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을 하루같이 직장에 도시락을 싸간다. 메뉴가 늘 같다. 김치에 밥. 그동안 한번도 지겹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쉽게 싸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김치와 밥만한 게 없으니. 샌드위치나 다른 것도 몇 번 가져갔으나 생긴 것처럼 촌스런 입맛을 가진 나는 김치와 밥이 최고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넘기는 게 힘이 드는 것이다. 먹어야 일을 하지, 할 수 없이  뜨거운 물에 말았더니 훨씬 넘기기가 쉬웠다. 그 뒤부터 늘 물에 말아서 밥을 먹었다. 어느 날  밥을 말기 위해 뜨거운 물을 받다가 세차게 머리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내가 늙어서 그렇구나 하는. 

주위 할배, 할매들이 늘 국물을 찾길래, 맨밥은 못 먹겠다고  한여름에도 뜨끈한 국물을 찾기에 아이고, 식성들도 참 촌스럽네 하고 흉을 봤더니 이제는 내가 그렇게 되었다! 맨밥을 못 먹게 되었다!

지난 달 가까운 사람의 생일잔치가  있었다. 명색이 남의 흥겨운 생일잔치인데 그냥 갈 수 있나. 퇴근하기 전 책상 위의 거울을 보면서 좀 찍어 발랐다. 일년에 한두번 쓸까말까한 파운데이션이랑 아이샤도우랑 립스틱이랑. 그리고  볼 연지도 했다. 정성껏 찍어바르고 매무새 점검하러 화장실갔다가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밝은 조명아래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 경극배우같았다. 정말로 가관이었다. 덕지덕지 발라진 분이 이마와 눈가에 패인 굵은 주름살 위에 고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화장도 팽팽한 얼굴에 해야지 나같이 처지고 늘어진 얼굴은 늙음을 더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으아, 하고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한동안 우울했다. 피해갈 수 없는 늙음에 대해 절망하느라.

그러다가  중앙일보 오피니언 난에서 ‘늙어서도 잘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이란 독자의 글을 읽었다. 젊어서는 잘 하던 거짓말도 잘 못하고 여자 꾀는 일도 잘 못하게 되어버렸지만(이 대목에서  K씨가 생각나서 많이 웃었다. 준수한 인물과 좋은 언변으로  과거가 무척 화려하던  K씨. 그가 말했다. 예전엔  예쁜 여자를 보면 어떻게든 수작 걸 연구부터 했었는데 지금은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잘 잊어버리고 잘 자서 참 다행이라는. 세상만사 다 잊고 죽어서도 잘 잘 수 있으니 얼마나 축복이냐는 글.

 글 쓴 독자는 무척 긍정적이고  편안한 마음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어떻게 늙음을 두고 좋은 점을 찾아 낼 생각을 먼저 했을까.

문득 작년 가을, 여느때와 같이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산책로에 걸으러 나갔다 본 한 노숙인이 생각났다. 숲속 벤치에 앉아 있던 여자 노숙인. 내 나이쯤 되었을까. 노숙을 오래했는지 카트에 실린 살림살이들이  주렁주렁 무척 많았다. 그녀의 행색은 누추하고 더러웠다. 목욕한지 몇달은 되었을 것 같은 머리와 몸에 일년은 빨지않았을 것 같은 때가 덕지덕지 묻은 넝마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울긋불긋 화장을, 화장을 하고 있었다. 빨간 립스틱에 시퍼런 샤도우를 바르고 있는 것이다. 눈썹도 까맣게 그린 것 같았다.

늙은 노숙자의 화장,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렇지만 한동안 그녀 얼굴이 충격으로 남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내가 그녀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화장할 생각은커녕 아마 늙어서 노숙을 까지 하게 된  처지를 비관해서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내가 낙관적인 사람이라고 자랑만 들입다 하면서 실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내 몸 곳곳에서 나타나는 늙음의 증상과 징조에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비관만 했었지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찾아 보면 늙어서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