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주에 사는 한 여성이 편지를 보내왔다.

현재 처한 상황이 미치게 답답하지만 딱히 하소연 할 만한 데가 없어 내게 털어놓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혼하고 가게를 경영하며 혼자 산다는 이 여성은 얼굴도 몸매도 예쁘다고 했다. 성격 또한 사근사근하고 애교도 많아 따르는 남자들이 꽤 많단다. 문제는 정이 좀 들만 하면 남자들이 떠나가는 것이라 했다. 남자의 발까지 씻겨줄 정도로 최선을 다했는데, 시쳇말로 정 주고 돈 주고 줄 것 다 주었는데 짧게는 6개월을, 길게는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남자들이 이별을 고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한 남자로부터 일방적 이별통고를 받았단다.

편지 말미에다 여성은 이렇게 썼다.

"이계숙씨 사이트에 있는 연애소설을 다 읽어보았어요. 연애소설을 많이 쓰셨으니 남자의 심리를 잘 꿰뚫고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상담을 요청합니다. 어떻게 해야 좋아하는 남자를 완전한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글쎄, 참 미안하게도 내가 쓴 연애소설의 대부분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말 그대로 소설일 뿐 인 것이다. 그러나 왜 남자들이 그 여성에게 금방 싫증을 느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 여성은 문제점은 남자들에게 너무 잘 해주었다는 것, 바로 그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성은 남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입 속의 혀처럼 헌신했다. 바로 그 점을 남자들이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남자들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좋아하는 여성은 쉽게 질려 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자기가 먼저 좋아서 여자에게 접근을 시도해 놓고도 상대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눈치를 보이고 집착해 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 흥미를 잃고 얼른 발을 빼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여성은 자존감을 좀 더 높혔어야 했다. 발까지 씻겨줘 가며 남자의 환심을 사려 애쓰는 대신 보다 동등한 관계를 정립했어야 했다.

내 직장동료인 백인 남자는 최근 동양인 애인과 헤어졌단다. 여지껏 자기가 알았던 미국 여자들과는 다른 뭔가 신비하고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사귀기 시작했는데 끊임없이 비위 맞추고 보살펴 줘야만 하는 여자의 연약하고 의존적인 성격에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내 도움 없이 그 여자는 아무 것도 못해. 하다못해 음식 메뉴 하나도 내가 정해주어야만 해. 내가 결정해 주지 않으면 이랬다 저랬다를 수차례 반복한단 말이야. 난 그 여자의 아버지도 아니고 베이비 시터가 아니거든"

남편이 느낀 나의 첫 인상은 자신만만, 그 자체였다고 했다.

처음 만난 자리인데도 얌전한 척 내숭을 떨지도 않고 똑 소리가 날 만큼 의사표현을 분명하게 하는. 하마처럼 큰 입을 벌리고 목젖이 보이도록 핫핫핫, 웃는 모습을 보고는 마징가 제트같이 씩씩하고 당당한 걸 보니 뭔가 분명 대단한 스펙을 가진 여자로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뭘 믿고 그리 당당했는지.

사실은 당시 내 조건은 최악이었다. 인물도, 학벌도, 재산도, 직업도 뭐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 없는. 그런 쥐뿔도 없는 주제의 내가 당당하고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것은 남녀는 조건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게 없다고 해서, 상대가 가진 조건이 월등하게 낫다고 해서 나를 굽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도 나의 뜻을 존중했고,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수 있었다.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남녀관계는 수직이 아닌 수평에 놓여 있는 관계이다. 설사 어느 한쪽이 좀 기운다해도 잘 조절해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관계는 현재 어느 쪽에 놓여 있는가. 수직인가, 수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