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사는 친구, 희주로부터 고가의 화장품을 소포로 받았다. 로숀과 토너, 그리고 영양크림과 아이 크림.

첨엔 그 화장품들이 그렇게 비싼 것들인 줄 몰랐었다. 드럭 스토어에서 십불짜리 화장품만 쓰는 나였기에 '역시 한국 화장품은 용기(容器)마저 예술작품처럼 예쁘구나' 감탄했을 뿐. 나중에 영양크림 하나가 45만원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경악했다. 여기 돈으로 거의 500불이나 하는 영양크림. 로숀이랑 토너등 모두 합치면  몇천불이 넘지 않는가 말이다.

마음이 편치않았다. 부담스럽고 미안하고. 더구나 앞으로  홍삼이니 대추니 참기름이나 하는 것을 더 부쳐준다고 하지 않는가. 경영하는 식당이 늘 손님들로 만원이라 돈에 구애받지 않는 희주라지만 내가 그런 고가의 물건들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희주에게 일렀다.

“됐다, 희주야. 지금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도 홍삼, 참기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안 부쳐도 된다. 그만 애쓰면 좋겠구나.....”

 희주가 대답했다.

“친구야. 나는 기억하고 있단다. 아주아주 오래전, 추운 겨울 날, 네가 사준 ‘짬뽕’ 한 그릇을….”

희주의 말인즉슨 저나나나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절의 어느  1월이었다고 했다. 유난히  날씨가 춥고 을씨년스러워 몸과 마음이 잔뜩 움추려들던 날 시장에서 우연히 둘이 만났다고 했다. 내가 희주의 팔을 끌고 근처의 중국집으로 들어가 주머니 돈을 다 털어 짬뽕 한 그릇을 사주더란다. 돈이 없으니  한 그릇만 사서 자기만 먹게하면서 먹는 모습을 흐믓하게 내가 바라보더란다. 그게 지금까지도 고마움으로 남아서 언젠가는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희주는 덧붙였다.  지금은  내게 짬뽕을 백 그릇, 천 그릇 사 줄 수도 있다고. 그러나 그 추운 겨울날 내가 사준 짬뽕 한 그릇의 가치는 안 될 거라고.

"니가 그동안 휴대전화도 없고 주소도 모르고해서 연락이 안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카톡' 이 돼서 자주 연락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야지. 진즉 스마트폰을 사지 그랬니?"

지난 봄, 동창회에서 몇십년만에 본 친구 ‘선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고 했다.

당시 ‘게맛살’이 나올 때였는데 처음 출시된 거라 가격이 만만치 않았단다. 그런데 내가 근처의 '슈퍼'에 가서  선자한테 게맛살 몇 봉지를 사주었단다. 내 행색이 썩 넉넉치 않은 것같았는데도  불구하고.

희주한테 사준 짬뽕, 선자한테 사준 게맛살,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희주가 말한  짬뽕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두 그릇 시킬 돈이 없어 친구만 먹게 하고 입맛만 다시고 앉아 있었을 당시의 나를 생각하면 기특하면서도 불쌍해서. 한국에 살 때 내가 제일 좋아하던 음식이 짬뽕이었었는데(지금이야 그보다 더 좋은 음식이 지천이니 짬뽕은 음식으로 치지도 않지만).

‘준 사람' 은 까마득히 잊고 있는데 ‘받은 상대' 는 고마움을 오래 간직하고 있는 경우를 가끔 본다. 특히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받은 도움은 평생 잊지 않게 된다.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신문기자 일을 하며 혼자 어렵게 살 때였다.

어느 겨울 밤, 취재를 다녀오다가 물구덩이에 빠졌는데 차의 모터가 차가운 물에 닿아 나가버리고 말았다. '털어놓기도 부끄러운 이야기'를 대필하고 받은 원고료로 샀던 '새 차' 였는데  출고한지 며칠도 안 돼 그 사단이 난 것이다.

무섭고 막막했지만 차에서 빠져나와 겨우 집에까지는 걸어 갔다. 그러나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생각해 낸 사람은 당시 이곳 한국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P씨. 그 부인이 내게  참 친절했으므로 그들이라면 날 도와줄 것 같았다.

염치를 불구하고 그들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의 도움으로 차를 토잉시키고 그 부부 사무실에 망연자실 앉아있는데 부인이 옆 식당에서 우동을 한 그릇 시켜주었다. 뜨거운 걸 먹으면 힘이 날 거라면서.

그리고 돈 2백불을 담은 봉투를 내 핸드백에 찔러 주었다.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내 형편이 풀렸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비싼 화장품세트를  P씨 부인에게 선물한 일이었다. 이유를 말 하지않고 주었기에   왜 내가 그 선물을 했는지 P씨 부인은  지금까지도 이유를 모를 것이다.

W씨도  P씨 부인에게 고마운 게 있다고  했다. 

40년 전, 한국에서 처음 부모님, 언니, 오빠 등 온 가족들과 이민을 왔는데 영어도 모르고 모든 게 생소하고 낯설어 어리둥절하고 불안할 때였다고 했다.  P씨 부인이 그 많은 식구들을 자기집으로 초대해 저녁대접을 해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미국생활에 필요한 걸 알려주면서 열심히 살라고 격려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고마움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는  W씨. 나중에 어느정도 자립했을 때   P씨 부부에게 근사한 저녁대접을 하면서 그 고마움을 갚았다고 했다.

 ‘준 것은 모래에 새기고 받은 것은 바위에 새기라’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을 실천하고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바빠서, 형편이 안 돼서 등등의 이유로. 그러나 내 친구 희주처럼  몇십년이 지나도록 '받은 것'을 잊지않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 겨울의 짬뽕 한 그릇이 천불이 넘는 화장품으로 돌아 온 오늘,  내 가슴은 한동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