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갑자기 슈퍼바이저가  돌아다니면서 돈을 거둔다. 금액은 단돈 1불. 꼴랑 1불씩을 걷어다 뭣에 쓰려고? 의아해서 돈의 용도를 물었더니 이유를 설명하는데 참 어이가 없다.  팀원 중 한 명인 어린 멕시코인 남자, ‘호제’의 머리를 깎게하기 위해서란다. 항상 사자갈기처럼 길고 덥수룩한 머리를하고 다니는 호제. 아주 보기가 흉하지만  아무도 싫어하는 내색을 못한다. 가끔 내가 ‘예수같다' 고 놀리긴 했어도.

“다음 주 중에  외부에서 아주아주 중요한 손님이 방문하기에  우리직원들 용모및 복장을 단속해달라는 지침을 상부로부터 받았어. 뭐 다들 그럭저럭 괜찮은데 호제이 머리가 문제네. 그래서 주말에 이발을 좀 하고 월요일에 출근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고개를 젓는 거야.  머리 깎을 돈이 없어 못 한다고.. “

그래서 그에게 줄 이발비를 모으고 있다는 수퍼바이저. 팀이 열  여섯명이니까  한 사람당 1 불씩 내면 16불이 될 테니  그 돈 가지면 어디 싼 데가서 머리를 자를 수 있지 않겠냔다. 그러면서  내게 1불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호제이놈 머리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냐고. 1불이 아니라 10센트도 주기 싫으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슈퍼바이저의 눈이 둥그래졌다.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이계숙은 회사 안에서 누구에게나 ‘잘 퍼 준다’고 소문 난 사람이었으니까.

걸치고 있던 옷, 신발, 악세서리를 누가 마음에 들어하면 두 말 안 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 주는 사람으로, 혼자 힘들게 사는 젊은 아이들에게 음식  잘 갖다주는 (사실 호제이한테도 여러번 음식을 갖다 주었었다)사람으로, 지병으로 휴직하고 있는 형편 어려운 동료에게  꽤 큰 액수의 봉투를 전해 준 사람으로 말이다.

매몰찬 내 태도에  질려버렸는지  슈퍼바이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흔들면서 사라졌다. 

1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1불이 아니라 이발비 전액을 부담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많이 보았다. 점심시간마다 푸드 트럭에서 음식을 사기 위해  줄 서 있는  호제이를. 한 잔에 5, 6 불은 족히 될 커피전문점의 커피컵을 아침마다  들고 출근하는 호제이를.

돈을 아끼기 위해 하루도 안 빼고 매일 도시락을 싸가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식 사 먹을 돈은 있고, 비싼 커피 사 마실 돈은 있고 머리 깎을 돈은 없다는 그가. 조금만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을 마련해 싸 오면, 회사에 비치된 커피를 마시면 많은 돈이 절약될 터였다. 매 주 이발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몇년 전, 몇십년만에 처음으로 동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예전에는 안 하던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 

동창들은  나를 무척 환영해 주었다. 처음으로 참석했다고, 미국에서 왔다고 박수까지 치면서.

그런데 눈치를 보니 동창회 임원들이 나로부터 ‘찬조금’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았다. 동네친구들 몇몇도 옆에서 부추겼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동창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찬조금을 내거든. 지난 해 한 동창은 5백만원을 찬조해서 그 돈으로 모두  1 박 2 일 여행을 다녀왔지. 미국에서 너 꽤 잘 산다니(잘 살기는 개뿔이나. 그러나 지지리 궁상으로 산다는 것 보단 나을 것 같아 아무 소리 안 했다) 얼마라도 내 주면 우리동네 출신들 체면이 설 거야”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그럼 좀 내지 뭐. 나는 백만원 정도를 내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당 한 부씩 배부된 작년도 회계보고서를 훑어보다가 마음이 바뀌었다. 찬조금과 회비를 포함해 작년 수입이 천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돈이 쓰인 곳은 딱 네 군데였다. 식비 및 여행비, 동창들 경조사에 보낸 부조금과 화환비.천만원 가까운 예산 중에 사회에 기부한 흔적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하다못해 모교에 장학금 한 번 낸 적도 없는 것이다. 온통 먹고 노는데 쓴 돈 뿐이다. 

내가 돈을  줘 봤자 쓰일 데가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저희들끼리 모여 먹고 노는 데 왜 내 귀한 돈을 푼단 말인가. 천원도 아깝지. 나는 꺼내려던 돈을 핸드백 깊숙이 집어넣었다. 짠돌이라 욕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대신 친한 친구들 몇명에게 밥이라도 사먹으라며 30만원을 주고 왔다. 그리고 빌딩에서 떨어진 사고로 운신을 못해 생활에 곤란을 받는 친구가 있다길래  50만원을  한 친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고왔다. 

예전에는 어디서든 기부 요청을 하면 다 응했었다. 또한 누구든지 밥하고 술을 사라면 군말없이 샀었다. 용도를 묻지 않았고 따지지 않았다. ‘준다’ 는 기쁨을 일찍이 깨달았기에 그랬었다. 

그러나 힘들게 벌어서 기쁜마음으로 내어 준 내 돈이 생각보다 값지게 쓰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각 한인단체들에게 기부한 내돈이  함부로,허투루 유용되는 게 부지기수인 것이다.  감사 한 번 안 받고 재정보고 한 번 안 하고 자기들 멋대로 허비해버리는 단체가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은 다 끊어내버렸지만  버릇처럼 늘 얻어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온갖 사치 다 하고 철마다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한국가고 여행가고 자기 할 것은 다 하면서도 커피 한 잔에 발발 떠는 사람. 식당에를 가도 커피집에를 가도 얻어 먹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사람들.  

나는 내가 응당 다 사야하는 줄 알았다. ‘여왕벌’이라면 밥값, 커피값 쯤은 가볍게 여기는 배포가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다. 내가 그동안 바보짓을 했다는 것을. 인간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던 나에 비해 그들은 돈이 더 우선 순위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나 자신한테는 무척 인색한 사람이다. 옷이고 구두고 백이고 50불 넘는 것을 사 본적 없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상점은 ‘ROSS’, 그리고  헌 옷 가게.

이 ‘미씨 유에스 에이’를 통해 만나 친하게 된 독자 하나가 우리집에 와서  내 물건들을 보더니  말했다. 내 구두를 모두 합쳐도, 내 핸드백을 모두 합쳐도 유명 브랜드 하나 값도 안 될 거라고. 

그렇게 비싼 물건 하나 안 사고 나한테 아끼면서 기부했던 돈들이 제대로 보람있게 쓰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허탈했던지. 기쁜 마음으로 샀었던 밥과 술을 얻어먹은 인간들이 정작은 나를 호구취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괘씸했던지.

이제부터는 단 돈 1 불이라도 반드시 의미있고 뜻 있는 곳에만 쓸 것이다. 옛 선조들이 말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을 받들어서 말이지. ‘개처럼 버는’ 것은 아니지만 쓰는 것은 정승처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