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재수없는 날이 가끔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사가 제대로 안 풀리는 날. 머리 꼭대기에서 김이 날 만큼 열통터지는 일이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는 날. 

얼마전 월요일이 그런 날이었다. 아침부터 영 기분이 저조했다. 몸살을 앓으려는지 몸도 마음도 편치않았다. 온몸 구석구석이 누구한테 두드려맞은 듯 결리고 쑤시고 아팠다. 따뜻한 전기장판을 켜놓고 하루종일 좀 잤으면 몸 상태가 호전될 듯 싶은데 내 팔자에 그런 호사가 가당키나 할까.

지렁이처럼 꿈지럭거리며  출근준비를 하는데 산다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쳤다. 일하고 먹고 자고  다시 일하고 먹고 자는 똑같은 일상을 평생토록 반복한다는 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집을 나섰다.

그날따라 차들은 왜 또 그리 밀리고 있는지.  

고개를 빼 앞을 살펴보니  맨 앞의 흰 트럭 하나가 문제였다. 45마일 존에서 35마일로 세월아네월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로 열 몇 대의 차가 밀려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고. 트럭의 주인은 필경 전화기를 붙잡고 있거나 딴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새치기를 하거나 깜박이없이 끼어들어오는 차한테는 관대할 수 있다. 짜증이 좀 나지만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출근시간에 서행하는 차는 용서가 안 된다. 패죽이고 싶다.  일 초가 급한 상황인데   제한속도 아래로 기어 가고 있다니!

젊었을 때는 경적을 마구 울리거나 가운데 손가락이라도 올려 보여주면서 확 패스를 해 앞서가야 속이 시원했지만 요즘은 그럴만한 열정도 패기도 없다. 또한 하도 미친 인간들이 많으니 총 맞을까 몸을 사리게된다.  대신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다 퍼붓는다. 

겨우겨우 고속도로에 진입했는데 이게 웬일! 딱,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앞 유리에 새끼 손톱만한 홈이 푹 패였다. 어디선가 날아 온 돌이 앞  유리에 부딪쳐 구멍을 내고 만 것이다.  

속을 부글부글 끓이면서 주위를 살펴봐도  앞, 옆, 뒤로 모두 정신없이 내빼는 차들뿐. 어디서부터 날아온 돌인지 알아내는 건 완전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사에 도착해서 살펴보니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볼펜심이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뚫린 것이다.  아무래도 유리를 갈아야 할 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선 채 부랴부랴 딜러에 전화해 상태를 설명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통째로 유리를 갈아야할 것 같단다. 금액은 대략 1200불이 들 거라면서. 이런, 젠장맞을 일이 있나!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그 시간, 그 장소를 운전했다는 죄로 내 피같은 돈 1200불이 날아가게 생겼다! 

정말로 열받는 날이었다. 종이에 손을 베이지를 않나, 아침까지 멀쩡하던 구두굽이 떨어져나가지를 않나, 회사 라커룸에 갖다 둔 새 운동화를 어떤 거지같은 인간이 훔쳐 가버리지를 않았나.  늘 이삼십불짜리 싸구려만 신다가 최근들어 무릎이 아픈 것 같아 무리해서 산 유명브랜드 운동화. 나 외엔 아무도 쓰지 않는 라커룸이라 의심없이 그냥 바닥에 놓아두었더니 누가 가져가버린 것이다. 그 운동화신고 십리도 못 가 발병이나 나라고 혼자 욕을 퍼부었지만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쩌리. 이미 훔쳐가버린 걸...

퇴근 후 회사 근처 마켓에 들렀는데 거기서 또 짜증나는 일이 생겼다. 사람이 제일 없는 줄을 골라섰건만 ‘푸드스탬프’로 계산하는 앞의 여자가 카드에 충전된 금액이 모자랐는지 아니면 금지된 품목을 샀는지 봉지에 담긴 물건을 넣었다가 뺐다가하면서 마냥 지체하고 있는 것이다.  나보다 늦게 섰던 옆 줄의 사람들은 벌써 계산을 마치고 떠나갔는데. 딱 죽었으면 좋겠다 싶게  왕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머리꼭대기까지 치민 화를 누르면서 집에 오니 불은 환한데 아무도 없다.  화장실 하나와 응접실과 식당의 불이 다 커져있고 텔레비젼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왕왕 떠들고 있다. 남편에게 전화하니 차에 기름을 넣으러 갔단다. 

어두우려면  아직 멀었는데 왜 불은 방 방마다 켜놨으며  나가면서는 왜 끌 생각을 못 했을까. 남편의 불 안 끄는 습관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포기상태이긴 했지만 하루종일 나있었던 울화가  대낮같이 환한 불빛과 텔레비젼소리에 폭발 직전이 되었다. 들어오기만하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전의를 가다듬으면서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하릴없이 랩탑을 열었다. 몇 통의 스팸메일이 보이길래 다시 열이 확 올라오려하는데 오, 그 속에서 빛나는 편지 하나가 있다.  아랫동네 할배가 보내온 거다.

중앙일보에 실린 내 칼럼을 읽고 팬레터를 보내온  할배. 그 인연으로  몇년 째 안부편지를 주고받고 있는 할배.  국문학도 전공하지 않았으면서  독특하고 수려한 문장으로 늘 나를 감탄하게 하는 할배. 이번 편지 내용은 이랬다. 

“요즘 살아있는 게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합니다. 딱히 즐거운 일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 부러울 일도 없으니 이게 모두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일 수도 있겠지요. 

비행기를 세고 앉아있든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눈물짓든 살아있어야 가능합니다.

살아있어야 뜀박질도 할 수 있고 살아있어야 싸움질도 할 수 있고 살아있어야 오늘같이 더운 날엔 집에 들어가자마자 시원한 맥주도 한 잔 할 수 있겠지요. 이계숙씨께서도 살아있음을,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이 순간을 마냥 만끽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하루종일 나를 뒤덮었던 짜증이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지는 걸 느꼈다.  나는 일어나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랬다. 할배의 말이 맞았다.  어쨌든 나는 살아있었다. 살아있음에 화도 내고 짜증을 낼 수도 있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