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동네길을 조깅하던 중 발목을 삐긋했다.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디선가 가라오케 장단에 맞춰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귀 기울여 들으니 한국 노래였다. 여자 목소리였고 김수희의 ‘남행열차’였다. 노랫소리는 캄캄하게 불이 꺼진 한 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집 앞을 몇 번이나 지나다녔지만 한국사람이 사는 줄 몰랐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끝까지 다 들었다. 남행열차는 끝이 나고  촛불잔치라는 노래가 이어졌다.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내가 알기로  남행열차와 촛불잔치는 신나는 노래다. 그러나 여자의 노랫소리는 신나지 못했다. 청승맞고 애절하고 처연했다. 늦은 밤, 적막하게 불꺼진 집안에서 여자는 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같이 노래를 부를 친구도 하나  없는 것일까.

내겐 우울증이 있다. 그동안은 몰랐는데 여러 경로를 통해 내가 이 증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의 증세는 첫째, 잠을 잘 못잔다는 것이다. 항상 생각이 많고 머리속이 복잡해서 그렇다고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얼마전 신문에서 읽었다. 잠 못자는 것도 우울증의 한 부분이라고.

또한 나는 만사 재미있는 게 없다. 모든 일이 시들하고 지루하고 갑갑하다. 아침에 눈 뜨면 한숨부터 난다. 심심하고 밋밋한 하루를 또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지겨워서.

몇 년전 배우 최진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사람들이 무척 경악했다. 그리고 의아해 했다. 돈, 명예, 미모등 가질 것 다 가진 사람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그러나 나는 그녀가 이해되었다.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립감이, 외로움이, 소외감이, 무료함이 그녀를 그런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거라고. 왜냐면 내가 항상 그러니까.

주위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해못한다. 매일매일이 ‘신나는 달밤’일 것 같은 내가, 여왕벌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내가 우울증이 있다는데. 어떤 지인은 ‘호강에 받쳐서 요강에 뭣 싸고 앉아 있네’ 하고 배부른 투정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나 역시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왜 나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까.

그러다가 얼마전 작가의 80%가 우울증이 있다는 글을 읽게 됐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자살율도 몇배나 높단다. 글 쓰는 이들은 남보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해서 그렇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일반인보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달라서란다. 기가 찼다. 글도 글 같지 않은 걸 쓰면서 남들이 하는 건 다 하고 앉아 있네….

K씨,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몇 년 전이었다. 애독자라며 날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후 드문드문 연락을 하며 지냈는데 작년, 그녀가 어찌어찌 우리집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친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참 많이 위한다.

눈 나쁘고  운전 잘 못하는  나를 위해 웬만한 데는 다  데리고 다녀주고 요리에 관심도 없고 잘 하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이런저런 음식들을 심심찮게 가져다 준다.

우리는 휴일 아침마다 걷기 운동도 같이 한다. 둘다 책을 좋아하고 문학에 취미가 있다는 공통점에선지 한번 얘기를 시작하면 대여섯시간이다. 그런데도 지루한 줄을 모르겠다. K씨를 만나는 일은 다른 지인들과 만나 하하호호 할 때와는 다른 특별한 느낌이었다.

최근, 나의 우울증이 많이 가셔진 걸 느꼈다. 우울한 생각이 들 때면 K씨에게 전화한다.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신다. 쇼핑도 같이 한다. 그렇게 몇시간을 보내고 나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먹구름들이 서서히 걷혀지는 것이다. 

이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다. 나이와 취미와 성격이 비슷한 친구. 가까이 살아 언제나 가볍게 마실 갈 수 있는 친구. 그리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어 웬만한 고민쯤은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