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진이 눈을 뜬 것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서였다. 한점의 망설임이나 거침도 없이 누가 현관문을 마구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무척 크고 강했기에 벽까지 우릉우릉 울릴 정도였다.

미진은 팔을 뻗어 방바닥에 있는 휴대전화를 집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누가 아침부터 함부로 남의 집 현관문을 저렇게 두드려대는 것일까.

시계는 여덟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평일이라면 벌써 일어나서 아이들 등교준비를 시키고 출근할 차비를 차려야 할 시간. 그러나 토요일이었다. 마음놓고 늦잠을 즐겨도 되고 늑장을 부려도 되는 토요일 아침.

방안을 둘러보니 창민은 옷도 벗지않은 채 침대에 쓰러진 자세로 자고 있었고 아이들 역시 이리저리 나무토막처럼 걸쳐져서 같이 잠들어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 나고 있었다. 미진은 일어나서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어 뒤로 묶었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창민은.

새벽까지 기다렸었지만, 딱히 창민을 기다린다기보다 잠이 안 와서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며 깨어 있었었다. 1시가 되도록. 그때까지 창민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1시가 넘는 걸 보고 미진은 침실로 들어 갔다. 같은 침대에서 자다가는 창민이 들어올 때 깨게 될지도 몰라 방바닥에서 누워서 잠을 청했었던 것이다.

미진은 융으로 된 잠옷을 벗고 집에서 입는 셔츠와 바지를 몸에 꿰었다. 그동안에도 문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 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젊은 남자의 얼굴 하나가 쑥, 용수철처럼 안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빡빡 깎은 머리에 팔뚝이며 목이며 문신투성이인 한 불량스런 차림새의 백인 남자가.

“아이, 씨팔.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여는 거야? 뭐하고 자빠져 있느라고?”

미진은 돌발의 사태에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남자는 참 거칠고 무례하구나. 예의라는 것은 애초에 모르고 태어난 사람처럼.

“저기에 세워 놓은 빌어먹을 하얀색 승용차가 당신네 것 맞지?”

남자가 잡아먹을 듯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안 맞아?”

“맞는 것 같은데……”

“당신이 운전했어, 저 차?”

미진은 알았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출고한 지 한달밖에 안 된 내 차, 아직 정식 라이센스판도 안 달은 내 새 차를 당신네 차가 들이받았단 말이야. 빨리 나와 살펴 봐. 증거가 있으니까. 아니라고는 발뺌 못 할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차..차를 들이받았다고요?”

“그래!오늘 새벽에 그런 것 같은데 아, 씨팔. 짜증나. 정말 짜증나 죽겠네. 진짜 어떤 우라질놈의 새끼가 운전을 그 따위로 했지? 당신이야? 당신 남편이란 작자야? 아, 빨리 나와보라니까 왜 그리 병신같이 멍하니 서 있어?”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미진은 얼이 빠진 채 현관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는 슬리퍼중 하나를 끌고 기세등등한 남자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남자 차는 빨간색 소형 스포츠카였다. 남자의 말대로 구입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새 차였다. 임시 라이센스 번호판이 앞 유리부분에 부착돼 있었다.

그 차가 왼쪽 꼬리부분이 크게 패어 있었고 백 라이트가 부서져 있었다. 깨진 라이트의 플라스틱 조각이 바닥에 흐트러져있었다. 미진의 차는 오른쪽 앞이 움푹 찌그러져 들어가 있었고. 들어간 자리에 상대편 차를 박으며 묻어나온 게 분명할 빨간색 페인트가 조금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확실하고 명확한 흔적이었다. 이쪽 차가 그 차를 들이받았다는.

“이것 봐. 이것 보라구. 페인트까지 묻어 있잖아. 주차하다가 들이받은 것 같은데 씨팔. 주차 누가 했어? 당신이 했어? 주차 하나를 제대로 못해서 남의 귀한 차를 들이받아? 운전면허증은 있어? “

“죄…죄….죄송합니다….”

미진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 일을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답답해지면서 갑자기 숨이 꽉 막히어서 미진은 가슴을 꾹꾹 눌렀다. 남자만 아니라면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좀 뚫릴 것 같았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보험으로 고쳐드리겠습니다….”

“보험이라고? 보험으로 처리해주겠다고 하면 다야? 내 정신적인 피해는 어떡하고? 나 오늘 저녁에 아주 중요한 약속 있다구. 몇달동안 기다려 온 내 인생 일대의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약속!! 그 자리에 저런 찌그러진 차를 타고 나가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내가 이 차를 사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죽을둥 살둥 노력했는 지 알아? 거의 2년을 알바 뛰어 다운페이 만들어 산 차라구. 정말로 정말로 조심스레 아껴서 타려고 했었는데…… 그랬었는데 젠장, 초장부터 저렇게 차를 우그러뜨려놓으면 어떡해? 엉?”

남자는 길길이 뛰었다. 남자의 고함소리에 아파트 창문이 하나둘 열리면서 잠에서 깨어난 얼굴들이 내다보이기 시작했다. 창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씨팔. 멀쩡한 남의 새 차를 저렇게 해 놓고 발 뻗고 잠이 와? 잠이? "

 

운행하고 다니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건만 죽어도 창피해서 우그러진 차를 타고 다닐 수 없으니 말짱하게 고쳐질 때까지 렌트카를 타겠다는 남자의 우격다짐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문제는 미진의 차 보험이 렌트 카를 카버해주지 않는 데 있었다.

이쪽 사정은 전혀 고려해 줄 마음이 없는 남자가 어떤 종류의 차를 고를지는 몰라도 하루에 수십불의 생돈이 들어가게 생긴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얼른 보험회사에 연락해 하루라도 빨리 남자의 차를 고쳐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볼 수밖에 없는데 옴쭉달쑥도 할수 없는 것이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이다. 토요일은 보험회사가 문을 닫았다.

그러고보니 이쪽 차를 고치려면 디덕터블도 있구나, 하고 미진은 생각했다. 견적이 얼마나 나올지 몰라도 일단 1천불의 디덕터블을 내야 한다. 정말로 산 넘어 산이다. 일단 운행에는지장없으니 당분간은 흉하더라도 고치지말고 그냥 타고 다녀야겠구나.....

미진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절망을 보았는지, 아니면 당신이 원하는 차종은 무조건 렌트해주겠다는 미진의 제의가 받아들였는지 남자는 한 시간 후에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미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미진은 삐뜨름하게 세워져 있는 자신의 차를 살펴보았다.

십만 마일이 넘은 차. 출고한 지 20년이 가까이 되는 고물차. 중고차로 미진네에 와서도 별다른 큰 고장없이 착실하게 미진을 싣고 목적지로 쑹쑹 달려주던 차. ‘혼다 시빅’. 그 가엾은 차가 상처를 입은 채 말없이 엎드려 있었다.

미진은 우그러진 곳을 손으로 한번 쓰다듬고 집으로 들어 갔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미진의 어깨가 이 세상의 시름을 다 짊어진 사람처럼 구부정했다.

바깥에서 그 난리를 치는데도 집안은 적막했다. 창민도 아이들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것이다.

침실로 바로 돌진해 창민을 깨우려다가 미진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탁자에 있는 랩탑을 끌어당겼다.

분명히 창민은 술을 먹었을 것이다. 술에 취하지 않고는 남의 차를 들이 받는 저런 실수를 저지를 수가 없다. 더구나 넓은 파킹랏에서.

도대체 저녁값과 술값으로 얼마를 썼을까. 일단은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진은 은행 어카운트에 로긴해 들어갔다.

두개의 액수가 펜딩(pending)이 걸려있었다. 한개가 아니고 두개의 액수. 하나는 284불. 그리고 다른 하나는 197불. 첫 번째 것은 식당일 것이다. 편집실 직원들 밥을 산다고 했으니. 직원들이 몇명인지는 몰라도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다. 그러면 두 번째 것은 무엇일까. 2차로 노래방에라도 간 것일까.

첫 번째 금액을 쓴 곳은 ‘타워’라는 곳이었고 두 번째는 ‘페페’라는 곳이었다. 미진이 처음 듣는 생소한 업소이름이었다. 여기가 어딜까.

미진은 ‘구글’에다 두 이름을 쳐넣어보았다. 1분도 안 되어 미진은 알아냈다. 타워는 판도라라는 최고급 호텔 구내 식당. 페페는 판도라 호텔안의 나이트 클럽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창민은 누군가와 별 다섯개짜리의 최고급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마신 것이다. 밥 먹고 춤 추고 술마시고 기분을 냈다. 그리고 새벽 1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다가 남의 멀쩡한 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낸 것이다. 파킹랏이라서 다행이지 만약 길에서 사고를 냈으면 어쩔 뻔했단 말인가.

미진은 탁, 랩탑을 소리나게 덮었다.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 화도 나지 않는 법인가. 분노가 너무 세차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법인가. 미진은 벽을 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았지만 미진의 마음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든 것처럼 미진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지 이 난국을 수습해야 한다는 긴박한 생각이 든 것이다.

남자에게 렌트 카를 빌려주고 보험회사에 디덕터블을 내고 그리고, 그리고 한국마켓에서 장을 좀 봐야 한다. 쌀이 거의 떨어졌고 라면도 없고 기타 양념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다. 쟈시와 할머니 생신이 내일 모레라는데 뭐라도 사드려야 한다. 두 아이를 친자식같이 보살펴 주시는 쟈시와 할머니 생신인데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돈 들어가야 할 일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데 돈 나올 곳은 미진의 월급뿐이었다. 더구나 그 월급날은 아직도 2주 가까이나 남았다. 결국 크레딧 카드를 써야하는데 그나마 두 개 있는 크레딧 카드의 사용 한도액이 거의 목에 차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미진은 정선우를 생각했다. 급하고 아쉬울 때마다 편리를 봐주는 정선우였다. 한국갔다 온 후 여윳돈이 남아 있을리 없는 정선우일 테지만 사정설명을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좀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미진은 일어섰다. 입안이 바짝 말라서 커피라도 한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미진은 부엌으로 걸어가서 물주전자를 집었다. 그리고 수돗물을 틀었다. 쏴아, 소리를 내면서 물이 주전자 안으로 쏟아지는 동시에 미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진은 그렇게 부엌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신문사 직원들이니 이왕이면 고급스런 데서 대접하고 싶었다 해도, 그렇다 해도 나이트 클럽까지 가서 돈을 쓰고 온 것은 해도 너무한 처사였다. 돈 1불을 아끼기 위해 미진이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하여 노력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흥청망청 돈을 쓰고 들어온 것은 도저히 그냥 간과할 수없는 문제였다.

한참을 울고나서 커피를 타면서 내린 결론은 이번에도 넘어가주자였다.

말을 해서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창민은 백번을 얘기해도 안 되는 사람같다. 안 되는 사람한테 이러고저러고 말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소용없는 일을 갖고 용을 쓰느니 그냥 지나 가자, 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 데에는 아이들을 먼저 위해야겠다는 마음이 무엇보다 컸다.

최근들어 부모의 불화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미진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아이들의 정서나 심리상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어리니까, 어린 것들이 뭘 알려고, 하고 무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옆에 있건 없건 마음놓고 큰소리내가며 창민과 싸웠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아이들을 인식하게 됐다. 미진의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그리고 그에 맞대응하는 창민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구석에서 불안한 얼굴로 떨고 있는 두 아이들을 보게 된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싸우면 안 되었다. 화목한 모습을 연출해주어야했다. 미진은 마음을 추스렸다. 미진은 다시 앞으로 나가야 할 돈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사고를 낸 차 주인이 얼마나 아량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가였다. 자기 차와 똑같은 종류이거나 아니면 더 고급차량이 아니면 렌트를 하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던 차 주인.

어쨌든 잘못은 이쪽이니까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것이었다. 차가 완전하게 수리가 될 동안 렌트카를 타게 해 줘야 하는 것이다. 이쪽 형편을 말하고 읍소를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미진은 생각했다. 아까의 태도를 보니 완전 막무가내의 사람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빠듯하기 짝이 없는 경제사정에 대한 설명을 하고 가능하면 싼 차로 빌리게끔 유도를 해 봐야 할 것이다.

가장 싼 차의 하루 렌트비가 얼마나 할까….. 그냥 차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보험이며 이것저것 차지가 붙을 건데…… 그러고보니 차 보험료도 내야 한다. 이달 말까지 납부해야 할 보험료는 4백 몇십불이었다.

미진은 커피잔을 탁자에 놓고 옆에 밀어놓았던 랩탑을 끌어당겨 은행에 다시 접속했다. 아까 확인했던 잔고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7백 십여불 남았던 잔고에서 팬딩중인 금액 248불과 197불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겨우 2백 몇십불.

그 금액을 보는 미진의 마음이 바짝 타기 시작했다. 아무리 싼 차를 렌트한다해도 적어도 몇백불이 그냥 나갈 것인데….. 그나저나 차 보험료를 어떡하지…….

은행 잔고를 들여다보는 미진의 얼굴이 장맛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처럼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슴이 발효되는 막걸리처럼 부글부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나의 족쇄로구나…..나는 어쩌자고 이런 남자랑 결혼해서 이날 이때까지 돈 걱정에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일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그냥 넘어가자고 아량을 가지려해도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에 너그러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때 침실문이 열렸다. 창민이 걸어나왔다. 창민은 소파에 앉아있는 미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창민은 아무말 하지 않은 채 부엌으로 걸어들어가더니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소리나게 마셨다.

미진은 그런 창민을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새벽, 그가 저지른 사고에 대해 얼른 얘기해주어 한다는 생각이, 그리고 그 사고에 따라 들어갈 부수적인 손해가 얼마라는 얘기를 일단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들었지만 별로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것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창민이었다.

“내 크레딧 카드 정지시켰어?”

창민은 물병을 소리나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내 카드 정지시켰냐구 묻고 있잖아, 지금?”

그랬다. 몇달 전 그 카드를 정지시켰다. 쥐뿔도 없으면서 돈 쓰는데만 호기로운 창민이 또 사고를 저지를까 봐서. 작년 여름같은 일을 또 벌일까봐. 철 없는 창민의 성향으로 봐서 언제 어느때 또 얼토당토않는 곳에 뭉텅이 지출을 할수도 있는 것이다. 걱정과 조바심이 되어서 그에게 카드를 가지고 있게 할 수 없었다…….

“야!”

창민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성큼성큼 걸어와 미진의 앞에 버티고 섰다.

“네가 나를 무시하는 것,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거 너무하는 것 아니야?날 너무 병신 쪼다 취급하는 것 아니냐구?”

“………..”

“너라는 여자, 정말 질린다, 질려…….”

“뭐, 뭐라구......”

“질린다고 했다, 왜?”

참자, 참자, 참자를 되내이며 말대꾸를 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던 미진의 가슴에서 불길이 확, 하고 세찬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아침에 눈 떠서 지금까지 애써 꾹꾹 누르고 있던 뜨겁고 강한 분노의 불길이.

어떻게 생겨먹었으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겨먹었으면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똥뀐 놈이 성낸다는 말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남자. 양심이라는 두 글자의 뜻에 대해서는 1분도, 아니 단 1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은 남자…..

미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놓았다. 마음같아서는 두 주먹으로 창민의 가슴을 마구 두둘겨 패주었으면 싶었다. 그렇게 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

미진은 심호흡을 했다. 눈물이 나지 않는게 이상했다. 예전에는 창민이 저런식으로 얼토당토않은 시비를 걸거나 같잖은 소리를 해대면 애통하고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부터 펑펑 쏟아졌었다.

“ 사람 얼굴에 똥칠을 해도 분수가 있지. 정지시켰으면 시켰다고 말을 해줘야 알것 아냐?! 멋도 모르고 카드를 내다가 얼마나 창피당했는 줄 알아?”

“………..”

“거기 모인 사람들의 이목이 다 나한테 집중되었었잖아. 사내새끼가 얼마나 못났으면 카드가 정지된 것도 모르고 가지고 다니냐는 눈길로 다들 쳐다보는데 나 원참…..”

“그래서?”

돈 한푼 벌어오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이목이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남자. 미진은 더 이상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었다.

“남자를 사회생활하게 하려면 조금은 돈을 쓰게 해주어야 하잖아?! 앞뒤 꼼짝도 못하게 쬐어놓고 어떻게 기를 펴라고!”

“그래서?”

“젠장. 더럽고 치사해서 살 수가 없네. 정말이지 무슨 수를 내든지 해야지……”

“그래서?”

“돈돈돈, 돈에 환장한 여자같이 구는 것이 미치게 싫단 말이야. 학을 떼겠단 말이야!”

“그래서?”

“날 발가락에 낀 때 취급 하지 말란 말이야! 그까짓 돈 좀 번다고 유세 그만 좀 떨란 말이야!”

“그래서어?그래서 어쩌라구?날 보고 어쩌라구우?”

미진의 입에서 째지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미진은 무릎에 놓고 있던 랩탑을 창민에게 집어 던졌다. 랩탑은 털썩, 하는 소리를 내면서 창민의 발 앞에 나가 떨어졌다.

“질린다구? 나라는 여자가 질린다구? 나한테 학을 떼겠다구? 누가 할 소린데 지금?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고 있는데?!”

“질리는 것을 넘어서 끔찍하다! 매일 듣는 돈타령, 정말이지 지겨워 죽겠고 끔찍해 죽겠다!”

“질리고 끔찍하고 지겨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그때 제이와 케이가 눈을 비비면서 거실로 나왔다. 겁을 잔뜩 먹어 움추려든 모습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불안한 얼굴들.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싸우지 않기로 했던 결심은 벌써 저만치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저 뻔뻔하고 뻔뻔하고 뻔뻔한 면상에 구정물이라도 아니, 똥물을 퍼붓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진은 진저리를 쳤다. 그 마음은 맹렬하고 강렬했다.

똥물을 저 면상에다 퍼붓지 못할 거면 지금 창민이 내뱉았던 말처럼 이제는 무슨 수를 내야 한다...... 10여년동안 외줄 타듯 위태위태하게 이끌어 오던 이 결혼 생활, 더 이상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생각이 미진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엄마아……”

미진은 숨을 몰아쉬면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이들은 어떡하고?

부모의 싸우는 기세에 억눌려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두 아이들. 그 아이들을 보는 미진의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불쌍하고 가여운 내 아이들……

“당신은 사람도 아니야!정말로 사람도 아니야! 아이들을 봐서라도 이러면 안되는 건데.....”

참고있던 울음이 터져나왔으나 목구멍이 자물쇠를 채운 것 처럼 꽈악 잠겨 있었다.

“으…..”

미진은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계속 헐떡거렸다. 그러면서 미진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경멸을 담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창민을.

“여자라면 적어도 남자의 체면을 우선으로 챙겨줄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야? 넌 내 체면보다도 돈 1불이 더 귀중한 여자야. 그런 여자라구!”

“그….그…그래서…그래서…”

가슴을 계속 치면서 길게 심호흡을 하자 휵, 하고 목구멍이 뚫렸다. 미진은 창민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래서 그 잘난 당신 체면이 그렇게 중한 거야? 체면은 중하고 펑크나는 은행 잔고는, 은행잔고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 거야, 지금? 이 집에 나 혼자 살아?나 혼자 사냐고? 왜 늘상 나 혼자만 은행잔고를 챙겨야 하는데? 왜 나혼자만 안달복달해야 하냐고?왜애?왜애?”

가슴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증오때문에 숨도 쉴 수 없었고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미진은 끄윽끄윽 숨을 몰아쉬면서 계속 악을 썼다.

“무슨 태산같은 큰일을 한다고 하룻저녁에 5백불을 밥값으로 쓰고 들어오는 건데? 그 돈 쓸 때 1불을 아끼려고 발발 떠는 내 얼굴이 떠오르지도 않디?이날 이때껏 변변한 옷가지 하나를 못 사입고 추레하게 살고 있는 내게 불쌍한 마음이 들지도 않디?”

“그러니까 너도 써! 쓰라구. 누가 못 쓰게 했니? 네가 좋아서 그 궁상을 떨면서 왜 나한테 야단인데?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면서 왜 걸핏하면 나한테 야단이냐고?! 제발 나한테 뒤집어 씌우는 짓 좀 그만 하란 말이야!”

‘네가 좋아서 그 궁상을 떨면서’란 창민의 말이 미진의 가슴에 날카로운 사금파리처럼 날아와 박혔다. 사금파리가 박인 자리는 쓰라리고 아팠다. 피가 철철 났다. 동시에 맹렬하게 타오르던 전의(戰意)가 차가운 물을 퍼부은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전의가 상실됨과 동시에 생성된 것은 살의(殺意)였다. 아아, 저 남자를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버렸으면 좋겠다…..

미진은 몸을 일으켰다. 창민을 지나쳐서 부엌쪽으로 걸어갔다. 식탁 의자에는 어제 저녁 퇴근하고 들어와서 걸쳐 둔 쟈켓과 핸드백이 있었다. 창민이 들어와서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차 열쇠가 있었다. 미진은 그 세가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현관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어디 가?”

미진의 몸짓을 지켜보던 창민이 물었다.

“어디 가냐구?”

미진은 현관문 밖으로 발을 내디디면서 싸늘하게 대답했다.

“여기 더 있다간 당신을 죽일 수 도 있을 것 같아…..”

차에 올라타면서 미진은 옆집 남자의 차를 흘낏 쳐다보았다. 아홉시 삼십분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 렌트 카를 대여하러 ㅜ가기로 했었다.

더이상 나는 모르겠다. 지가 저지른 일, 지가 알아서 해결하겠지…..

미진은 차를 출발시켰다. 일단 큰 거리로 나갔다. 토요일 아침 거리는 한산했다.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해봐도 갈 곳이 없었다.

코리아나 사무실에 갈까. 토요일이라 저스틴도 정선우도 출근하지 않는다. 그 곳이라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생각을 정리해보아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이대로 계속 창민과의 관계를 이끌어가야 할 것인가를.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하고 혼미한 길을 언제까지 혼자 고군분투하며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를.

미진의 머리를 아까부터 강렬하게 지배하고 있는 생각. 그것은 창민과의 결혼생활을 이제 그만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지쳤다. 기진맥진했다. 이대로는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 없을 만큼. 지금이라도 멈추면 되는데. 멈추면 참으로 홀가분할 텐데.

그러나. 그러나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다,하고 미진은 생각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걸어왔기에 그렇다. 돌아가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 온 길보다 더 멀고 거칠고 험할 수도 있기에 그렇다.

아예 처음부터 걸음을 내딛지 말았어야 했을 길이었다.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길, 멈출 수도 없고 계속 갈 수도 없고. 막막하고 막막한 그런.

저 멀리 커피전문점이 보였다. 커피를 한잔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진은 커피 전문점 앞 파킹랏에 차를 세웠다. 평소같으면 절대로 생각조차 못할 비싼 커피.

미진은 조금 대담해져 있었다. 커피 한잔을 안 사 마신다고 해서 돈이 모이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너무 극악스럽게 살았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어서였다.

정말이지 오늘만큼은 저 커피전문점에서 제일 비싼 커피를 시켜 마시리라. 그러고 말리라......

그러나 마음뿐 미진은 차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손가락 한 개 꼼짝할 수 없었기에. 먼길을 사흘밤낮 걸어 온 사람처럼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커피 한잔을 사야하는데…..

차 시동을 끄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미진은 휴지를 꺼내기 위해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그때 미진은 누군가가 차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