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게 지내는 할배로부터 안부를 묻는 문자를 받았다. 봄을 타는지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고 알레르기성인지 감기기운도 있고 시부모는 병원에 입원퇴원을 반복하는 등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요즘 좀 소원했더니 안 죽고 살아있는지 궁금했나보다. 별로 길지도 않은 할배의 서너 줄 문자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연계들하고만 놀지말고 우리 할배들도 잊지말고 챙겨라...’

첨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해야했다. ‘연계’가 뭔가 싶어서. 그러다가 할배가 말하고저하는 뜻을 알아내고 한참을 웃었다. 할배가 말한 것은 ‘영계’였다, 연계가 아니고. 잘못친 게 아니었다. 실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연계라는 단어가 두 군데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면 잘못 칠 수 있지. 할배는 명백하게 영계란 맞춤법을 모른 거였다.

예전같았으면 눈쌀이 저절로 찌푸려졌을 거다. 명색에 대학을 나왔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 정도의 글자를 모를 수 있을까,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숨에 전화해서 ‘무식이 뚝뚝 흘러요, 흘러’ 하고 시비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리 견딜수 없었던지. 맞춤법 틀리는 남자들을. 여자들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맞춤법 모르는 남자들은 정말로 싫었다. 아주 한심하게 여겼었다. 그건 ‘가방끈이 짧고 길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신문만 좀 주의 기울여 읽어도 얼마든지 터득할 수 있는 글자들을 틀릴 정도면 매사에 다 그렇게 무성의하고 무신경하고 태만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지금, 나는 그냥 웃고 만다. 넘어가고 만다. 이 바쁜 세상에 내 생각을 해주었다는게 어딘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준 것만도 어딘가.

나는 할배한테 답장을 보낸다. ‘영계들이 미쳤다고 나같은 중늙은이하고 놀아 준대요? 봄 타느라 힘들어서 그랬소. 조만간 술 한번 살 테니 꼼짝말고 기다리소...’.

맞춤법과 함께 내가 예민했던 것이 또 있었다. 집안꼴 엉망인 사람들이었다. 처음 만나 좋은 느낌을 가졌다가도 집에 가보고 실망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기수였었던지. 바깥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던 사람들이 집안 꼴은 정 반대인 걸 보고 놀랐던 적이 얼마나 부지기수였었던지. 세상에는 청소와 정리정돈을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라면 잠결에 해도 단숨에 해 치울 일들이었다. 오죽하면 나중에 은퇴하고 한국사람들을 대상으로 정리정돈 컨설팅 비즈니스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다 했겠나.

세월이 흘러서일 거다. 나이가 들어서일 거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내가 변해서일 거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별로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다.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진다. 내가 목숨을 걸었던 것들이 사실은 살아가는 데는 별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도둑질이나 사기 등 법에 저촉될 일만 아니라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사람은 누구나 각각 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에 옳고 그르다고 따질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씻은 듯이 해놓고 사는 나의 집과 고물상같이 해 놓고 사는 이웃집은 사는 방식이 다를 뿐 누가 더 낫다고 흑과 백으로 정의를 내릴 수없는 일인 것이다.

대신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무심하게 넘겼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마운 생각이 든다. 우리집에서 2, 3분 거리에 큰 한국마켓이 있다. 정말로 없는 게 없는. 이 한국마켓이 있는 게 참 고맙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식품들을 싼 가격에 마음 놓고 살 수 있어서. 이 마켓이 없었으면 내 식생활이 얼마나 빈약했을까. 더구나 이민생활이 오래되면서 귀소본능의 욕구가 되살아나는지 한국음식 없이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인데. 그리고 내 단골식당 ‘민츠’. 이 식당을 내 집처럼 드나들 수 있다는 게 또 무척 고맙다. 청결하고 정갈하고 분위기 좋고 음식 맛있어야 하고 등등 까다로운 내 요구를 백 프로 충족시켜주는 식당이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운 차림으로 마음놓고 뒹굴거릴 수 있는 자유가 고맙고 가끔 커피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마음맞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게 고맙고 이른 아침 강아지를 데리고 밝은 햇살과 맑은 공기를 맞으며 걸을 수 있는 여유도 고맙고 배 고플 때 먹는 라면 한 그릇도 고맙고 만날 때마다 지지고 볶으며 싸워도 며칠 지나면 뭐하냐, 하고 전화해 주는 할배들이 있는 것도 고맙다.

예전에는 그냥 내 일상의 한 부분이었던 평범한 것들이 그저 고맙다. 고마운 것이 많아 고맙다. 고마워서 가슴이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