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회 행사에 참석한 후 모두 밥을 먹는 자리였다.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한 노년 남자가 나를 유심히 지켜보는 것 같더니 말했다.

"이계숙씨라 하셨나요? 댁한테는 긍정적인 기운이 많이  있는 것 같네요"

나는 무척 놀랐다. 왜냐면 나는 그를 전혀 모르고 그 할아버지 역시 그날 나를 처음 본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걸 느꼈을까.

그 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나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고들 한다. 무슨 말을 하든 기분나빠하지 않고 항상 하하 호호 잘 웃어서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내 별명은 ‘여왕벌’이다. 베이 지역에 사는  P기자가 지어 준 거다. 여기 올라와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몇 번 만나보더니 내 하는 짓이 딱 여왕벌같다고.

여왕벌을 아무나 하나. 끊임없이 챙기고 주고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 열명, 스무명  불러다 밥 사고 술 사는  일은 지난 십여년동안  거의 다 내 몫이었다. 그중  J씨, K씨등 두어명이  참여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장소 정해 사람 불러모으는 일은 내 담당이었다.  

나란 인간이 참 어리석은 것이 그 일이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책무인 줄 알았다. 내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이 ‘헤쳐 모여’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보람도 있었고. 또한  나한테 카리스마와 보스 기질이 있다는 부추김에 우쭐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천지사방을 가리지 않고 그 일을 해온 거다. 또한 밥 사고 술 사는 정도의 형편은 얼마든지 되었으니까. 아이가 없어서 돈 드는 데가 없으니 경제사정이 그리 궁핍하지는 않은 것이다.  

지난 가을, 우울증인지 갱년기인지 만사가 귀찮아서 몇 달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그동안 의미있다고, 재미있다고 생각해온 것들이 다 시들하고 그저 그랬다. 마냥 늘어지고 의욕이 없고 허망한 생각이 들어서 나가기가 싫었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동굴에 마냥 처박혀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 인간들이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안 하니까  아무도 안 했다! 그동안은 하다못해  커피 한 잔 마시는 일도 내가 달려들어서 날짜, 시간, 장소를 정해 모두에게 연락을 했는데 내가 안 하니까 한 사람도 먼저 나서서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없는 거다! 내가 연락하면 모두 다 꾸역꾸역 모여들면서 말이다!  

그동안 두텁고 굳건하다고 믿었던 친분이란 것이 혼자만의 일방적인 착각이었을까.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갈등하다 결론을 내렸다. 불러 모아 먹이는 일을 그만 하기로. 내게는 숫자만  많았지 진실한 친구는 몇 명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사흘들이로 먹자 마시자 하던 내가 일절 연락을 끊자 그쪽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요즘 왜 그리 뜸해? 뭐 먹을 일 없어? 설마 나 빼놓고 너희들끼리만 모이는 건 아니겠지?"

내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먼저 한 번 불러모아보지, 왜 꼭 나만 해야 해?"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행동반경이 좁고 생활환경이 단조로와서인지 걸핏하면 삐친다. 그동안은 내가 양쪽을 왔다갔다하며 중재하고 화해시키려 노력했었다. 또한  누가 나로 인해 삐쳐 있다면 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먼저 사과하고 풀었었다.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개인감정보다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는 삐치면 삐치는대로 내버려 두련다. 그러다가 영영 못 보는 사이가 돼도 할 수 없는 일. 여왕벌, 이제는 그만 할란다. 이제부터는 내 실속 차릴란다. 내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한테만 투자하고 마음맞는 사람하고만 모여서 오손도손 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