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편에게 많이 맞추는 편이다.

고집 세고 내 주장 강해서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매사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 뜻대로’인 것이다.

남편 또한 웬만한 일, 이를테면 가구를 산다는가 집안을 리모델링한다든가하는  일은 전적으로 내 취향에 맡긴다. 그래서 여지껏 크게  의견충돌이 있어 본 적이 없다. 단 한 가지, 우리 둘 다 양보 못하는 게 있으니 바로 내 머리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나는 처녀때부터 ‘파마’를 고수해왔다. 머리라도 부풀려놔야 좀 봐 줄만한 얼굴이니까. 그렇지않으면  너무 초라하고 빈약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얼굴이니까. 또한  나는 머리손질에는 젬병이라서 무조건 핀으로 고정해 뒤로 올리거나 묶는데 앞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해야 좀 스타일이 난다. 머리숱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생머리를 묶거나 올리면 자꾸 흘러내리기에 반드시 파마를 해야하는 이유도 있다.

반면 남편은 내가 파마하는 걸 질색한다. 비단같이 부드럽고 윤기나는 머리결을 왜 독한 화학약품으로 망치냔다. 그리고 생머리가 나랑 가장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청순해 보인다며 파마하는 걸 말린다. 이 나이에 청순은 얼어죽을.

남편이 싫어한다고  예, 알았소 할 내가 아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남편에게 미안하긴 해도 위에 쓴 이유로 나는 죽어도 파마를 해야하니까. 그래서 파마를 할 때마다 ‘007 작전’을 써야 한다. 나중에 들킬 때 들키더라도  일단 처음부터 안 들키게 노력은 한다.

1.파마를 한다. 그것도 잘 안 풀리게 아주 꼬불꼬불. 2.드라이기로 다 말려달라고 한 다음 젤을 발라 머리카락이 한오라기도 내려오지 않게 뒤로 짱짱하게 묶고 집에 간다. 3. 파마기가 좀 느슨해질 때까지는 집에서도 절대로 머리를 풀러놓고 있으면 안 된다. 샤워를 한 후에도 축축한 머리를 얼른 묶는다.

그래서 그동안 잘 속였냐고? 몇 번은. 별짓을 다했지만 기어이  들통나고말았다. 남편의 눈이 워낙 매같이 날카로와야지. 그리고 별 짓 다해도 파마약 냄새만은 덮을 수는 없었으니까.  남편은 낙심했다.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나는 짐짓 딴청을 부리고.

그게 파마를 하고난 후 늘 일어나는 우리집 풍경이었다.

2주 전에도 파마를 했다. 위의 방법대로 며칠은 잘 속이다가 이짓도 못해먹겠다 싶어 될대로 되라하고 파마한 걸 숨기지 않았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근데 어라, 이게 웬일. 남편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이다. 고불꼬불 라면같은 머리를 눈앞으로 보면서도 아무소리를 안 한다. 한 마디 들을 각오로 있는데 지금까지도 모르는 것 같다. 알면서도 말은 안 하는 건지 아니면 포기를 해버린 건지.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마음대로 더 자주 파마를 해도 되나 싶어서. 그러나 좀 섭섭한 것도 사실이었다. 머리를 지지고 볶든 자르든 말든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들이 많다고 하더니 이거, 내 남편도 그 반열에 들어서는 것 아닌가. 나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는 반증아닌가, 싶은 생각에. 

그러나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바위가 아닌 이상 서서히 변해가는 거지. 흐르는 세월따라 서로 무심해지는 거지….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집안에 놓여 있는 가구'같은 존재라는 글을 예전에 쓴 적있다. 있을 때는 있나보다 무심하게 지나치다가도 없어져서 빈 자리가 드러나면 허전하고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가구 같다고.

지금 생각해도 캬~, 내 주제에 어쩌면 그런 기발한 표현을 했을까 싶은데 날이 갈수록  맞는 말 같다. 적당히 무관심도 해야지 연애할 때처럼 상대방에게 집착하면 어찌 살겠나. 일일이 간섭하고 구속하려들면 어찌 살겠나.

최근, 한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 둘 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한테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정말이지 불꽃처럼 사랑한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그래, 지금 실컷 사랑해라. 머지않아 서로에게 가구같은 존재가 되는 시기가 다가오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