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혼 불 7. 건너서는 안 되는
이계숙 (minky1)
2014-11-15 07:09:46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창민이 잠깐 말을 끊고 여름이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이 매우 그윽하고 자애로웠다. 하얀 털이 북실북실한 어린 강아지를 바라보는 듯, 사랑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오늘 밤 여름이가 유난히 귀엽네요. 특히 팔 부분, 여름이는 팔이 아주 환상적으로 예쁜 아가씨예요”
여름이는 무릎까지 오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흑장미같은 진빨간색 원피스. 원피스위에 까만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는데 식당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그것을 벗었다. 양 팔이 드러났다. 여름이의 팔은 유난히도 눈부시게 매끄럽고 하얬다. 지난 겨울 내내 햇볕 한번 보지 못하고 두꺼운 옷에 가려져 있어서 그런지.
창민은 여름이의 두 팔이 갓뽑아 놓은 가래떡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희고 통통한 가래떡같은 여름이의 두 팔. 창민의 가슴이 뛰었다. 너의 두 팔, 이뻐. 참 이뻐. 아니야 팔만 이쁜 게 아니라 다 이뻐.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 하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창민은 참았었다. 여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두려워서. 늙다리 아저씨가 작업건다고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하는 우려때문에.
그러나 술이 한잔 들어가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여름이가 방심을 푸는 듯한 기색이 보이자 창민은 조금 대담해졌다.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 말을 입밖으로 내고 말았다. 창민의 말에 여름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흐흣,하고 입을 약간 벌리고 웃었을 뿐. 색깔없는 립스틱이 발라진 입술 사이로 하얗고 쪽 고른 이가 보였다. 창민의 가슴이 다시 뛰었다. 이 아이는 치아마저도 백옥같구나…..
“커피 마실래요? 아님 아이스크림이라도?”
창민은 거의 비어진 여름이의 접시와 술잔을 보면서 말했다. 흘낏 손목시계를 보니 아홉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온 지 어느덧 두 시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식사는 거의 끝났다. 이제 후식을 먹을 차례다. 그리고 다음 차례는. 다음 차례는 여름이와 혜어지는 일.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일.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싶은데요”
여름이가 눈에 웃음을 가득 담으면서 물었다.
“한 잔 더 시켜도 괜찮죠? ”
물론이지,하고 시원스레 창민은 대답했다.
“한 잔이 아니라 열 잔이라도 괜찮아요. 아니 스무 잔이라도”
까짓거, 하는 투로 창민은 대답했지만 사실은 괜찮치가 않다. 한 잔 아니라 열잔이라도, 하고 호기롭게 대답을 하는 순간 미진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창민과 여름이가 앉아 있는 식당은 이 지역내에서 가장 특급이라 일컫는 ‘판도라 호텔’의 55층 꼭대기였다. 벽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있어 시내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전망을 가진 곳이라 예약을 하지 않으면 몇시간을 기다려야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이었다.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은 혼잡을 피하기 위해 아예 예약 손님만 받는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음식값이 만만찮은 곳이기도 했다.
창민의 마음이 불안해졌다.두어시간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먹고 마신 저녁값만 해도 꽤 될 터였다. 그런데 여름이는 술을 더 마시려 한다. 창민에게 더 부담을 주려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술값이 비싸니 그만 마시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웨이터를 불러 여름이가 원하는 술을 한 잔 더 시키면서 창민은 한끼 밥값으로 뭉텅 돈이 빠져나간 흔적을 발견하면 길길이 뛸 미진을 어떻게 납득 시킬 것인가를 궁리했다.
‘어쩔수가 없네. 거짓말을 시킬 수 밖에. 신문사 편집부 직원 전원을 몽땅 대접했다고 거짓말을 시켜야겠다……’
신문사 직원들 저녁을 산다고만 했지 몇명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엄밀히 따지고보면 완전히 맹탕인 거짓말은 아니다. 여름이도 신문사 직원은 직원이니까. 그러나 가까운 시일내에 편집국장에게도 저녁대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창민의 마음은 다시 불안해졌다. 분명히 미진이 의아해 할 것이니까. 왜 두번씩이나 향응을 제공하냐고 따져 물을 것이다.
편집국장을 모른 척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창민은 생각했다. 조촐하게라도 성의표시를 해야 한다. 어쨌든 창민에게 한울 신문의 논설위원이란 거창한 자리를 제공한 사람아닌가. 신문사내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창민을 그 자리에 앉히는 걸 강행했다고 했다. 절대 모른 척하면 안 된다. 이 달말에 첫 월급이 나온다니까 그때 하다못해 점심이라도 대접해야 할 텐데…..
처음엔 편집국장을 비롯해 편집국 직원들 모두를 생각하긴 했었다. 열댓명 된다고 했다. 그냥 신문사와 가까운 한국식당에다 초대를 해서 저녁대접을 해야지하고. 그러나 창민은 마음이 바뀌었다. 열댓명을 다 불러서 밥을 먹이려면 경비가 어마어마 하게 들 테니까. 그래서 그냥 여름이와 편집국장에게만 하는 것으로.그래서 오늘 여름이와 먼저 단 둘이 식사를 하러 나온 것이다. 둘이 있는 것을 그 누가 본다해도 분명한 명분이 있기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여름이는 창민과 직접 연관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문예작품 모집에 응모작이 들어오는 대로 창민에게 보내고 또 창민은 그걸 심사해 결과를 내서 다시 여름이에게 보내는 일을 하고 있지않은가 말이다.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밥 한번 샀다고 한들 누가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인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자 여름이는 망설이지 않고 응했다. 그러나 여름이는 말했다. 대신 장소는 제가 정할께요.
여름이가 정한 장소, 메인 디쉬 하나에 50불이 넘는 ‘판도라 호텔’ 식당에 와 있는 것이다.날라져 온 술을 핥듯이 조금씩 마시고 있는 여름이를 보면서 창민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창민에게는 미진이가 모르는 신용카드가 한 장 있었다. 급할 때, 아주 급할 때나 쓰는. 미진이가 알면 폭포같은 잔소리를 쏟을 지출이 있을 때 몰래 쓰는 신용카드였다. 그 지출이란 게 거의 후배들 선배들 친구들 술값 내는 것이긴 하지만.
창민은 생각했다.일단은 오늘 저녁값을 이 신용카드로 지불하고 난 뒤 나중에 두세번으로 나누어 갚아 나갈까.우편물을 확인하는 사람은 창민이다. 집에 항상 있는지라 그렇다. 3년 넘게 이 신용카드를 쓰고 있지만 여지껏 딱 한번 빼고 미진에게 들켜본 적 없었다. 지난 여름, 한국에서 온 후배들을 대접하느라 호기롭게 룸살롱으로 데리고 가서 천불 가까이를 긁었다. 그 술값을 몇달에 걸쳐 조금씩 갚고 있다가 미진에게 들키고 말핬다. 신용카드 명세서가 오면 잘게 잘라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데 어쩌다가 그냥 서류더미 위에 올려놓았다가 미진의 눈에 뜨이고 만 것이다.
명세서에는 갚을 금액이 4백여불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미진에게는 그 4백여불이 전부라고 거짓말을 시켰었다. 4백여불가지고도 미친 듯 날뛰었었는데 사실은 천여불에서 갚고 남은 금액이라는 걸 알았다면 미진은 아마 기절을 했을지도 몰랐다.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고 위기를 모면했었는데 분이 안 풀렸는지 직장에 가서 다시 전화를 해서는 울고불며 난리를 쳤었다. 지난번 같은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 밥값 낸 것도 감쪽같을 수도 있을 터였다. 신문사에서 받는 월급이 천불 정도 된다니까 첫 월급을 타면 일단 이 카드값을 일부분 갚고….
신문사에서 나오는 월급의 액수를 미진에게 말 안 해주길 천만다행이라고 창민은 생각했다. ‘한울 신문사의 논설위원과 심사위원’이라는 명예직이라고 말해두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냥 교통비 정도만 지불하는.
처음에는 기쁜 마음에 미진에게 이실직고를 할 생각이었다. 한달에 천불정도를 벌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하면 미진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아파트 렌트비 낼 날짜가 다가올 때마다 은행잔고를 생각하며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면서 우울이 더께처럼 내려앉은 얼굴에 간만에 미소를 피어 올릴 것이다. 그러나 가만 생각하니 그렇게되면 용돈이 없게 된다는 생각이 창민의 머리를 스쳤다. 비록 신문사에 출근은 하지 않지만 명색이 한울 신문사의 논설위원과 심사위원 아닌가. 사람도 만나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가 주머니가 넉넉해야 어디가서라도 기를 펼 수 있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미진이었다. 친구들과 만나 술 먹고 밥 먹고 차 마시고 담배 사 피우는 돈을 끔찍하게 아까와하는 미진이었다. 자기는 반찬냄새때문에 같이 사무실 쓰는 사람들에게 죽을 듯이 미안해 하면서도 꼬박꼬박 도시락을 싸다니며 절약하려고 발버등을 치는데 술 값이 뭐고 커피 값이 뭐고 담배 값이 뭐냐고 틈만 나면 잔소리를 해대는 미진인 것이다.여자가 그렇게 돈에 지독하고 극성맞으니 내가 이렇게 점점 쪼잔해지지. 어떻게 하지. 오늘 저녁 신문사 사람들 밥을 산다는 것을 미진이 알고 있으니 그냥 공동으로 쓰는 데빗 카드로 지불해버릴까, 아니면 미진이 모르는 카드로 할까. 공동데빗카드로 긁었다가 이렇게 비싼 식당에서 밥 먹었냐고 또 미진이 펄펄 뛰면?…..
창민은 앞에 앉은 여름이를 바라보았다. 창민과 눈이 마주치자 여름이가 미소를 지었다.보고 보고 또 보고 열 번 스무 번을 봐도 예쁘고 귀여운 여름이의 미소. 그런데 오늘 저녁 밥값을……. 아, 이런 젠장. 오롯하게 이 분위기를 즐길 수가 없구나. 이 아름다운 저녁시간에 밥값 낼 걱정이나 하고 있는 꼴이라니....창민은 조금 참담한 마음이 되었다. 그렇게 궁상맞은 자신이 정말 싫다는 생각이 들어 창민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처럼, 결혼전에처럼 걱정없이 기분내며 돈 좀 써봤으면. 이런 꼴이 된 것은 순전이 미진이 때문이야,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게 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야. 자나깨나 돈돈돈 하는 미진이 때문이지. 미진의 관심사는 모두 돈으로만 직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자 참담하던 창민의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내 잘못이 아니야.그랬다. 창민은 미진을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구질구질하게 돈에 얽매이고 쪼달려 살지를 않았었다.풍족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외아들인 창민을 위해서 엄마를 비롯한 누나들이 지극정성으로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용돈, 하고 손을 내밀면 필요한 만큼의 돈이 거기 항상 있었고 옷, 구두하고 손을 내밀면 원했던 것들이 항상 거기 준비돼 있었다. 설령 창민이 원하는 옷이나 구두가 형편에 맞지않는 고가여서 즉시 구입해주지 못하면 기일이 좀 걸려서라도 반드시 장만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부족한 것 없이 살았던 창민이었다. 사실은 미국에 공부하러 온 것도 창민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첫째는 집에서 학비를 댈 형편이 안 되었고 둘째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미진이가 같이 갈 것을 종용하는 바람에 어영부영 따라오게 된 것이다.
다행히 어머니와 누나들은 자신들은 텔레비젼 연속극에서만 본 미국이란 거대한 땅에서 공부하는 창민을 자랑스러워하며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그랬는데 아이가 태어나고 미진이 직장을 갖게 되면서 원조가 끊겼다. 미진이 돈을 버니까 이제 직접 알아서들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또한 미혼으로 있던 누나둘이 시집을 가게 되고 무쇠같은 튼튼하던 몸을 자랑하면서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대로 하던 어머니가 나이들고 기력이 약해지면서 예전처럼 나서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 큰 이유였다.
어쨌든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게 된것은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미진의 탓이 크다고 창민은 책임을 전가시켰다.아까 집을 나설때도 그랬다, 미진은. 창민은 미진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거의 한시간이나 걸쳐 외출 준비를 마치고 창민은 식탁에 앉아서 미진을 초조하게 기다렸었다.미진이 들어와야 차를 쓸 수 있으니까. 삑, 하고 차 잠그는 알람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창민은 총알처럼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미진이 집쪽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 나 약속있다고 한 것 잊어버렸어?”
창민이 짜증을 섞어 말했으나 미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창민에게 건네주며 무심하게 물었다.
“늦을 거야?”
창민은 나꿔채듯 열쇠를 받으며 생각했다. 젠장, 이럴 때 차라도 좀 멋지면, 그리고 좀 새 거이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십만 마일이 넘은 똥차를 타고 여자를 만나러 가는 신세라니…..
“늦을 거냐고?”
미진은 다시 물었고 창민은 뛰듯이 차쪽으로 걸어가면서 대답했다.
“몰라. 가 봐야 알지”
“이 달에 차 보험료 내야 해…… 그러니까……”
미진이 말이 창민을 따라와서 뒷통수를 땅, 하고 쳤다. 창민이 급하게 차문을 닫았으므로 뒤에 말은 듣지 못했다. 듣지 않아도 뻔한 말. 차 보험료 내야하니까 돈 많이 쓰지 말라는 말. 그 말은 아교풀처럼 끈끈하게 창민의 뒷통수에 늘어붙어 있었다. 네가 어떤 용을 쓰더라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끈끈하고 강하게.아, 제기럴.창민은 미진을 털어내기 위해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여기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여름이가 있는데.
"근데 운전 괜찮겠어요?”
창민이 걱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치 않으면 내가 집에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데, 하는 여운을 남기면서.
“염려 마세요. 저 술 꽤 세요.”
여름이가 가볍게 눈을 홀겼다. 창민은 생각한다. 눈 홀기는 모습, 정말 죽이게 귀엽네….
“신문사 일은 재미있어요?”
창민은 아까도 물어보았던 말을 다시 물어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이렇게 어린 여자와의 데이트는 처음이라 어떤 말로 대화를 이끌어가야 할지 갈팡질팡인 것이다. 그렇잖아도 아까 한방 먹었다. 아버지는 뭐하시냐. 형제는 몇이냐. 미국에는 언제 어떻게 왔느냐 물어보다가. 직장생활 하세요. 동생하고 둘이예요. 아버지 직장따라 십몇년전에 왔어요, 하고 건성으로 대충 대답을 하는 것 같다가 창민의 질문이 계속 이어지자 호구 조사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던 것이다.
머쓱해져 있다가 여름이가 술을 더 시키는 바람에 미진의 생각에 빠졌던 창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름이가 앞에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무슨 말을 해야 앞에 앉은 이 아가씨 마음에 들지 알 도리가 없는 창민은 궁리끝에 다시 물었던 것이다. 신문사 일은 재미있냐고. 사실은 앞으로의 일을 미리 알아보려는 속셈도 있었다. 이 예쁜 아가씨가 어느날 문득 신문일이 따분하다고 그만 두면 어떡하지? 계속 나랑 같이 일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여름이는 창민의 질문에는 대답을 않고 창민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김 선생님은 결혼생활이 재밌어요?”
기습적인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창민이다.
“제 친구중에요. 벌써 결혼한 아이가 두명 있거든요. 그 중 한 아이는 벌써 아기까지 둘 낳았는데요. 재미있대요. 결혼해 사는 게 아주 재미있대요”
“그으래?.........”
“그래서 저도 따분한 신문사 생활 집어치우고 아무 남자나 잡아 얼른 결혼이나 할까 생각중이예요. 밥하고 살림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쿠, 조금전에 걱정했던 게 현실이 될 수도 있겠구나...
창민은 손까지 내저으며 황급하게 말했다.그러면 안 되지. 벌써 결혼하면 안 되지. 결혼하긴 너무 이르잖아 하고. 목소리가 떨려나왔다.다급한 마음이 드는 창민이었다. 그냥 가볍게 뱉아보는 말인 줄 알지만 그러다가 다음 달이라도 결혼한다고 나설까봐. 여름이가 없는 한울 신문사라. 생각만으로도 삭막하고 재미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여름이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다. 재미로 결혼을 해치울 아이다. 당돌하고 거침없고 자신만만한 아이니까.
“결혼할 남자도 없다면서…..”
창민이 입술에 침을 묻히며 말했다. 조금전에 여름이가 말했었다. 애인이 아직 없다고. 그래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데……
“없지만 찾으면 있겠지요. 하여튼 재밌을 것 같아요, 결혼이라는 것….”
“결혼을 재미로 하나. 재미로 했다가, 그랬다가 재미없으면?”
“더 재미있도록 노력을 하면 되지요”
“글쎄, 그게 말처럼 쉽게 될까….”
그렇다.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게 결혼생활이다. 단단히 준비와 각오를 하고 임해도 갖은 암초와 풍랑을 만나 헤맬 수 있는 게 결혼생활이다. 그런 결혼을 재미로 할 생각을 하다니….창민은 ‘삶’이라는 데 대해 단 한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없는, 어떻게 하면 마음에 드는 옷 한벌을 싸게 살 수 있을까가 실생활에 가장 중요한 사안일 것 같은 여름이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지만 철 좀들어라, 이 아가씨야 하는 마음으로. 조금은 한심한 눈으로.
여름이의 두 번째 술잔이 거의 다 비어가고 있다.제발 또 술을 시키지않게 되기를 빌고 있는 창민이다. 이제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시원한 바람을 좀 쐬었으면, 담배 한 대를 피웠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창민이다.창민의 마음을 읽었는지 마지막 남은 술을 입안으로 흘려 넣은 여름이가 말했다. 이제 그만 나가요.여름이의 말에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창민은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계산서를 부탁했다.
“저 화장실에 갔다가 갈 테니 먼저 나가 계세요”
여름이가 벗어 놓았던 스웨터를 집으며 눈을 찡긋하고 저쪽으로 사라졌다.여름이가 사라지는 동시에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져왔다.음식값과 술값, 그리고 팁까지 포함된 가격이 284불이나 나와 있었다. 좀 심하다 싶었지만 창민은 내색않고 데빗 카드를 계산서 위에 얹는다. 창민은 생각했다. 신문사 직원들 밥을 산다고 했으니 미진이도 그걸 감안해서 크게 잔소리를 하지 않겠지....
다른 것은 몰라도 여자한테 저녁 사는 것을 미진이 몰래 하는 것은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 창민이었다. 그리고 미진에게 약간 미안한 생각도 드는 창민이었다. 한끼 저녁값으로 3백불이나 되는 돈을 쓴 것이.어쨌든 여름이에게 식당을 고르게 한 것은 내 불찰이야 하면서 창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비싼 식당을 택하다니…….
영리한 여름이는 알고 있는 것이다. 창민의 마음이 자기한테 기울여져 있다는 것을. 그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한다해도 다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이 세상의 모든 남자는 갓잡은 물고기처럼 팔팔하고 싱싱한 젊은 여자, 바람이 잔뜩 든 고무공처럼 탱탱하고 가벼운 자신과 같은 여자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여름이는 창민이 자신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을 벌써 알고 있는 것이다!
계산을 마치고 허둥지둥 식당밖으로 나간 창민은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여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나……창민은 복도를 돌아 엘레베이터쪽으로 걸어갔다. 거기, 엘레베이터 앞에 여름이가 있었다. 그런데 여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한 떼의 같은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들과 둘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신 까르르대며 웃고 있는 여자들. 옆사람의 팔을 때려가며 발을 동동 굴러가며 웃고 있는 여자들의 옷차림이 요란하다. 민소매의 원피스 위에 아까 벗은 스웨터를 허리에 묶고 있는 여름이가 그중 가장 얌전한 차림이었다.
여자들은 염색해서 울긋불긋한 머리와 어깨를 드러낸 웃도리와 짧은 미니 치마와 부츠를 신고 있었다. 초여름인데 쭉쭉 빠진 길다란 다리에 부츠를 신고 있다. 부츠는 한겨울에만 신는다는 어른들의 고정관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어떻게 보면 야간 업소에 나가는 여자들같은 차림새였다. 그런데 요란하고 튀긴 했지만 천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깨와 허벅지와 앞 가슴을 거의 다 드러내고 있었지만 도발적인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해보였다. 젊기 때문일 터였다.
창민은 한쪽으로 비껴서서 멍청하게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여름이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그래서 얼른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이쪽으로 와 주기를 기다리면서. 그러나 여름이는 창민을 분명 보았음에도, 그리고 둘이 눈이 마추쳤음에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네까짓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여전히 목소리를 높히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완전히 창민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여름이와 여자들 사이에는 바늘만큼의 틈도 없었다. 창민이 끼어들 수 있는 틈이.그러고 서 있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 참 초라하고 못났다는 자괴감이 들어 창민은 그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저들 젊음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늙다구리 아저씨. 내일 모레 사십살을 바라보는, 생활에 찌들대로 찌든.창민은 흘낏 스텐레스로 마감된 엘레베이터 문에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하늘색의 와이셔츠와 검정색 양복바지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살이라도 더 젊어보이게 청바지를 입을 걸.
그러나 창민은 안다. 청바지 아니라 청바지 할아버지를 입는다해도 여름이와, 여름이 친구들이 분명할 저 여자들과는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창민은 자신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여름이가 괘씸한 생각도 같이 들었다. 대충 얘기를 끝내지. 어색하고 거북스런 기분으로 내가 이렇게 엉거주춤 기다리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저렇게 길게 시간을 끌다니….
문득 창민은 여름이가 자기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에서 열이 확 받쳤다. 속까지 불편해지려고 하는데 마침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가 섰다. 문이 열리며 한쌍의 남녀가 손을 잡고 내렸다. 텅 비어 있는 엘레베이터를 보자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민은 망설임없이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1층을 눌렀다. 엘레베이터는 중간에 한번 선 후 곧장 창민을 지상으로 내려다 주었다.
기름을 바른 듯 바닥이고 벽이고 반짝반짝 윤나는 호텔 로비에서 창민은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한 종업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호텔 정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 호텔 현관이 바로 보이는 곳에 위치한 정원이었다. 인공폭포와 나무와 숲과 꽃들이 어루러진 정원에는 밤이 깊어서인지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도 없었다. 창민은 잠시 서서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창민은 인공폭포 앞에 있는 벤치로 걸어가서 앉았다. 몇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인공폭포를 비추고 있었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영롱한 보석처럼 아름다왔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필경 금연 구역일 것 같아 그냥 참기로 하면서 창민은 10여분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55층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조금전에 느낀 여름이와의 이질감만큼이나 까마득한 높이였다.
내가 미친 놈이지…..
창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 반이 정량인데 독한 브랜디를 마셔서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집에까지 운전해 갈 일이 꿈만 같았다. 빨리 여름이를 보내놓고 떠나도 떠나야 할 것 같은데…….창민은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잠시나마 여름이에게 흑심을 품었던 게 미진이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살아보려고 아둥바둥하는 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속을 더 상하게나 하지 말아야지…..
창민은 오랜만에 미진을 안아 볼 생각까지 해본다. 미진의 속옷을 벗겨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늘 침대를 점령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기도 했었지만 서로에 대한 관심을 잃으면서 섹스에 대한 관심도 같이 잃게 된 것이다. 사실 내가 미진이에게 무심하긴 무심했지. 그래, 오늘 밤엔….얼른 집으로 갈 생각을 하며 여름이를 찾아나서려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저씨”
호칭이 바뀌었다. 김 선생님에서 아저씨로. 창민은 생각했다. 아무려면 어떠냐….
여름이가 옆에 와 앉는 바람에 일어서려던 창민은 도로 벤치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대학 친구들을 만났어요”
“음….”
“졸업하고도 한동안 친하게 지냈었는데 제가 직장일에 바쁜 바람에 최근엔 좀 소원했었거든요”
“그랬군”
“우리가 밥먹었던 식당 한 쪽으로 나이트 클럽이 있어요. 거기 놀러왔대나 봐요”
“음…..”
여름이가 창민의 앞으로 가까이 몸을 옮겼다.
“아저씨 화 났어요?”
창민이 고개를 저었다. 화가 좀 났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화 난 것 같은데?”
“아니야…..”
“그럼 왜 대답을 그런 식으로 해요?”
“그만 가지”
여름이의 숨결을 느낄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도 놀라우리만치 창민은 담담했다. 처음에 만난 이후 지금까지 매일 가슴에 담고 있었던 여름이, 그리고 조금전까지만 해도 뜨거워져있었던 마음이 차갑게 식어있는 것이다.창민의 머리속에 더이상 여름이는 없었다. 대신 다른 생각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오랜만에 미진을 안아야겠다는 생각.
“아저씨……”
갑자기 여름이의 몸이 창민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창민은 뭔가 따뜻하고 몽클한 것이 자신의 입술에 부딪쳐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여름이의 입술이었다. 입술, 입술, 아까 마신 ‘하바나’의 달콤한 파인애플 향이 나는 여름이의 입술. 그것은 기습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라고 당혹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창민은 생각했다. 그러나 창민은 자신의 입안을 마구 헤집고 들어오는 여름이의 혀를 밀어내지 못했다. 거부하지 못했다. 여름이의 입술과 혀는 낙지의 흡반처럼 창민을 강하게 끌어당겼기에. 창민은 통제력을 상실한 채 뜨거운 여름날의 눈사람처럼 녹아내렸다.
창민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작정한 사람처럼 여름이의 입술을 빨아들였다.또한 창민은 양손을 뻗어 여름이의 두팔을 잡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갓 뽑아놓은 가래떡같은 여름이의 팔이 손에 가득 들어왔다. 건너지 못할 강, 결코 건너서는 안되는 강, 창민은 그 강을 건너고 있었다.
10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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