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즐거워서 무슨 내용을 쓰는 건지, 뭘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빠르게 타이핑한다.  나에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소설 쓰는 사람한테는 그런 주술적인 힘, 즉 다른 세계와 커넥션이 있어야 한다. 소설 쓰는 일은 노력이나 지성만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개미', ‘제 3인류'의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몇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당시 구글의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인간 기사 이세돌 간의 바둑대결이 한창 이슈가 될 때였는데 그는 "다른 건 몰라도 글 쓰는 작업은 어떤 주술적인 힘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작업이어서 인공지능이나 컴퓨터가 절대 대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 글을 읽고 나는 무릎을 쳤다.

보름 휴가동안  매일 인터넷만 헤매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이런 수확이 있을 줄이야! 지난 십몇년간 눈 앞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확 걷혀 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도 소설을 쓸 때 베르베르같은 경험을 많이 했었다.  그 어떤 힘이 나를 조종하는 것같은. 나도 모르게 신(神)을 받은 것같은.

수천만의 독자를  거느린 그 대가랑 어찌 같은 급에 서려 하느냐고 비웃지 말아주기 바란다. 하늘과 땅 차이같이 수준이 다르지만 어쨌든 소설을 쓴다는 점은 같으니까. 

지난 10 여년동안 써놓은 장편소설과 논픽션을 가끔 다시 읽어보는데  읽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이런 구상을 정말로 내가 했나, 이런 표현이 정말로 내 머리에서 나왔나 싶을 만큼 빼어난 게 더러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명석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솔직히 많이 멍청하고 둔한 편이다. 그래서 할배들로부터 '그 돌머리로 어떻게 글을 쓰느냐'는 지청구를 수십 번도 더 들었다. 나이 오십이 넘고부터는 기억력도 많이 떨어진다. 어제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할배들 말대로 내 머리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내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한 말을 읽고나서 이제 그 의문이 풀린 것이다.

사실 그동안 나는 내 자신이 무서웠었다. 소설 쓸때마다 내 자신이 아닌 것같은 기분을 느꼈기에. 누군가가 내게 들어와 나를 조종해 글을 나오게 하는 걸 느꼈기에. 이러다가 내가 팔자에 없는 무당이 되는 건 아닌가.

왜냐면 위에도 말했듯이 평소의 나를 보면 소설은 커녕 편지 한 장도 제대로 못 쓸 꼬락서니가 아닌가 말이다. 어떤 신이 내리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인이 해 준 오싹한 이야기때문에 더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지인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인간말고 다른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는 것이다.

한국에 살 때였다고 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지인의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하기 위해 굿을 하면서 겪은 일이라고한다. 굿은 깊은 밤 산속에서 식구들이 다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고 한다. 지인은 미신을 믿지않는지라 그냥 방관자의 입장이었지만 식구들이 다 참석해야한다는 무당의 의견에 따라 마지못해 따라가 한 켠에 서있었다고 했다.

굿이 어느정도 진행될 무렵 갑자기 무당이 지인에게 대나무를 잡으라고 하더란다. 지인은 무심코 무당이 쥐어 준 대나무를 잡았는데, 이게 웬일. 대나무를 잡자마자 무당들이 치는 괭과리와 북소리에 맞춰 몸이 위로 펄쩍펄쩍 솟구쳐 오르더라고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어떤 강한 힘에 의해서. 아무리 멈추려고해도 안 되더란다. 거의 여덟시간을. 새벽동이 트면서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쓰러질 때까지. 지인이 몸서리를 치면서 말했다.

“미친년이 따로 없었어. 정말로 무섭고도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어...”

나는 소설 쓸 때 습작을 미리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위에 말한 그 주술적인 힘이 아주 게으른 놈이라 마감을 코 앞에 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나타나기에.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책상 앞에 앉는다. 그것도 반드시 세시, 네시 정도 이른 새벽이라야하고 ‘이루마’의 피아노곡이 틀어져있어야하고 막 내린 커피가 옆에 있어야하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발밑에 작은 히터가 돌아가서 발을 따뜻하게 덥히고 있어야한다.

머리 속에 아무  구상이나 전개에 대한 아이디어없이 책상에 앉았지만 위의 조건이 다 충족되면 곧 주술적인 힘을 받기 시작하고 이어 금방 다다닥 글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주 예전엔 원고지에 글을 썼었는데 사실 그때야말로 주술적인 힘이 지금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한 번 펜을 잡았다 하면 중간에  첨삭하는 일 거의 없이 끝을 맺었던 것이다.

이십 몇년 전, 한국 '학원사'의 요청으로 한 여성의 수기(독자들도 읽었을 것이다. ‘털어놓기도 부끄러운 이야기’)를 대필한 적 있다. 원고지에 손으로 직접 썼는데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일 주일만에  다 해치웠다. 단 한 장의 파지도 없이 말이다. 

식탁에 수북히 쌓여있던 원고더미가 며칠만에 싹 정리가 된 걸 보고 와, 정말로 대단하구나하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몇몇 지인들을 기억한다. 

이 글이 어쩌면 자랑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그동안 소설을 쓰면서 직접 느꼈던 신비한 경험에 대해 말하는 거다. 명확하게 딱 집어서 설명할 수 없는, 남에게 말했다간 분명히 '미쳤다'고 할 게 뻔했던 그런 경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아니었으면 나 혼자만 겪는 것으로 치부했을 그런 경험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