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남자한테서 그렇게 깨끗한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미진은 처음 알았다. 아버지한테서 늘 풍겨오던 술 냄새가 아닌, 창민에게 가까이 가면 맡을 수 있는 담배 냄새가 아닌, 솔나무향 같기도 하고 바다향 같기도 하고 갓 따라놓은 사이다에서 나오는 시원한 냄새.

몸과 마음이 불안하고 편치 않은 와중에서도 미진은 그 냄새를 더욱 많이 흡입하기 위해 코를 벌름거렸다.

좋은 냄새는 저스틴의 몸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저스틴이 살고 있는 집안에서도 났다. 뭐랄까. 새로 지은 집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신선하고 상쾌한 냄새. 꿉꿉하고 텁텁하고 눅눅한, 그래서 그 불쾌함에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미진의 집과는 완전히 다른 냄새를 그 집에서는 맡을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냄새마저도 차원이 다르구나…..

콘도 단지에 진입했었을 때, 그리고 처음 그 집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미진이 느낀 것은 이질감이었다. 미진이 사는 아파트와는 비교도 안 될 것 같았다. 까만색 대리석 바닥으로 마감된 저스틴의 집에는 필요한 가구 외엔 일체 놓여있지 않았다. 간결했으나 고급스러웠다. 생활의 찌든 때가 전혀 없었다.

낡고 헤지고 여기저기 얼룩이 묻고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 곤궁함을 말해주는 소파랑 가구, 그리고 곧 시커먼 벌레들이 떼를 지어 스물스물 기어나올 것만 같은 오래된 카페트가 깔린 미진의 집안과는 달랐다.

당연히 다르지. 사는 수준이 다른데…

미진은 자조하듯 입속으로 중얼거렸었다.

저스틴과 식탁에 같이 앉았을 때, 그래서 냄새마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미진은 다시 한번 경각심을 느꼈다.

진짜 이 남자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남자로구나….. 아무리 억지로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로구나….

미진의 마음이 담담해졌다. 정리가 되었달까. 나무 높이 매달려 있는 포도를 따보려고 갖은 애를 쓰다가 끝내는 손에 넣지 못하고 ‘저 포도는 시다’고 돌아서는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그 여우처럼 미진의 마음도 체념이라는 단어와 함께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이다.

뭐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여고생이 잘생긴 음악선생님을 좋아할 때 뭐를 어떻게 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막연히, 그저 막연하게 좋아한다. 미진도 그런 마음이었다. 사실 저스틴은 우중충한 미진의 생활에 한 줄기 햇볕이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기대도 없이 날 밝으니 일하고 해가 지니 집에 들어가고 아이들 배고프다하니 음식을 만들고 렌트비 낼 날짜가 다가왔으니 체크를 쓰는 생활. 은행잔고를 시시각각 확인해야 하는 생활, 기쁠 것도 없고 재미있을 것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떼워가는 무의미한 생활. 그런 무미건조한 생활에 저스틴이란 아름다운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때부터 미진의 생활에 활력이 생겼다. 그 활력이란 다름이 아니다. 그 아름다운 남자와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할 수 있고 비록 업무에 관련된 것 뿐이긴 하지만 얘기를 할 수 있고 틈틈히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날이 갈수록 욕심이 났다. 그 욕심이란 어찌보면 아주 소박한 것일 수도 있고 어찌보면 가당찮은 것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무실이 아닌 공간에서 둘이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업무가 아닌 다른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파란 하늘을 얘기하고 출근길에 본 벚꽃망울을 얘기하고 학창시절에 인상깊게 읽은 책과 감명깊게 본 영화와 좋아하는 예술가를 얘기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리고 그의 튼튼한 어깨에 머리를 기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둘이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왔다. 아니, 미진이 그 기회를 만들었다고 해야 옳겠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 마자 확인한 이메일에서 저스틴이 금요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못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월요일인 오늘까지도 앓아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방 아줌마에게 부탁해 먹을 것이라도 만들어다 주어야 한단 생각이 든 것은 밀린 업무를 대충 처리한 오후였다. 미진은 박 매니저한테 우선 전화를 했다. 저스틴이 사는 곳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니까.

“뭐라고? 새 사장님이 아프다고? 며칠 매장에서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이상하다 생각했었네. 내가 알고 있기로 사장님 부부도 지금 외국여행 중인데 그 친구 뭐라도 먹고 누워있는지 모르겠군. 그래, 잘 생각했어. 서둘러요. 뭐라도 입에 넘길 수 있는 걸 만들어다 갖다 줘. 주방에 한씨 아줌마가 저스틴의 식성을 잘 알 거야. 그 친구, 미국에서 자란 사람치고 매운 음식을 꽤 좋아한다나 봐”

박 매니저가 이른대로 주방에 내려가서 저스틴에 갖다 줄 음식을 부탁해놓고 미진은 화장실에 가서 오랜 시간 정성들여 양치질을 했다. 양치하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미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집에 가면서 양치질을 하는 것은 뭔가를 염두에 둔 행동아닌가. 키스라도 기대하는 것인가.…..

스스로를 책망했지만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화장을 다시하고 옷 매무새를 고치고 앞뒤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마냥 설레는 것을.

비오는 오후, 은밀히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집에 가는 것이, 며칠 보지못한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마냥 기쁜 것을.

음식을 차에 싣고 빗속을 운전해가면서 미진은 가슴이 행복감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슷비슷한 건물이라 조금 헤매다가 마침내 저스틴의 집 문 앞에 섰을 때 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왔구나, 저스틴의 집에. 조금 있으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구나....

미진은 심호흡을 한 뒤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저스틴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웬일이요, 여기는?

거기서 미진의 행복감은 단번에 깨어졌다. 민망하고 당황스럽고 무참한 기분이 미진을 휩쌌다.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이 남자는 내게 손톱만큼의 아무 감정도 없는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나.….

유리조각같이 날카로운 아픔이 가슴을 찌르는 걸 느끼면서 미진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핑 도는 걸 감추려고.

미진은 음식꾸러미를 내밀었고 저스틴이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미진은 돌아섰다. 얼른 돌아가야지. 괜히 왔다. 정말 괜히 왔다…….

그러나 미진이 돌아서는 것을 보자 저스틴의 태도가 돌변했다. 허둥지둥거리며 미진을 잡아 끌듯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던 것이다.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마주 앉았을 때 저스틴은 다정한 눈길과 다정한 목소리로 미진을 대했다.

미진은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래, 지금까지 해왔던 것 처럼 아둥바둥 살아야지. 돈 1불에도 벌벌 떨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처음부터 끝까지 나란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진 것인데. 잠시 허황된 꿈에 빠져 있었구나. 이제는 흔들리지 말아야지. 헛된 생각하지 말아야지…..

저스틴의 집안에 발을 들여놓고 밥을 먹는 그 짧은 순간, 20여분도 되지 않는 그 순간에 미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마치 헝크러진 실타래 같이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미진이 한가지 분명하게 정리한 것은 저스틴은 감히 쳐다 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밥을 다 먹은 저스틴은 5분만 더 있다 가요, 하고 미진을 잡았다. 그것도 모자라 가까이 앉으라고 했다. 미진은 조금전에 한 결심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나와 이 남자는 차원이 다르다. 이제부터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스틴이 아주 귀하고 소중한 물체를 다루듯 부드럽고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미진의 머리와 등을 어루만지고 쓰다듬기 시작하자 저스틴의 말 한 마디에 동작 하나에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던 미진의 결심은 금방 허물어져 내렸다.

미진의 가슴이 기쁨으로 와랑와랑 뛰기시작했다.

아, 이게 아닌데…..

너무 편하고 행복해서 눈이 스르르 감기려 했다. 미진은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떴다. 그리고 말했다. 최대한의 단호함을 담아서.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요……”

미진의 말에 저스틴이 동작을 멈추었고 미진을 바라보았다.

“5분 벌써 지났잖아요…..”

저스틴이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뇨, 아직 3분밖에 안 됐어요”

“그래도…..”

미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가야겠어요”

“그래요, 그럼….”

할 수 없다는 듯 저스틴도 미진을 따라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미진을 더 잡아 놓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미진은 저스틴의 얼굴을 외면했다. 안타깝기는 미진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헛된 생각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은 벌써 저만치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남몰래 염원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는데.

비 내리는 오후, 빗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방안에 감히 손 내밀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남자와 단둘이 되었는데.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 그의 향긋한 어깨에 기대어 그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커피를 마시고 싶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또 올까. 조각같이 잘 생긴 이 아름다운 남자와 단 둘이서 커피를 마실 기회가 다시 생길까......

미진의 가슴에는 좋아하는 남자와 시간을 좀 더 보낼 수 없는 데에 대한 서글픔만 가득해진다. 그러나 서글픔보다 양심이 더 컸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양심이 미진을 일어서게 한 것이다. 마음 가는대로 감정이 시키는대로 하면 안 된다는 양심이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미진은 음식 그릇이 담긴 종이봉투와 핸드백을 챙겨들었다.

“몸조리 잘 하세요. 내일 뵐께요……”

미진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했다. 저스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는 미진을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

현관문이 닫히고 비오는 바깥에 발을 디뎠을 때 미진이 처음 한 것은 큰 심호흡이었다. 미진함과 아쉬움, 그리고 미련. 돌아서는 자신을 잡아주었으면 하는. 저스틴이 강력하게 미진의 옷자락을 잡았으면 그녀는 도로 주저앉았을까?

미진은 그릇이 담긴 종이봉투를 조수석에 던져넣으면서 혼자 피식 웃었다. 행여라도 저스틴이 어떤 예기치않은 행동을 할까봐 잔뜩 얼어있었으면서, 그래서 긴장으로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었으면서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자 서운한 마음이 든다.

미진은 자기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저스틴의 자신에 대한 마음 역시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보면 여자로 대하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그냥 단순한 부하직원이고. 아까 자신을 쓰다듬는 행동이나 지난 번 식당에 갔을 때 했던 발언등으로 미루어 볼때 절대 부하직원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어찌 할 것인가. 여자로 생각한들 어찌할 것인가.

미진은 결혼한 여자고 아이가 둘이나 딸린 여자고 신분이 너무나 다른 여자고.

미진이 싱글이라도 쳐도 저스틴과 맺어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험준하고 가파른 산이 수십개인데 뭘 어쩌자구…

미진은 흐흐흐 하고 웃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 죽었다가 깨어나 다시 죽어 열번을 깨어난다 해도 저스틴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이라. 저스틴과 미진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 이것이 사랑인가……

미진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변변한 사랑을 해보지 못했기에 그렇다. 철이들자마자 엄마를 돕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음식점 웨이트레스, 과외, 화장품 외판, 휴대폰 외판, 백화점 점원 등등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미진이가 섭렵한 아르바이트는 적어도 스물 몇개다. 생활비를 벌어야했고 학비를 벌어야했다. 미진 본인은 장학금을 받았다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동생의 등록금과 그 아이의 학교에 들어가는 모든 경비는 미진이 책임져야 했다.

사랑도 시간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콩 튀듯 팥 튀듯 분을 쪼개어 쓰는 그런 생활에 사랑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남자와 시간을 보내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사랑이 어떤 것일까.

책에서, 영화에서, 연속극에서 본 것처럼 상대방 생각이 하루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그의 숨결을 늘 가까이 느끼고 싶고 막상 같이 있는 기회가 오면 호흡이 가쁘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쓰러질 듯 몽롱한 상태가되는 것, 그런 것일까.같이 있어도 아쉽고 소유하고 싶은 그런 마음일까.

미진은 비 오는 거리를 천천히 운전하며 골똘이 생각에 잠긴다.

창민을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창민하고는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많이 편안하기는 했었지만.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것, 편안한 것, 그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그러면 저스틴과는?

저스틴과 늘 같이 있다. 한 사무실에서. 고개들 들면 그 자리에 항상 같은 자세로, 그러니까 컴퓨터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세로 저스틴이 앉아 있다.

대부분은 정선우와 셋이 있지만 정선우가 외근을 하거나 요즘처럼 한국가서 자리를 비웠을 때 저스틴과 단 둘이다.

그러나 호흡이 가쁘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쓰러질 듯 하지는 않았었다.

딱딱한 사무실 분위기 탓일까. 아니다. 저스틴의 태도 탓이다. 냉랭하고 건조하고 사무적인. 저스틴은 사무실에서 업무에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 사람이다. 전혀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방금전 아무도 없는 집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 신중하기는 했지만, 머리와 등을 어루만지고 쓸어주는 것 외엔 다른 행동을 하지 않긴 했지만, 그의 태도는 분명히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였다. 그는 미진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아, 모르겠다…..

아시아나마켓 건물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하자 미진은 속력을 내면서 낮게 부르짖었다.

정말로 모르겠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저스틴의 마음이야….

누구 믿을 만한 사람이 한명 있었으면 좋겠다.

사회에서 용납하지 않는 관계다. 결혼한 여자에다 더구나 상사에다.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탓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같이 흥분해 주고 안타까와 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털어놓고 싶다. 그러면 좀 홀가분해질 것 같다.

그 사람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알아내고 싶다. 자신이 저스틴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창민과 다르게 냉철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남자에게로 향하는 단순한 동경과 존경인지 알아내고 싶다.

차를 대면서 미진은 유현오를 잠깐 생각했다. 그 남자라면 마음놓고 하소연할 수도 있겠다. 그 남자라면 묵묵히 미진의 하소연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해답까지 내려줄 수 있을까.

맞네. 니네들 둘이 지금 하고 있는 게 사랑맞네, 하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사랑맞으니 지금부터 열심히 사랑 한 번 해봐라 하고 말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조심해요. 그 남자라면, 유현오 그 남자라면 어쩌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요. 상처받지 않게 조심해요…….

비는 여전히 오고 있다. 올 봄에는 왜 이렇게 비가 흔할까.

비워놓았던 사무실은 여전히 적막하다. 미진은 잠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커피 한잔을, 아까 저스틴의 집에서 그렇게 간절하게 원했던 커피를 한 잔 마셔야지.

일단은 박 매니저한테 보고를 해야 한다. 잘 다녀왔다고 얘기하고 저스틴의 상태를 얘기해줘야 한다.

미진은 박 매니저에게 전화를 하고 컴퓨터를 다시 켜놓고 물을 끊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벨이 울린 건 그때였다.

“나요…”

저스틴이다. 잠시 진정되었던 미진의 가슴이 다시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한다.

“예에…..”

“잘 도착했나 하고요”

“예에…..”

“비도 많이 오는데 걱정 되어서…..”

“무사히 잘 왔습니다”

그 뿐, 전화기 저쪽에서는 말이 없다. 위잉, 하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미진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먼저 전화를 끊지는 못한다.

“미진씨…..”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저스틴이 미진을 불렀다.

“여기 당신의 향기가 아직 남아 있어요….”

향기라. 미진은 향수를 쓰지 않는다. 내 향기는 어떤 것일까.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미진이다. 그러나 조금 무안한 심정이 되었다. 자신한테서 나는 냄새는 별로 좋을 것 같지가 않다는 부끄러움에서. 싸구려 샴푸향에 싸구려 비누향일 텐데....

그러나 미진은 저스틴의 말이 기쁘고 반가왔다. 조금전에 자기도 이 남자의 냄새를 느끼지 않았던가. 어쨌든 둘은 서로의 향기를 느낀 것이다.

“당신이 가버리고 난 뒤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요?”

잠시 쉬었다가 저스틴이 말했다.

“이 방안이 참 춥구나……..”

이 방안이 참 춥구나, 하는 저스틴의 말을 미진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예에?추워요? 하고 반문했다. 미진은 말 할 뻔했다. 사실 춥긴 춥네요. 비가 와서 그런지 여기 사무실안 공기도 을씨년스럽고 냉랭한 것 같아요. 습기도 많은 것 같고. 아무래도 히터를 좀 틀어야 할까봐요. 그러지말고 사장님도 히터를 트세요. 몸살나셨으니 뜨듯하게 지내야 하는데….

그러나 연이어 나온 저스틴의 말이 미진의 말을 막았다.

“그동안 한번도 춥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지난 겨울에도 히터 한번 틀지않고 살았는데...... 미진씨가 돌아가고 난 뒤 갑자기 방안이 시베리아 벌판처럼 춥고 쓸쓸해졌어요………”

아, 이 남자. 이 남자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이 남자가 말하는 건 추위에 관한 것인가, 애정고백인가.

미진은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저스틴의 말을 듣는다.

“당신이 닫은 현관문을 한참동안 노려보았지요. 좀 더 있다 가라고 잡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요. 당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았다면 다시 돌아오라고 전화했을지도 몰라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당신 전화번호를 모르죠…… "

저스틴의 말에 미진은 안개가 확 걷히는 것을 느꼈다. 안개속을 걷는 것처럼 모호하던 모든 사물들이 확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저스틴은 저스틴은 미진을 좋아하는 것이다. 단순한 부하직원이 아닌 여자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미진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고백. 사랑합니다 좋아합니다 하는 분명하고 확실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런 표현보다 더욱 강렬한 , 당신이 없으니까 춥다….

“그냥 내 마음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미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얘기해 줘서 고마와요. 저 역시 그래요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미진은 묻고 싶었다. 그래서…그래서…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

기대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춥고 황량한 벌판에서 혼자 있는 것 같은데.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질 것 같은데. 안간힘을 쓰며 억지로 버티고 있는데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한 것을 알았다.

지난 목요일 저녁.

쟈시와 할머니네 아이들을 데리러 갔을 때 평소와는 다르게 소파에 누워있는 제이를 발견했다. 춥고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이마를 집어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아니, 할머니. 아이가 이렇게 열이 많은데 왜 전화 안 하셨어요!?”

미진은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할머니는 시큰둥했다.

“조금전까지만해도 아무런 증상이 없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열이 생기네?”

그까짓 열은 좀 쉬면 내릴 건데 뭔 수선을 피울 게 있냐고 할머니가 말했다.

하긴 전화를 받았다해도 금방 달려나올 수가 없었을 터였다. 차도 없지. 비도 오지. 더구나 입고 있던 바지엔 얼룩덜룩 핏물이 들어있었지. 그런 꼴을 하고 대낮에 전철을 탈 수가 없었지 않은가.

미진은 제이를 들쳐업고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침대에 누였다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도리질을 하는 아이를 일으켜서 아침에 남은 미역국에 말은 밥을 억지로 두어숟가락 먹였다. 그리고나서 몸을 짚어보니 아까보다 더 열이 치솟아 있는 것 같았다. 불덩어리 같았다. 겁이 더럭 났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미진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창민은 없다. 미진이 필요로 할 때 창민은 항상 없었다. 미진은 핸드폰을 케이에게 주며 시켰다. 아빠에게 빨리 전화하라고. 제이가 많이 아프니까 가능하면 얼른 집으로 돌아오라 하라고.

아무래도 병원에 데리고 가야할 것 같다.….밤이다.….차가 없다.

케이가 말했다. 아빠 전화 안 받아. 전화기가 꺼져 있는 것 같아, 엄마.

미진이 꽥 소리 질렀다. 또 해 봐! 1분 간격으로! 받을 때까지 해 봐!

아이를 발가벗긴후 차가운 물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구석구석 닦였다. 집에는 그 흔한 해열제 한 알도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해 진작 사다 놓았어야 하는데.

열에 들떠 정신을 잃었는지 아이는 눈을 감고 있다. 그러나 아이의 입에서 헛소리까지 간간히 흘러 나온다. 아무래도 심상찮다. 응급차를 불러야 하나? 거기서 미진은 망설였다. 응급차를 불렀을 경우 지불하게 될 경비 200불이 먼저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2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제이가 아무 이유없이 아팠다. 오늘같이 열이 백도 가까이 올랐다. 그때도 창민이 차를 가져나가고 없었다. 놀라고 경황이 없는 김에 응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중에 200불짜리 응급차 사용료 청구서를 받았다. 당연히 가지고 있는 의료보험으로 커버될 줄 알았던 미진. 의료보험 회사에 전화했더니 ‘목숨이 경각에 달리지 않은 상황에서 응급차를 이용했을 경우에는 그에 따른 비용을 본인 내야한다'는 대답이었다.그러니까 담당의사가 환자의 상태가 응급차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진단을 내려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보험회사가 커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이 백도가 넘는데 그게 응급상황이지 어떤 게 응급상황인가.

미진이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냉랭했다. 고객이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콜렉션에 넘기게 될 겁니다.

200불…200불….

송곳꽂을 틈 하나 없는 빠듯한 살림이다. 200불이 뭉텅 빠져나가면 곤란하다.

미진은 앞집으로 뛰어갔다. 어린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집이니 뭐가 있어도 있을 듯 싶었다. 미진의 짐작대로 그 집에는 어린이용 해열제가 있었다.

해열제를 먹이고 계속 찬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기를 몇 시간. 가까스로 열은 진정되었다. 그리고 제이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아픈 언니와 정신없는 엄마를 지켜보며 안절부절 못하던 케이도 제이 옆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미친년처럼 휘돌아쳐야 했던 미진.

젖은 자루처럼 식탁의자에 스르르 앉았을 때 그녀는 참담했다. 아이의 안전보다 응급차 사용료 지불할 게 아깝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려야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렸다.

내가 엄마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

돈이라는 게 사람을 황폐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줄 어릴 때부터 수없이 겪어 알고 있었지만 자식을 두고도 그렇게 될 줄을 몰랐다. 자식의 안전보다 돈이 우선일 줄 몰랐다.

미진은 식탁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리고 자신이 불쌍해서.

11시가 가까와서 들어온 창민. 그의 멀쩡한 모습에, 제이가 아프다는 걸 모르니까 당연히 멀쩡했겠지만 미진은 화조차 나지 않는 자신에 놀랐다. 그냥 담담했다. 물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다.

창민의 얼굴을쳐다보면서 미진은 생각했다.

저 남자가 이 풍진 세상을 같이 헤쳐나갈 동반자 맞나. 아닌 것 같은데. 예나 지금이나 혼자 죽을둥 살둥 기를 쓰고 저 남자는 그저 방관자인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왜 저 남자와 살고 있을까.

“미진…….”

전화기 속에서 저스틴이 말했다.

“금방 당신의 얼굴을 보았었는데…그랬었는데 당신이 또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