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친구가  항상 궁금했다.

공부도 잘했고 집안도 좋았고 운동과 악기 등 못하는 게 없어  어른들과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친구. 얼굴도 예뻤고 키까지 커서 남학생들의 선망이었던 친구. 모든 면에서 특출하게 뛰어났던 그녀는 공부도  그냥저냥, 인물이나 키도 고만고만, 집안도 도토리 키재기였던 우리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이었다. 어딜 내놓아도 빠질 게 하나 없는 완벽한조건을 갖춘 친구였기에 우리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부러워했고 우러러보기까지 했다.

지방의 이름없는 대학에 겨우 진학하거나 아니면 '신부수업'이란 명목아래 고등학교나 근근히 마치고 집안살림이나 돕던 우리들과 달리 그녀는 서울의 유수대학에 합격해 마을을 떠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비범한 인물은 큰 고장의 큰 대학으로 가야 활개를 펼 수 있을 테니까.

몇년 후, 그녀의 부모마저 서울로 이사를 가버렸기에 그녀의 소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크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름을 떨칠 것 같았다. 적어도 우리같이 평범하게 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신문의 정치, 문화면을  늘 유심히 읽었다. 정치계든 학술계든 한 자리를  할 것 같았던 그녀였기에. 어떤식으로든 그녀의 이름이 신문에 반드시 나올 것 같아서. 미국에 와서도 그녀에게 건 기대는 마찬가지였다.

재작년 봄, 삼십년만에 처음으로 친구들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친구들 모임은 10여년 전부터 있어왔는데 나는 한 번도 참석할 수 없었던 것이 그동안은 내가 '셀폰'이 없었으니까. 남편의 강요로 2년 전에 '스마트 폰'을 가지며 '카톡'이란 걸 하게되면서 소원했던 친구들과 두루두루 연락이 된 거였다.

100여명 가까이 모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제일 먼저 그녀의 모습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옆의 친구로부터 그녀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가정주부라고 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좋은 혼처가 나타나서 바로 결혼을 했단다. 그런데 속은 결혼이었단다. 넘치게 많다던 재산, 높은 직책의 신랑자리라 했는데 결혼을 하고보니 새빨간 거짓말. 시어머니까지 모셔야했고 게다가 남편이 의처증이 말도 못하게 심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 힘들게, 가난하게, 고통 속에 산다했다. 친구들 모임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으며 어쩌다 온다해도 5분 사이로 걸려오는 남편의 전화에 좌불안석하다가  밥만 먹고 금방 가버린다고 했다.

나는 무척 놀랐다. 그리고 실망했다. 그 총명하고 영특하던 아이가 어찌 그 모양으로 살게 됐는지. 착잡했고 가슴도 아팠다.저 넓은 창공으로 훨훨 날지 못하고 결혼으로 인해 날개가 꺾어져버린 그 아이의 신세가 가여워서. 그녀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를.

그날 모임에서 또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가장 출세한 동창으로 나를 꼽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이 없어 하하 웃었다. 어찌보면 맞는 말이긴했다. 초라하고 보잘것 없던 내가,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가서 수돗물로 배를 채워야했던 내가, 그 추운 겨울, 양말 한 켤레가 없어 고무신에 맨발로 학교에 다녀야했던 내가  미국까지 와서 등 따시고 배 부르게 살고 있으니.

실현가능성 '제로'로 치부했던 점쟁이 말이 거의 맞았다. 그녀가 내 미래를 다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어릴 때 점쟁이가 그랬단다. 물 건너 간다. 평생 먹을 것 걱정 안 한다. 유명해진다. 사람들을 거느린다….점쟁이 말대로 물 건너 왔고 식탐은 그리 없는 편이지만 먹는 것 걱정해본 적 없고 신문에 늘 이름나니 나름 유명하고 수십명의 할배, 할매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 했었다. 나는 궁금하다. 한국에서 말하는 ‘흙수저’인 내가 신분상승해 지금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은 팔자일까, 운일까.

팔자도 운도 아니었다. 최근 인터넷에서 알게 된 ‘인생총량의 법칙’에 의해서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슬픔 아픔 즐거움 고난 걱정의 양(量)을 가지고 있단다. 어릴 때 좋은 부모 밑에서 호의호식하며 괴로움이란 걸 모르고 자라면서 즐거움과 기쁨의 양을 다 써버린 사람은 나중에 거지 발싸개같은 배우자를 만나 고생하든지 망나니같은 자식때문에 죽을 때까지 속을 썩는단다.  

반대로  정해졌던 아픔과 괴로움 등을 성장하면서 미리 다 당한 사람은 이제 그동안 못 쓴  기쁨과 즐거움을  쓸 차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년이 다복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타고난 자기 몫의 희비애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생총량의 법칙에 따르면 나는 평생 겪어야 할 고난과 역경을 어린시절에 한꺼번에 다 소모해버렸기에 중년과 말년의 삶이 평안하고 윤택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생총량의 법칙이라. 누구에게나 적용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이는 평생 다복하고 즐겁게,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면서 편하게만 살다 가고 어떤 이는 태어난 자체가 비극에다 사랑 한 번 못 받아보고  고생만 지지리 하고 죽는다면(하다못해 그 죽음을 슬퍼해주는 사람도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이보다 공평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나. 이보다 억울한 일이 또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