 왜 그렇게 반응할까 분석하고 고민하느라. 그리고는 어떻게해서든지 해결을 봐야 속이 시원했습니다. 내 쪽에서 먼저 사과를 하든 변명을 하든 해명을 해서요. 내 잘못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누가 마음을 다쳤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삐쳐있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습니다. 스스로 풀어지면 다행이고 아니어도 할 수 없고. 애쓰고 노력해야만 지탱되는 관계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겁니다. 둘이 괴롭느니 혼자 외로운 게 낫다 싶은 겁니다.


가끔 만나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할배가 있습니다. 세탁소 두 개를 운영하는 할배입니다. 요즘 모든 업종이 다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지만 세탁소는 특히 더합니다. 일단 나부터도 세탁소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외출할 기회가 없으니까 옷을 드라이클리닝할 일이 없고 수선을 맡길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할배의 세탁소 운영이 얼마나 어렵겠어요. 인건비랑 가게세 등을 합쳐 고정 지출만 한 달에 삼만불이라는데 팔아버리려 해도 인수자가 없고 손을 털려 해도 리스기간이 앞으로도 십 년 가까이 남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그 할배를 만났습니다. 얼굴이 편안합니다. 여유가 넘치고 밝아요. 복권이라도 당첨된 사람같은 얼굴이네요,했더니 할배가 하하 웃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예전같으면 살이 십 파운드는 더 빠졌을 거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 나갈까, 걱정하고 고심하느라고 말이지. 그런데 어느날 아침, 모든 것이 다 부질없고 헛되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오늘밤이라도 갑자기 이슬처럼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데 무엇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가 싶은 생각. 사실 따지고보면 모든 면에서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도 더 가져보려고, 더 올라가 보려고, 더 빛나보려고, 더 빨라보려고 밤낮으로 아등바등했었지. 이제는 다 내려놓고 맘 편하게 살기로 했다. 물결에 흔들리는 배처럼 올라가면 올라가는대로. 내려가면 내려가는대로. 엎어지고 뒤집어지면 엎어지고 뒤집어지는대로...”

할배가 일흔 가까이 되어서야 깨달은 걸 나도 최근 깨닫고 있었네요. 지난 달로 쉰 여덟이 된 내가요, 벌써. 기특하게도 말이죠. 우리가 쟁취하고 누리려고 목숨을 걸던 세상만사가 늙음앞에서는, 죽음 앞에서는 안개같이 허무하다는 것.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 우리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쓸데없는 인간관계에 허비하고 쓰레기로 전락하는 물건들에 집착하다가 마친다는 것. 걱정 분노 기쁨 슬픔 미움 등 우리 인간사를 지배하는 감정들이 지나놓고 보면 먼지같이 사사로운 것인데 여기 얽매어 삶의 본질을 잃고 있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까 미치게 싫은 것도 없고 펄쩍 뛰도록 좋은 것도 없고 주먹 쥐게 노여운 것도 없고 간절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가슴 뛰게 갖고 싶은 물건도 없어졌습니다. 희노애락에 둔감해진다고(초연해진다고 하면 건방진 말이 될 테니)할까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물욕이 없어지니 마음이 편해지고 마음이 편하니까 어릴 때부터 평생을 시달리던 불면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요즘은 얼마나 잠을 잘 자는지 모릅니다.

웬만한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나이가 마흔이라고 하던데 나의 마흔은 아니었습니다. 질풍노도였더랬습니다. 미친년이 뛰는 널 위보다도 더 어수선하고 더 혼란스럽고 더 어지럽고 더 요란스러웠으니까요. 쉰이 되어서도 물론 마찬가지였고. 이제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네요. 편안하게 되네요. 나이 쉰 여덟이 되어서 이제 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