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살림에 무리해서 구입한 내 차는 제법 고급이라 기능이 무궁무진하다. 버튼 하나로 모든 기기들을 다 조작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다. 예전, 공상영화에서나 보던 온갖 신기하고 편리한 기능들이 다 장착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욋돈 들인 그 기능들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다.  별로 필요할 일이 없었기에  한 번 건드려 볼 생각조차도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차를 운전하면서 내가 한 일은 라디오를  켜고 끄고 비 오면 브러시를 작동시키고 에어컨과 히터를 켜고 끄고가 전부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딴 건 몰라도 이것만은 사용법을 배워야 되겠다 싶은 게 있었다. 바로 음성으로 명령해서 전화를 거는 기능이다. 운전하면서 불현듯이 전화할 곳이 생각나는 일이 있어도 쓸 줄을 모르니 무용지물이었던 기능. 
그러나  그냥 마음 뿐  아직도 시도조차 안 하고 있다. 남편이 ‘텔레비젼 켜는 것보다 더 쉽게’ 익힐 수 있을 거라고 시범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만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  다음에, 다음에로 미루고만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아침에 출근하니 IT부서 직원들이 돌아다니면서 각 책상마다 모니터를 한 개씩 더 놓는다. 새로운 프로그램이 생겼단다. 앞으로 모니터를 두 개 놓고 일해야 한다나.
불에 덴 듯 놀라서 언제부터냐고 물으니  잘 모르지만 ‘곧’ 이란다. 그 곧이 언제일까, 동료들도 모르고 슈퍼바이저도 모른다. 그 날부터 나는 불안에 떨었다. 잠을 설쳤다. 트레이닝을 받고 시험을 치고 새 프로그램을 익혀야하는 일이 너무도 큰 중압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닌데 새로 익혀야하는 그 과정이 정말로 스트레스다.

젊었을 때는 뭐든지 새로운 게 좋았다. 새 옷, 새 구두, 새 가방, 새 차. 그 누구의 손을 타지않은 반짝반짝 빛나는 새 것은 나를 흥분되게 했고 살맛나게 해주었다. 그래서 옷과 구두가 옷장에 넘쳐나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또 새 것을 사들였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같지가 않다. 그 어떤  좋은 것, 특별한  새 것이 눈에 띄어도 그저 덤덤하다. 갖고 싶지도 않고  물건에 대한 관심조차도, 흥미조차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지난 번에 한국갔을 때도 일절 쇼핑을 하지 않았다. 워낙 짧은 일정이라 시간이 없기도했지만  뭐 사고 싶은 게 없어서다. 예전에는 ‘미국에 없는 것’, ‘미국보다 싼 것’을 찾아 발품을 팔았고 닥치는 대로  사서 바리바리 싣고 왔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사오지 않는다.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을 뿐더러 한국이 싸면  얼마나 싸겠나, 없으면 없는대로 살지 뭐 하는 생각이다. ‘지금 있는 것들도 다 못쓰고 죽을 테니 더 이상 살림살이를 늘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저절로 충실히 지키게 된 것이다.

노래도 그렇다. 죽으나사나 한국에서 듣고 부르던  노래들만 가슴에 와 닿는다. 젊었을 때 알던 노래를 들으면 푸르고 빛나던 그 시절의 감성이 되살아 나는데,  3, 40년 전, 복잡한 시장 한 구석의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한 소절은 지금도 기억속에 남아 가끔 흥얼거릴 수 있는데,  현재 한국에서 최고 인기라는 가요도 별 감흥이 없다. 몇 번을 들어도 금방 잊어버린다. 무엇보다 익힐 노력조차 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아무리 좋은 노래가 유행해도 '단장의 미아리 고개' 나 '눈물젖은 두만강' 등 청승맞은 옛날 노래들만 좋아하던 아버지처럼 나도 그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시들해지는 것은 비단 노래나 물건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며칠전 출근하니 한국인 남자직원인  J로부터 이메일이 와 있었다. 자기 부서에 한국 여자가 한 명 더 채용됐는데 나이도 나랑 비슷해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단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나한테 데리고 와서 소개를 해 주겠다고한다  나는 즉시 답장했다. 그 한국여자 별로 만나고 싶지 않으니  소개할 생각 안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저란 사람이 이 회사에 있다는 것도 그 여자분께 얘기해 주지 마시고요.  저는 그 여자분이랑 복도에서 마주친다 해도 인사 안 할 겁니다. 한국사람인 티를  안 낼 거예요.

‘와아, 세상에는 이런 매몰차고 별난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는지 그 뒤로  J로부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은  일 년전, J가 처음 입사했을 때도  같은 행동을 했었다, 나는. 그가 한국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일체  말을 걸지 않았던 것이다. 복도나  휴게실에서 만나도 그냥 목례만 했었다. 그랬는데 어느날  그가 먼저  자기 소개를  해왔다. 예전에 내가 중앙일보 기자할 당시 서로 만난 적 있었다고(나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 같은 한국사람끼리 친하게 지내보자고. 
그렇게까지 하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나. 오는 사람 막을 수없다는 말이 맞았다. 할 수없이  인사를 하고 왕래를 하게 되었지만 그 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내가 먼저 나서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회사가 사람들을 더 채용하면서 또 자리를 옮기게 됐을 때도 나는 새로 만나게 된 옆, 앞자리의 동료들에게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 출근하면 인사만 딱 하고 하루종일 말 한 마디 섞지 않는다.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던 두 여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난 후부터 그렇게 된 것같다. 그 누구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기로 소문난 나였다. 그 어떤 사람하고도 잘 어울릴 수 있어 사교성 좋기로 소문난 나였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 무섭다. 천사같이 인자하고 착해보이는 얼굴 뒤에  어떤 흉기를 감추고 있는지 파악하고 싶은 의욕도 없어져버렸고. 사람을 처음 만나 익숙해지고 친해지기까지의 긴장과 어색한 기분을 더 이상 경험하고 싶지않다.

지금 살던 배우자와 혹시 헤어질 경우라 생기더라도 새로운 사람 만나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취미는 뭔가요?’ 상대방을 파악하고 익숙해지는 과정이 불편하고 힘에 부쳐서 혼자 살 거라는 할배, 할매들의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단한 담장을 치고 있다가 정말로 좋은 사람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관계의 범위를 더 이상 넓히지 말고 그냥 아는 사람끼리 정든 사람끼리나 잘 지내야지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