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니까, 늙으니까 없던 병도 생깁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들이.

혹시 '비문증'이란 병을 아십니까? 많은 독자들도 처음 듣는 병명일 겁니다. 나도 젊을 땐 몰랐어요, 이런 병이 있다는 사실 조차.

날을 비, 모기 문 , 비문증. 이름도 요상한 그 병이 나를 찾아 온 건 어느 휴일 아침이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뭐가 자꾸 눈 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겁니다. 음, 뭐라고 표현해야  정확할까. 머리카락같은, 수십마리의 모기떼 같은 얇고 긴 검은 물체들이 눈 앞에서  왔다리 갔다리하는 형상이라면 이해가 쉬울까요.

아이고, 이것이 뭣이다냐! 

일단 눈을 비벼봤어요. 티끌이나 머리카락이 들어간 줄 알고. 그리고 눈을 떴다 감았다를 수십번 반복해보았지요. 이런! 전혀 효과가 없어요!

컴퓨터 화면을 너무 많이 들여다봐서 그런가 싶은 생각이 퍼뜩 듭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지요. 차 한잔을 끓여서 뒷뜰로 나갔습니다. 안약을  넣고는 뒤로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고 등나무 의자에 앉아 한참을 있었어요. 한 이, 삼십분 쯤.  그리고는 눈을 떠봤어요. 짠, 하고 머리카락이랑 모기가 깨끗하게, 말끔하게, 시원하게 사라졌길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 망할 것들은 여전히 눈앞에서 너울너울 신나게 춤을 춥니다. 빚쟁이처럼 끈질기게 붙어있습니다.

불에 덴 듯 목욕탕으로 달려갔습니다 세면대 가득 물을 받았습니다. 얼굴을 씻었지요. 씻은 이유가 있습니다. 웬일로 간밤에 잠을 잘 자고 일어났더니 아침부터 기운이 뻗치는 겁니다. 그래서 몇달만에 얼굴 마사지를 했지요.  듬뿍듬뿍 퍼바른 마사지 크림이 눈에 들어가서 그런가 싶어서요. 뽀득뽀득 얼굴을 씻으면서 맑은 물로 몇번이나 눈을 씻어냈습니다.

그런데 눈과 얼굴을 씻고나서도  증상이  가시지를 않습니다. 더욱 심하게 나를 괴롭힙니다. 눈동자를 치켜뜨거나 내리 깔거나 옆으로 돌려 봅니다. 눈동자를 움직이는 방향으로 계속 그 부유물들은 따라옵니다. 눈을 씻어내고 휴식을 취해보고 안약을 넣어보고 해볼만 한 짓은 다 해봤습니다. 이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 앉았습니다. 큰일 났구나!  만 명 중 한 명 있을까말까한(검안의친구가 내 눈을 검사하며 실제로 한 말)지독히 나쁜 눈인데 이제 큰 탈마저 났구나! 앞을 볼 수 없게 생겼구나!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걸 참으면서 검안의친구에게 전화를 했어요. 일요일이라 병원 예약도 안 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행히 친구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는 다급하게  내 증상을 알렸습니다. 큰일 났다고!  생전 없었던 이상, 요상한 증상이 눈에 갑자기 생겼다고! 이거, 눈이 머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내 애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낮잠자다 깬 목소리로 친구가 느긋하게 말했어요.

"플로테스(Floaters)가 왔구만. 나도 예전에 생겼었더랬어. 근데 몇년 지나니까 저절로 없어지던데? 별 거 아니야. 걱정 안 해도 되어요. 늙어서 그래요. 늙으면 흔하게 오는 증상이야"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방법이!  늙.어.서.생.긴.병이라 고칠 방법이 없답니다.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불치병이랍니다. 실망과 경악과 한탄과 걱정과  울화 등 온갖 복잡한 감정이 머리를 채우는 중에도 저절로 없어진다는 말에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데 계속 이런 상태로 살라고? 이렇게 불편한 증상을 가지고 살라고?

부랴부랴 전화를 끊고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수백개의 정보가 떠요.  친구의 말이 맞았어요. 노환으로 생긴 증상이랍니다.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나를 더욱 절망하게 만든 것은 검안의친구 말처럼 저절로 없어지는 병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절대로 저절로 가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평생 같이가야 할 증상이라는 겁니다.

안과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전문가의 의견을 일단 들어봐야 될 것 같았습니다. 며칠을 불안과 걱정으로 잠을 설치다가 예약한 날짜에 직장을 빠지고 의사를 보러갔지요. 그래서 의사가 뾰족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냐고요?

괜히 갔습니다. 코페이 20불이랑 아까운 시간만 날렸어요. 인터넷에서 읽은 정보와 똑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온갖 약을 넣고 강렬한 빛을 눈 안에 비추어보고 별별 검진을 다 하던 아랍 계통의 의사가 말했습니다.

이 병은 한 번 생기고나면 고칠 방법이 없다고. 평생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명에나 사물을 보는 덴 지장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내 친구 하나가 나랑 같은 증상이 생겼다가 몇년 뒤 없어졌다고 하던데 나도 그렇게 될 여지가 있냐고.  의사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말했습니다. 아주아주 드문 경우라고. 24년 자기 임상경험상 한 번도 보지 못한 희귀한 경우랍니다. 내 친구가 나랑 다른 질환이었거나 아니면  증상이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몇년을 같이하다보니 익숙해져서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다고. 의사가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어요.

“낫는 병이 아니긴 하지만 개개인의 신체가 다 다르니 어쩌면 기적적으로 증상이 개선될 수도 있겠지..."

기적적이라, 나 한테 그런 기적이 올리가 있나. 그렇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친구처럼 나도 몇년 있으면 나을 수도 있구나, 하던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인터넷에서 본 정보가 정확했습니다. 확인사살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은 참담했습니다. 눈물이 앞섶을 적실만큼 마구 흘러내렸습니다.

늙기는 진즉 늙었지만 늙음을 직접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은 몇년 전부터였습니다. 나이 오십을 넘기고부터 늙음의 증상을 자주, 그리고 더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겁니다. 일기예보를 보지않고도 비가 온다는 걸 알아낼 수 있어요. 여기저기 온몸이 아프거든요. 특히 팔다리가 더. 쑤시고  저려요. 앉을 때도 설 때도 아이구구, 하는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손끝이 말라서 그릇을 자주 떨어뜨립니다. 그동안 깨먹은 접시만도 예닐곱개. 입안이 말라서 국물없이는 밥을 못 먹겠어요. 내 친구 중 일흔 여섯된  할배가 있습니다. 할배는 늘 우는 사람같습니다. 눈이 펑 젖어 있습니다. 저절로 눈물이 흐른대요, 시도때도 없이. 할배가 말했습니다.

“늙으니까 마를 데는 젖고 젖을 데는 마르네...”

'미시 유에스 에이'를 통해 만난 헬렌이라는 독자는 지금 쉰을 바라보고 있지만 한 때 모델로 이름을 날렸던 여성입니다. 175미터의 큰 키에 허리 사이즈 25를 자랑하는. 아직도 밖에 나가면 길가던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입니다. 그러나 헬렌이 말합니다. 거울 안 본지가 수년 되었다고. 화장실에 가서도 거울보기 싫어 일부러 불을 안 켠답니다. 적나라한 늙음과 마주치고 싶지않아서. 모델했던 사람이 거울을 안 보다니!

사실 언제부터인지 나 역시도 그렇게 됐어요. 거울 앞에 서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합니다. 거울을 보면 한심하니까요. 좀 나아졌던 우울증이 도질 지경입니다. 언제 칼럼에  언급한 적 있지만 우리집에는 거울이 많습니다. 전신을 비추는 대형거울만도 열 개 가까이 됩니다. 키도 작고 몸매도 형편없고 얼굴도 헉, 소리나게 생겼지만 여지껏 나 잘난 맛으로 살아왔습니다. 음, 뭐 이만하면 쓸만 하군 늘 낙천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만만 했던 내가 언제부터였는지 거울을 멀리하게 된 겁니다. 헬렌이 말대로 적나라한 늙음의 징표를 마주하는 게 무섭기때문입니다. 늘어지고 처진 살, 윤기 잃은 피부,  둥그스럼하게 변한 체형, 흐려진 눈빛, 바삭바삭 건조해진 손톱,발톱...

한 때는 풍성하고 빛나고 탱탱하고 윤나던  것들이 세월앞에 풍화작용되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참 다행히도 나는 머리카락은 아직 쇠지않았네요. 새치가 한 두가락 보이긴 하지만  아직은 염색을 시작해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칠십이 넘어서도 새카만 머리카락을 자랑하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 같네요.

 ‘날 맹글지말고 맷방석이나 맹글지 뭐할라고 날 맹글어서 이 고생을 시키나’ 하는 민요가락처럼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잘 가르치지도 못 하면서 쓸 데없이 낳기만 해놓았다고 평생 원망만했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이제 머리카락 안 쇠는 걸로 아버지한테 감사할 줄이야!

어쨌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형수술이란 인위적인 방법으로 몇 년 젊어보일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까지하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너희들의 젊음이  상이 아니듯 우리들의 늙음도 벌이 아니다'란 말이 많은 위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쇠락한 외모는 이 풍진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 온 증표라고 애써 자위해봅니다. 그래, 결코 벌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