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저스틴은.

하얀 천정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빙글거리며 돌던 그 천정이 위로 훌쩍 올라갔다가 다시 눈 앞으로 털썩 내려오는 것 같다.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으니 이번에는 토할 것 처럼 속이 머슥거린다. 할 수 없이 저스틴은 일어나 앉았다.

속이 텅 빈 것은 느껴지는데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냥 목은 좀 말랐다.

찬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은데 하고 저스틴은 생각했다.

냉장고까지 걸어 갈 기운이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일단 저스틴은 침대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기는 했지만 쓰러질 만큼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몸이 가뿐했다.

저스틴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마켓에서 파는 병물만 잔뜩 들어있는 냉장고 안. 저스틴은 물병 하나를 집어들고 숨도 안 쉬고 들이마셨다.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았던 빈속이 물을 받아들이며 요동을 치기시작했다.

단숨에 물 한병을 다 마신 저스틴.

저스틴은 다 마신 물병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물병 하나를 다시 집어 든채 거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무겁게 내려진 커튼을 약간 열었다. 커튼 뒤에 숨어 있던 햇살이 급하고 강하게 안으로 쳐들어왔다. 저스틴은 눈을 찌르는 햇살이 부담스러워 급하게 다시 커튼을 쳤다. 햇살이 맑고 투명한 걸로 보아 오전쯤인 것 같은데 지금 몇시나 되었을까.

그리고 오늘은 며칠일까. 며칠이나 앓아 누웠었던 것일까.

저스틴의 집에는 달력이 없다. 벽시계도 없다. 날짜나 시간을 알려면 휴대전화나 랩탑을 봐야 한다. 저스틴은 소파로 가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탁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휴대전화를 열었다.

월요일이었고 오전 11시 15분이었다.

몸이 아프다고 느낀 것은 목요일 오후부터였다. 비가 오기 시작한 것과 같이였다. 아침부터 찌푸트하게 잔뜩 흐려있던 날씨였는데 오후 서너시쯤에 들어서면서 바람불고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갑자기 온 몸에 열이 생기는 것 같았다. 머리가 돌덩이를 매단 듯 먹먹하게 무거워 오기 시작했고 등 쪽으로 으슬으슬 한기가 들며 추웠다. 또한 심하고 격한 운동을 한 것처럼 팔다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저스틴은 미진에게 뜨거운 커피 한잔을 부탁했고 그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어디가서 좀 쉬었으면 싶었다. 의자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라도. 아니면 차 뒷자석에서라도. 그러나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퇴근시간을 넘기면서 미적거리던 미진이 나가고 난 뒤에도 저스틴은 두어시간 일을 더 했다.

사무실을 나왔을 때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주차된 차로 가기 위해서 저스틴은 비를 맞아야 했는데 머리와 등으로 내려꽂히는 빗줄기가 송곳처럼 따갑고 아프다고 생각했다. 차에 올라탔을 때, 치아가 서로 맞부칠 정도로 몸 전체가 떨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마켓에서 10여분 걸리는 집에 도착했을 때,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이게 바로 몸살이라는 거로구나…..

여지껏 서른 몇살을 살면서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증상이었다. 커피나 차 말고 뭔가 뜨거운 것. 목구멍을 데일 듯 뜨거운 국물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국물을 먹으면 몸이 좀 괜찮아 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뜨거운 국물을 해다 줄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중국 여행중이다.

저스틴은 잠깐 미진을 떠올렸다. 그 여자는 가족들과 단란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저스틴은 온 부엌을 뒤져 찬장 구석에 굴러다니는 컵라면을 하나 찾아냈다. 그거라도 먹어야 살 것 같았다. 그는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부어 그 컵라면의 국물을 다 마셨다.

몸은 당장이라도 모래탑처럼 허물어질 것같았지만 샤워를 하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 수는 없는 일,저스틴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도 말리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나서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 그리고 오늘, 나흘동안을 정신없이 앓아누웠던 것이다.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낮이 오는지 밤이 가는지 모른채. 아, 금요일 오전 무렵 미진에게 이메일을 보냈던 것 같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 출근을 할 수 없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하기로 했던 회식. 지난 달 정선우와 같이 갔었던 이탈리아 식당에서 미진과 둘이 저녁을 먹기로 했었다. 출근을 안 했으니 당연히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미진이가 화가 안 났으려나….

출근할 수 없다는 이메일을 보내놓고 비몽사몽중에도 잠깐 염려를 했던 것 같다. 그런 일로 화를 낼 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염려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 저스틴은 마켓주소로 되어 있는 이메일을 열었다.

총 스물 몇개의 이메일 중에 미진의 이름을 골라내었다. 미진에게서는 세 통의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보내온 날짜는 금요일 아침 일찍, 그리고 오늘, 월요일이었다. 아침9시와 조금 전인 오전 11시.

-아이가 많이 아파서 오늘 출근을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쩌나요. 많이 편찮으세요? 사실은 저도 금요일에 출근을 못했답니다. 아이가 아파서요. 그래서 오늘도 못 나오십니까?-

- 금요일 하루종일 사무실을 비운 것 치고는 별 다른 일 없습니다. 아직도 몸이 안 좋으세요?-

그러니까 미진도 금요일에 일을 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저스틴이 출근하지 못한다고 보낸 이메일을 오늘 아침에야 확인한 것이다. 개인 이메일 주소는 당연히 몰라 마켓 이메일로 보냈으니.

저스틴도 미진도 출근하지 않았던 금요일. 마켓에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일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박 매니저가 벌써 연락을 취해왔겠지. 하긴 사흘동안이나 전화를 받지 못했으니. 어쩌면 급한 메세지가 잔뜩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미진이가 지금 아무 일 없다고 했지 않나.

저스틴은 전화 메세지를 확인하려다가 먼저 미진에게 이메일을 썼다.

오늘 하루 더 쉬고 내일 출근하겠습니다. 별다른 일이 없다니 다행이네요. 미진씨 아이 상태는 좀 괜찮아졌는지….

거기까지 쓰고 있는데 지금 금방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왔다. 저스틴은 쓰던 이메일을 저장하고 방금 들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 미진에게서 온 것이다.

- 뭘 좀 드셨나요? 몸은 좀 어떠세요?-

쓰던 이메일에다가 저스틴은 덧부친다.

-아니요.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나흘동안이나요. 지금도 죽을 만큼 아파요...혼자 있으니 더 아픈 것 같아요....-

갑자기 미진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저스틴이었다. 누군가에 기대고 싶다. 그 상대가 미진이었으면 좋겠다….

저스틴은 덧부친 문장을 읽어보았다. 유치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저스틴은 덧부친 문장을 지운다. 그리고 내일 출근할 거라는 내용이 간단하게 써진 이메일만 미진에게 보낸다.

몇개의 이메일과 전화메세지를 더 확인하고 저스틴은 소파에 길게 몸을 누였다. 앉아 있는 게 힘들었다.

며칠 아팠다고 앉아 있는 것 조차 힘이 들다니….

늙었나 보다. 아니다. 그동안 너무 무리를 했다……

아버지로부터 아시아나 마켓의 열쇠를 받아 든 지난 6개월동안 정말이지 쉴 새 없이 일했다. 그렇게 죽을 둥 살둥 일한 것은 형이 죽은 후 정상가동이 되지 않고 있던 아시아나 마켓을 다시 제 자리로 올려놓으려는 야심과 오기도 있었지만 ‘ 그레이스’를 머릿속으로부터 지우려는 몸부림이 더 컸다.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쭉 같은 클래스였던 여자였다. 첫눈에 사랑에 빠졌던 여자였다. 지난 10여년넘게 저스틴의 정신과 몸을 지배했던 여자였다.

그는 혼신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와 같이 동거할 때는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에 집에 오지도 않았었다. 단 한 순간도, 단 1분도 그녀와 떨어질 수 없었으므로.

아버지 어머니는 그레이스의 존재를 부인했다. 타인종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칠흙같이 긴 검은 머리카락과 비쩍 마른 몸이 어딘지 괴기스럽고 음흉해보인다는 바보같은 이유때문에.

신비스럽고 묘한 매력으로 저스틴에게 다가왔던 그레이스의 외모가 부모님에게는 배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 것이다.

그레이스와 함께라면 평생 부모님을 볼 수 없다해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날 그레이스가 떠나버렸다. 연로한 부모님을 뒤로 하고 춥고 어둡고 척박한 시애틀이란 도시에서 정부치고 살아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면서. 처음 미국에 올 때는 단순히 공부만 마치고 자기나라로 돌아가 려했었으나 저스틴을 만나는 바람에 늦어졌다면서.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라면서.

그 여자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저스틴이었다. 그레이스의 나라로 두번이나 날아가 애원과 협박과 읍소와 호소를 했다. 사랑한다고. 살려달라고. 돌아와 달라고. 그러나 그녀는 냉담했다. 사랑보다는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고 했다. 저스틴과 둘이 눈 맞추며 나눠마시는 와인도 좋지만 가족들과 어울려 떠들썩하게 마시는 와인이 더 좋다면서.

두번째 그리스에 가서 그레이스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자살까지도 생각했었던 저스틴이었다. 그 때 만약 형이 죽지 않았더라면 저스틴이 스스로 죽었을 터였다.

갑작스레 형이 사고로 죽었고 저스틴은 운영하던 커피집을 접고 이곳으로 와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만약 그레이스과 함께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터였다. 아버지 혼자서 마켓을 운영하든 말든. 말아 먹든 말든 전혀 관심조차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없는 그 도시에서 하늘에 머리를 두고 숨을 쉬고 산다는 게 견딜 수 없어졌다. 정상가의 반도 안 되는 헐값에 커피집과 살고 있던 콘도를 팔아치우고 이리로 날아왔다. 그리고 일에만 밤낮없이 매달렸던 것이다. 그레이스를 잊기 위해. 그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지금도 간간히 그레이스의 얼굴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처음처럼 힘들지는 않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맞았다. 단 육개월만에 그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던 실연의 흔적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사람의 감정이란 얼마나 간사한 것인가. 얼마나 믿을 수가 없는 것인가. 그레이스로 향하던 마음이 미진에게도 옮겨 간 것을 저스틴은 알게 된 것이다. 미진에게 가는 마음이 애정인지 그냥 단순한 관심인지 동정과 연민인지 저스틴도 잘 모른다.

늘 웃으며 명랑하려 애쓰지만 언뜻언뜻 춥고 쓸쓸한 얼굴이 보이는 미진이. 걱정과 근심이 얼굴에 떠날 날 없는 것같은 미진이.

그녀는 툭툭 농담도 잘하고 솔직하기도 하다. 아시아나의 전 직원들이 그녀를 좋아한다. 천성이 밝고 따뜻한 여자인 것 같지만 어깨에 얹힌 생계라는 무거운 짐이 그녀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정선우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정선우의 말이 아니더라도 저스틴은 미진의 전화통화 내용을 통해서 현재 그녀가 처해있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하루에도 두어번씩 미진은 집에다 전화를 한다.

미진의 맞은 편,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저스틴은 그 통화내용을 다 듣는다. 미진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지만 저스틴이 앉은 쪽에서 다 들리는 것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환하게 다. 그러나 저스틴은 짐짓 안 들리는 척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다. 무심한 척 컴퓨터 화면쪽으로 눈길을 주고 일에 몰입해 있는 척 한다.

딸아이들과 통화할 때는 미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목소리도 달콤하다.

지금 뭐하고들 있니? 점심은 잘 먹었니? 급식 메뉴는 뭐였는데? 오늘은 학교에서 뭐 배웠어? 니 친구 에밀리는 아프다더니 오늘은 학교에 나왔디? 언니는 뭐해? 아빠는 지금 뭐해? 숙제는 다 했니? 떡볶이와 만두가 먹고 싶다고?그래 엄마 퇴근하고 사갈께.엄마 집에 돌아갈 때까지 아빠 말씀 잘 듣고 잘 놀아야 해……

곰살맞게 속살거릴 때와는 달리 미진의 목소리가 날이 설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럴 때 저스틴은 알았다. 통화하고 있는 상대방이 미진의 남편이라는 것을. 그럴 때는 더욱 귀가 그쪽으로 모아지는 것을 저스틴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뭐라구? 지금까지 우체국에 가지 않았다구? 생신이 일 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선물을 부쳐야 하는데. 그래, 마음대로 해. 부치든지 말든지. 당신 어머니지 내 어머니야?”
“ 왜 아직 집에서 그러고 있는 거야? 애들 학교에 안 가볼 작정이야? 학부모 면담이라며! 그것마저 일을 빠지고 내가 가야겠어? 내가 다 해야 당신 직성이 풀리겠냐구!”

“렌트비 납부 마감 날이 오늘인 것 알지? 벌써 4시야 . 빨리 가서 내.한 시간 후면 오피스 문닫는단 말이야. 다섯시에 문 닫는 것 몰라? 오늘 내지 않으면 레잇 차지가 50불이란 것 몰라서 미적대고 있는 거야?! ”

미진의 그 남편이라는 사람은 뭘 부탁하면 제대로 실행을 하지 않는다. 미진이 남편에게 하는 부탁이란 대부분 생활을 꾸려나가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중요한 것들인데도 늘 미적거리거나 잊어먹는 것 같다.

남편과 전화통화를 하고난 미진은 일손을 멈추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 본다. 그렇지 않으면 커피나 티등을 끓일 수 있게 설치된 간이 휴게실이나 화장실로 몸을 감춘다. 저스틴은 알았다. 끓어오르는 짜증과 분노를 식히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을 것이다.

어떤 작자일까.

미진의 통화내용으로 봐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온종일 집에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가끔 외출을 하긴 하는 것 같은데 경제활동을 하러 나가는 것은 아니고 친구를 만나러. 그럴 때는 학교에서 파하고 돌아 온 아이 둘을 같은 아파트의 쟈시와 할머니라는 사람한테 얼마간의 돈을 주고 맡긴다. 미진은 빠듯한 살림에 과외로 나가는 그 돈이 아까와서 미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능하면 외출은 아이들 학교간 뒤 오전에나 하라고 남편에게 닥달을 하는 것 같은데 오전에는 밤에 못 잔 잠을 자야지, 그리고 오전에는 다들 일을 하는데 누가 자기를 만냐주냐고 미진의 속을 뒤집는 것 같다. 정말로 대책없는 남자다.

지난 달엔가는 한국에서 온 후배를 대접한다고 몇백불을 신용카드로 긁었다는 것을 미진의 통화내용으로 알았다. 우리 형편에 술값으로 몇백불이 뭐냐고 소리를 높히다가 끝내는 미진이 먼저 전화를 끊고는 고개숙이고 숨죽여 우는 것도 저스틴은 보았다.

가엾어라. 불쌍해라.

미진의 전화통화 내용을 들으면서 저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삶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진이 안타까왔다. 누구보다 명랑하고 착한 여자인데 생활에 지쳐서 피폐해가고 시들어가고 있는 것이.

공과금 낼 돈이 모자라거나 고물차의 수리비 때문에 동동거리거나 작년에도 입혔던 아이들의 외투가 작아져 못입는다고 미진이 속상해 할 때마다 저스틴은 얼마간의 돈이라도 조건없이 척 주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미진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고 미진의 갸날프고 여린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고 안아 주고 싶었다.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춰 주고 싶었다.

미진의 남편만 아니라면, 미진이 혼자 있는 여자라면 미진을 책임져주고 싶었다. 그녀의 어깨에 얹힌 짐을 내려주고 싶었다…….

마켓을 맡은 얼마 후 일괄적으로 전 직원들의 임금을 올려주었을 때 미진이 기뻐하던 모습을 저스틴은 기억한다.

그날 저스틴은 아랫층 마켓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다가 퇴근무렵에서야 사무실에 막 들어오는 길이었다. 열려 있는 출입문사이로 창가에 서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미진이 보였다. 저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날은 아이들도, 남편도 아니었다. 목소리가 곰살맞지도, 날이 뾰족하게 서거나 짜증이 묻어있지도 않았다.

“월급이 올랐어, 엄마.. 그것도 15%나! 다른 직원은 10%인데 우리 사무실 직원은 $15나 올려주셨어. 사무실 직원이라봐야 정 선생님과 나, 둘뿐이니까 그렇게 많이 올려주셨나 봐…..”

저스틴은 행여나 미진이 돌아볼새라 얼른 뒷걸음질로 몸을 숨겼다. 엄마로구나. 한국에 산다는 엄마. 칠순을 앞두고도 돈을 벌어야 하기에 노쇠한 몸을 이끌고 유산균 음료 배달을 한다는 미진의 엄마…

“예전 사장님이 영주권 스폰서도 잘 서주셔서 수월하게 영주권을 받게 되었잖아. 그 일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 그리고 지금 받고 있는 월급도 일에 비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새 사장님이 더 돈을 올려주셔서 미안하고 감사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어......”

저스틴이 뒤에서 듣고 있는 걸 전혀 알리가 없는 미진의 통화는 계속 되고 있었다.

“이제 아이들에게 털 부츠 한켤레씩을 사 줄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겨울이 코 앞인데도 여름 샌달을 신고 다녀서 애가 보통 탔어야지. 괜찮은 걸 사려면 두 켤레에 적어도 백불은 넘게 줘야 할 텐데……”

저스틴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급료를 좀 더 주길 잘했구나…..

“그래,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아파트 렌트비만 오르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

미진의 전화통화 내용을 훔쳐들으면서 저스틴은 가슴이 따뜻해져오는 걸 느꼈다. 넉넉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물질의 결핍을 모르고 자란 저스틴이었다.

15% 인상이라봤자 겨우 몇백불이다. 그 몇백불로 저렇게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구나. 털부츠로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미진에게는 답장이 없다.

답장을 기대할 이메일이 아니긴 하다. 그렇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저스틴이다.

그냥 으레적으로 해보는 안부, 직원이 상사인 자기에게 형식적으로 보낸 인사인’ 뭘 좀 드셨나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하는 두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저스틴.

원래 쓰려고 했었던 문장, ‘지금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 ‘아파 죽겠다’는 내용을 그냥 보냈으면 자신을 염려하는 답장이 왔으려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보내 볼까…..

저스틴은 소파에서 일어나 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워있으니 계속 몸이 땅으로 꺼지는 것처럼 잦아들어서.

일단 정신을 차려야지. 뭘 좀 먹어야지. 그러나 마음만 간절할 뿐 저스틴은 일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늪 같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만다.

저스틴이 눈을 다시 뜬 것은 ‘띵’ 하는 새 이메일 도착을 알리는 신호소리때문이었다.

커튼을 내려놓은 실내는 여전히 캄캄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저스틴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켰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 없는 텅빈 실내. 기역자로 놓여진 소파와 유리로 된 탁자와 책과 신문과 옷가지가 어지러이 흩어진 바닥과.

저스틴은 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세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얼른 일어나야지. 이대로 널부러져있다간 내일도 출근을 못하겠구나.

열은 완전히 가신 것 같고 몸살기도 없어졌으나 여전히 어지럽다. 그리고 나흘을 굶은 뱃속이 여전히 쓰라리고 아려왔다.

입맛은 완전히 간 것 같고 뭘 먹어도 모래를 씹을 것 같을 거였으나 마냥 굶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나가서 햄버거라도 먹어 속을 채워야 할 것이다.

저스틴은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을 훌훌 벗어내렸다. 그리고 바로 샤워실로 가서 뜨거운 물을 틀었다.

사흘동안 열에 들떠 흘러내린 땀으로 끈적끈적하던 몸을 뜨거운 물줄기에 한참동안 맡겼다. 정성들여 머리를 감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챙겨 입으면서 저스틴은 잠깐 생각했다. 입맛이 죽어도 없는데 꼭 억지로라도 뭘 먹어야 할 것인가, 그냥 집안에 남아 있을 것인가를.

굳이 밥을 먹지 않더라도 바깥 공기를 좀 쐬어야 할 것 같았다. 사흘동안이나 집안에 갖혀 있었으니 일단은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저스틴은 차 열쇠를 찾아 들었다. 그때 ‘딩동’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저스틴은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이 집에 찾아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집을 아는 사람도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밖에. 그러나 두 사람은 지금 중국에 가 있다.

집을 잘못찾은 사람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저스틴은 문을 열었다.

“!”

거짓말처럼 문밖에는 미진이 서 있다. 저스틴은 쓰러질 만큼 놀랐다.

와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정말로 이런 일이 생기다니!

밖에는 어제처럼 비가 오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비바람 냄새가 훅 들어와 저스틴의 코와 얼굴을 자극했다.

“괜찮으세요?”

미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스틴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몇번이나 머리에 떠오르던 여자아닌가. 그 여자가 소리소문없이 얼굴을 나타내다니. 놀랍다. 그리고 반갑다. 저스틴은 너무 기뻐서 미진을 껴안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반가움을 억누르느라 애써 무표정을 가장한다. 그리고 자기가 들어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뚝뚝한 소리로 말했다.

“웬일이요. 여기는 어떻게 알고?”

“조금전에 이메일 드렸었는데…..”

“………..”

“찾아 뵙겠다고….그 이메일을 아직 안 열어보셨나 봐요?”

“………..”

“박 매니저님한테서 집 위치를 알아냈어요”

박 매니저는 저스틴이 처음 이사와서 이 콘도를 구입하고 이사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박 매니저의 누나가 부동산 중개업을 한다고 했다. 인터넷을 뒤져 정보를 얻는 것도 좋지만 백만불 가까이 나가는 콘도를 사는데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고 경험많은 중개업자가 필요하다며 아버지가 소개시켜주었던 사람이이다.

“아무래도 뭘 좀 잡수셔야 할 것 같아서….”

그러고보니 미진의 손에 뭔가가 잔뜩 들려있다.

“일단은 들어와요”

저스틴은 미진의 손에 든 것을 받으며 몸을 비틀어 미진에게 들어올 수 있는 틈을 내 주었다.

“아니요. 저는 그냥 돌아갈께요. 콩나물 북어국과 전복죽이예요.주방 아줌마한테 부탁해서 만든 것인데…몸살에는 북어국이 최고인데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미진이 몸을 돌려 떠나갈 기색을 보인다.

“들어와요. 빨리, 당장 들어 와!”

무뚝뚝하던 얼굴 표정과 목소리를 풀면서 저스틴은 황급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미진이 그냥 그 자리에서 안녕히 계세요 하고 진짜 돌아가버릴 것만 같아서.

“들어오라니까”

조금 머뭇거리던 미진이 주춤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선다.

“가져왔으면 먹을 수 있도록 차려줄 생각도 해야지….”

수저로 떠먹을 힘도 없으니 떠먹여 주던지 하는 말은 차마 못하는 저스틴이다.

저스틴의 말에 미진의 행동이 빨라졌다. 이 어색하고 거북하고 불편한 공기가 떠도는 집안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안도심과 생동감이 보이는 동작이다.

5분도 안 되어 음식들이 차려졌고 저스틴은 식탁에 앉았다.

저스틴은 밥을 먹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북어국에 흰 쌀밥을 말아서. 입맛은 여전히 깔깔하지만 어쨌든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미진은 저스틴의 맞은 편에 앉아 간간히 반찬그릇을 앞으로 밀어주거나 냅킨을 챙겨주거나 물잔에 물을 더 따라 준다.

단 십분만에 밥을 다 먹어 치운 저스틴은 식탁에서 일어나면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야 살겠네…..”

그런 저스틴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내던 미진은 주섬주섬 그릇들을 다시 종이 봉투에다 싸기 시작했다.

“잠깐만 , 잠깐만 이리로 와서 앉아요”

저스틴은 소파에 가서 앉으며 미진에게 손짓했다. 왜요? 하는 표정으로 미진이 저스틴을 바라보았다.

“5분만 같이 있어 줘요”

저스틴의 간절한 표정으로 미진을 바라보았다. 미진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주춤거리며 소파쪽으로 걸어와서 저스틴과 멀리 떨어져 앉는다.

“그쪽 말고 이 쪽에. 내 옆에……”

미진이 다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저스틴의 옆에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와서 앉았다.

막상 미진이 옆에 와서 앉자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 저스틴이다. 할 말도 없고 할 일도 없어진 것이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침묵이 흐르자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실내로 들어온다. 추적거리는 봄비와 간간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움직임이 실내를 가득 채운다.

“비 많이 와요?”

“예… 조…조금….”

“언제부터 오기 시작했어요? 아침엔 해가 환하게 있는 것 같던데….”

“오후 1시쯤 부터..."

 

"고마와요, 와 줘서”

“………..”

당신이 오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쯤 배 고파서 쓰러졌을 거야…”

“예에….”

미진이 풉,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저스틴의 얼굴을 보며 미소짓는다. 미진의 미소를 보는 저스틴의 가슴에 환해진다.

저스틴은 미진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미진의 몸이 움찔했으나 저스틴의 손을 털어내지는 않았다.

저스틴은 미진의 머리를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어서 어깨와 등도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빗소리, 바람소리 참 좋네요….”

“……….”

“당신과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도….”

말이 없는 미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