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으로 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얼마전, 한 한인 행사장에서 만났던 독자였다. 조심조심다가와 내가 자신이 짐작하던 인물이 맞다는 걸 확인하더니 다짜고짜 두 손을 부여잡던.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이계숙 씨의 글을 통해 큰 희망과 위로를 받았어요..”

갑작스런 일이라, 그리고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주위가 시끄럽고 어수선해서 나의 어떤 글이 그렇게 어필했냐고 묻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내내 궁금했었다. 신변잡기에 불과한 내 글이다. 재밌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으되 큰 감동이나 울림은 없다는 평을 듣는 내 글이다. 도대체 어떤 글이 그렇게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을까.

내 심정을 알아내기로라도 한 듯 얼마후 그녀가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녀는 편지에 밝혔다.

“벌써 오래된 일이 되었네요. 혼신을 다해 사랑하고 믿었던 남자로부터 배반당하고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인생의 막바지에,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었던 때였어요. 일 주일을 내리 굶다가 이러단 죽겠다 싶어 밥을 먹으러 갔던 한국식당이었어요. 음식을 기다리는동안 무심코 집어든 신문에 이계숙씨의 칼럼이 있었습니다. ‘날개’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아요. 별 기대없이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마구 쏟아졌어요. 누가 보거나 말거나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그 후, 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새롭게 날 수 있었습니다...”

날개라, 제목만 듣고도 나는 그 글 내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중앙일보에 쓴 수백 편의글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었기에. 엄밀히 따지자면 글 내용보다 그 글에 소개한 시때문이다. 수십번을 다시 읽어봐도 읽을 때마다 심금을 울리는 시. 지금으로부터 8 년전, 흑암같은 우울증에 빠져있을 때인 2010년 3월에 쓴 글이었다. 다음은 내가 쓴 그 글의 후반부다.

-나를 일으킨 것은 지인들이 날 염려해 사겠다는 밥과 술이 아니었다. 뒷뜰에서 꺾었다며 갖다준 할배의 개나리꽃이 아니었다. 짤막한 詩 한 편이었다. 오래전 프랑스의 어느 시인이 썼다는, 중앙일보 지사장이 ‘날개를 펴세요, 이계숙씨’라는 당부와 함께 보내 온 시 한 편...

' 천길 벼랑 끝 100미터 전/하나님이 나를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시나/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1미터 전/ 더 나아갈 데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을 거야/벼랑 끝/ 아니야/ 하나님이 날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너무나 잘 아실 테니까/그러나 하나님은 벼랑 끝자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그리고 그때야 나는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나는 감동으로 전율하면서 지사장에게 물었다. 제게도 그런 날개가 있을까요. 그가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펴기만 하면 부웅, 멋지게 날 수 있는 날개가 이계숙씨에게도 있지요. 그를 통해 나는 알았다. 내게도 힘찬 비상(飛上)을 할 수 있는 날개가, 두 날개가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위의 독자도 내 글때문이라기보다 내가 그 칼럼에 소개한 시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었을 거였다. 그해, 2010년, 3월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 시 한 편이, 음악 한 곡이, 한 마디의 말이 실의와좌절에 빠진 사람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자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순탄치 않았던 내 인생에 늘 힘이 되었던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란 구절이었다. 이스라엘 다윗왕의 명을 받아 솔로몬 왕자가 지었다는. 죽음같이 괴로운 일도 가슴을 쥐어뜯을 만큼 원통한 일도 창자를 저미는 슬픈 일도 세월이 가면서 바람처럼 다 지나간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에 봉착했을 때마다 주문처럼 이 말을 몇 번 되뇌면 신기하게도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 좀 있으면 다 해결 되는 일이지. 시간이, 세월이 흐르면 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일들이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금방이라도 내 숨통을 죄어 올것 같던 태산같던 이슈가 길가의 돌멩이처럼 작아지는 것이었다.

최근, 아랫동네 할배가 자신의 묘비명을 짓고 있는 중인데 마땅한 글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메일을 받았다. 적지않은 나이,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나이. 세상떠나고 난 뒤 자신의 묘비명으로 인해 누군가가 미소를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단다. 그런 인상적이고 특별한 묘비명을 짓기 위해 고심중이라나.

나야 시신기증에 등록 다 해놨고 절대로 절대로 묘지같은 건 거 만들지말고 나무들의 영양분이나 되게 수목장으로 해달라고 남편과 주위사람들에게 기회있을 때마다 누누이 일러놓은 터였지만 섬광처럼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머리에서 사라질새라 얼른 할배한테 적어 보냈다. - 왔다. 살았다. 그리고 갔다. -

보내놓고 가만 생각하니 급하게 대충 지은 거지만 그 간결한 세 마디에 내포한 뜻이 꽤 크고 심오하다 싶었다. 역시 난 천재야, 자아도취에 빠져있는데 할배한테서 답장이 왔다. 할배 역시 맘에 꼭 든단다.

그렇다. 우리는 원했든 원치않았든 한 생명으로 왔고 사느라 고생했고 그리고 나이들게되면 다 간다. 아무리 안 가려고 용 쓰고 발광을 해도 100년 안에 다 간다. 태어날 때처럼 빈 손으로 간다. 그렇게 이슬처럼 덧없이 갈 건데 우리는 왜 천년을 살 것처럼 아둥바둥할까. 지지고 볶을까.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할까. 앞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와 함께 내 인생의 지표로 삼아야겠다. 미움과 욕심과 탐심이 솟구칠 때마다 떠올려야겠다. ‘왔다. 산다. 그리고 간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