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열어보니 더 가관이었다. 도대체 냉장고 안의 음식들과 식료품들을 다 먹기는 하는 것일까. 언제 담아 넣었는지 시커머죽죽한 물체들이 들은 예닐곱개나 되는  김치병들,  그 중에는 곰팡이가 펴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붉고 검은 액체들을 담고 있는 수십개의 유리병들, 무슨 물건들이 들어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정체모를  수많은 비닐봉지들...

반 갤런짜리 우유 한 통을 사가도 넣을 자리가 없어 짜증이 난다던 그 집 남편말이 이해가 갔다.
 

집을 다 둘러 본 나는 팔을 걷어부쳤다. 반나절이면 쓰레기 하치장같은 그 집을 사람사는 집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불끈 솟았다.  내 오늘 이 집을 뒤집어 엎으리라. 새 집으로 만들어 놓으리라. 제일 큰 쓰레기 봉지를 있으면 있는대로 다 가져오라 부인에게 일렀다. 그리고 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활용가치가 떨어진 것, 제 용도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은 물건 몇 개를  쓰레기 봉지에 던져넣자마자 주인이 난색을 표한 것이다. 버리지 말란다. 언젠가는 쓸 데가 있단다. 티끌 하나 버리지 말고 있는 물건들은 그대로 두면서 정리정돈을 해 달란다. 

아차, 버리는 걸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깜박했구나….

나는 설명했다.

"그동안 안 쓴 것은 앞으로도 안 쓰게 됩니다. 버려야 합니다. 정리정돈의 기본은 무조건 없애고 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집이 깨끗해져요. 버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래도 주인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죽어도 아까와서 안 된단다. 버려라, 못 버린다, 두어번 실갱이를 하다가 나는 두 손 들고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일갈했다.

“에고. 난 모르겠수, 그럼. 평생 쓰레기통 같은  집에서 살든지 말든지...”

칼처럼 정리정돈되어 있는 우리집을 늘 부러워하던 이의 집을 공짜로(!)  청소해주겠다는 내 야심찬 계획은 그렇게 어이없이 무산되었다.

누차 말했듯 은퇴한 후의 내 꿈은 ‘정리정돈 컨설팅 비즈니스’였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 정리정돈을 하는 일이었으니까. 흐트러진 물건을 줄 맞춰 정리정돈하는 일에 큰 재미를 느끼고 있었으며  또한 소질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위에 썼던 집에 가보고  내 마음대로 버리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일일이 주인의 허락을 맡아가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내 꿈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못 버리는 사람들과 입씨름까지 해가며 일 할 자신이 없다.

또 다른 꿈은 언제 한 번 글에 쓴대로 '다방마담'. 7080 음악에 설탕 하나, 프림 둘을 넣은 커피와 물처럼 흘러가버린 추억과 향수를 파는 다방마담.  그러나 이도 놓은지 오래다. 갈수록 못나지는 외모때문이다. 여기서 더 못나질 게 어딨냐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다. 예전엔 못났지만 그래도 젊었다. 풋풋했다. 지금은  늙어서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게 생겼다. 이 흉하고 거친 몰골로 무슨 다방마담. 손님이 들어서다가도 마담 얼굴보면 아이고, 놀라라! 도망갈 게 뻔하다.

그렇다면 은퇴 후  할 일이 없다. 집에서 빈둥대는 것은 평생했었고 나이들어서는 뭔가 생산적인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며칠을 고민했다. 뭘 할까. 내가 잘 하는 게 뭘까. 그러다가 반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이었다! 나는 남들의 삶에 관심이 많다. 살아온 얘기를 듣는데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글 재주도 있다. 안성맞춤 아닌가.

드디어 찾았네, 내가 갈 길을. ‘엄마는 나이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연극제목처럼 나도 나이 오십에 항해할 바다를 찾았네.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을 찾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