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에 남편이 응급실에 갔다.  걸핏하면 도지는 ‘신장결석’ 때문이었다.

잠자리에 들 무렵인 자정쯤부터 아픈 증상이 왔다고 했는데 맥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제자리 뛰기를 하는 등 자기만의 방법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애쓰더니(그렇게해서 돌이 저절로  빠져나가는 수도 몇 번 있었으니까) 새벽이 되니 도저히 더 이상은 아픔을 참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데리고 갔냐고? 아니, 남편이 직접 운전해 갔지.

나는 집에 그냥 남아 있었다. 눈 나빠서 자주 안 다니는 밤길은 운전 못 하니까. 그리고 같이 가봤자 내가 도움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추운 대기실에서 마냥 기다리는 일밖에는. 왜 둘씩이나 고생을 해.

남편을  보내고  잠이 안 와 컴퓨터앞에 앉아 있는데  W씨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왔다(간호사인 그녀는 밤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무렵에 종종 이메일을 보낸다).남편이 신장결석으로 혼자 응급실에 갔다하니 정말로 믿을 수가 없단다. 남편을 그리보내놓고 어째 태평하게 앉아 이메일이나 확인하고 있냐고.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신장결석으로 인한 통증인 것 몰라요? 출산에 버금가는 아픔이라고까지 하지요. 그렇게 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혼자 보낼 생각을 했어요? 혼자 운전해 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떨 셈이어요?"

W씨가 덧부쳤다.

 “주위사람들 잘 챙기고 한인사회에 기부도 잘 하길래  아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참 차가운 성격이네요. 남편이 이번 일로 정 안떨어지면 다행이겠다...”

글쎄. 뭐 이런 일로 정까지 떨어지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했나, 싶은 생각이 없지않았다. W씨 말을 듣고보니 약간 그렇기도 해서. 출산에 버금가는 고통에 빠진 사람을 혼자 응급실에 보낸 것이.

그래서 다음날 주위사람들한테 그리고, 한국의 친구한테 카톡으로 같은 이야기를 했더니 입을 모아 나를 비난했다. 운전은 안(못)하더라도  같이 갔어야 했다고.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남편 옆에 있어 주었어야 했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

“만약 내 마누라가 그랬다면  당장 이혼이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위에도 말했지만 내가 따라가본들 도움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병원대기실이 좀 추운가. 그리고 내가 좀 추위에 취약한가. 대기실에서 덜덜 떨다가 감기나 걸려오지.

몇년 전, 한국에서 다니러 왔던 동생들을 공항 문앞에 그냥 부려놓고 돌아왔을 때도 주위로부터 직싸게 욕을 먹었었다. 어찌 그리 냉정하냐고. 출국하는 것까지 보고왔어야 했다고. 그게 아니라면 수속하는 데까지만이라도 같이 있어주었어야 했단다.

아니, 걔네들이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저희들끼리 얼마든지 수속밟고 비행기 탈 수 있다. 작별 인사는 집에서 떠나면서 미리 다 했다.  굳이 주차비 들여가며 공항 안까지 같이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2시간이나 들여 공항 문앞에까지 데려다주었으면 내 할 일 다 한거지.

우리 한국사람들은 정(情)을 우선시 한다. 나는 그 정이라는 게 귀찮다. 성가시다. 그래서 나는 정보다는 합리적(적어도 내 생각에는)이다. 남들이 욕을 하거나 말거나 내가 싫은 일, 귀찮은 일은 안 한다. 부탁한 상대방이 당혹해 하거나 말거나 거절도 잘 한다. 그 자리서 ‘싫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확실하게 내 의사표시를 한다. 군더더기도 추가하지않고.

어떤  할배가 탐탁치 않은 부탁을 하길래 면전에다 싫습니다라고 거절한 일이 있었다. 가차없는 내 대답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 자리에서는 아무 대응을 못하더니 다음날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계숙씨는 거절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해주고 싶지만 내 사정이 그렇지 못해 미안하다고' 부드럽고 좋게 거절하는 방법도 있고 '일단은 며칠 생각을 좀 해보고 대답하겠다'고 나중에 거절하는 방법도 있건만 어떻게 그 자리서 냉정하고 매몰차게 사람 무안을 줍니까..."

나중에 거절하나 지금 거절하나, 부드럽게 거절하나 확실하게 거절하나 어쨌든 거절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생각 좀 해보고요’ 나 ‘며칠 있다가 대답해드릴께요’하는 말로 상대방에게  막연한 기대를 갖게 하느니 아예 처음부터 아니다는 걸 알려줘서 다른 방법을 강구하게끔 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주위에서 보면 정에 이끌려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들의 공통점이 늘 이런저런 일에 치여 쩔쩔 맨다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도 정에 이끌려 맡아놓고는 뒤에서 군소리해대면서 처리하느라 고생들을 한다. 그들에게  나는 말한다. 거절을 못하면 내 신상이 괴로우니 나처럼 확실하게 거절하는 법을 배우라고.

젊었을 때는 남의 눈치보느라, 나도 한국사람인지라  정때문에  어쩔수 없이 끌려다녔는데 나이가 드니 남이야 날 어찌보든 말든 내 편한게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고 매몰차다고 욕하려면 하라지 뭐. 남의 생각까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