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커피샵은 유현오가 잘 가지않던 곳이었다.

그날 아침 그 곳에 간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생겨서였다. 작업하러 나가기 전 매일이다시피 들리는 동네 단골 커피집이 위생점검에 걸려 당분간 문을 닫게 되었다는 사인을 보았던 것이다. 커피는 마셔야 되겠고 집으로 돌아가서 커피를 만들자니 그렇고 할 수 없이 오다가다 보았던 그 커피샵에 들렀던 것이다.

유현오는 그 커피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에 손님을 만나기 위해 두어 번 가보았었는데 젊은 층 위주로 꾸민 실내며 분위기가 너무 소란스럽고 어수선해서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커피를 사기위해 줄을 서 있다가 통유리창으로 너머로 미진이가 탄 차가 천천히 파킹랏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유현오는 생각했다. 미진이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내가 오늘 아침 이 커피집에 오게 된 것이 보통 행운이 아니군.

유현오는 또 생각했다. 많고 많은 커피집중에서 같은 시각에 같은 커피집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 그냥 우연일까........

정말 뜻밖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조우였다. 이른 아침, 그것도 휴일 아침에 그 커피집에 미진이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으니까.

유현오는 두 잔의 ‘소이 라테’를 주문했다. 부드럽고 순해서 유현오가 아침식사 대용으로 즐겨 마시는 커피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셈을 치르고 커피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유현오는 바깥에 눈을 떼지 않은 채 간절한 마음으로 미진을 기다렸다. 미진이가 실내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짜잔, 커피잔을 내밀어 깜짝 놀라게 해주어야겠다는 작정을 하고. 그러나 미진은 쉬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내가 잘못보았나. 분명 미진이인 것 같았는데. 이 커피집에 오는 목적이 아니었나. 다른 곳으로 갔나.

이른 아침, 아홉시도 되지 않은 이른 토요일 아침, 커피집 외에는 그 쇼핑몰 안에 문을 연 다른 가게는 없었다. 커피숍 저 뒷쪽으로 24시간 문을 여는 헬스 센터가 있을 뿐.

유현오라는 남자는 어떤 경우라도 조바심을 내거나 안달복달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나 유현오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복잡한 실내를 마구 왔다갔다 서성거렸다. 혹시라도 미진이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무척 불안했던 것이다. 커피가 마련되는 2,3분이 한 시간같이 길게 느껴졌던 것이다.

마침내 주문했던 커피가 나오자 유현오는 나꾸어채듯 컵을 집어들고 출입문을 향해 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젊은 여자 두명이 출입문을 밀고 들어오다가 유현오와 부딪칠 뻔 했다. 미, 미안합니다. 유현오는 건성으로 그녀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차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파킹랏. 유현오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커피집 출입문과 약간 떨어진 나무밑에 세워진 미진의 차를 발견했다. 그리고 미진이가 그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아, 다행이다. 다른 곳으로 가버린 줄 알았네.

유현오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미진을 향해 걸어가다가 우뚝 섰다. 멀리서 보기에도 미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슬픔과 절망과 노여움과 비탄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미진은 그런 얼굴로 하염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더니 급기야는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는 것이 보였다. 우는 것이다.

이 푸르고 상쾌하고 싱그러운 휴일날 아침에 저 여자는 또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생겼을까. 차들이 바삐 드나드는 커피샵 파킹랏에서 저렇게 얼굴을 감싸쥐고 울어야 할 사정이란 게 어떤 것일까.

유현오가 미진이 우는 것을 보는 것은 벌써 세 번째였다. 박교수의 아들 돌잔치가 열렸던 공원에서도 혼자 울고 있었고 지난번 비 오는 어느날 저녁 집에까지 차를 태워다주었을 때도 미진은 울었다. 그리고 지금, 번잡한 파킹랏에서 또 혼자 앉아 울고 있다.울고 있는 미진의 모습을 보는 유현오의 가슴이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유현오는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미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커피컵을 쥔 손으로 차창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일주일 전에 설치해 준 한 한국 식당의 새 냉장고를 점검하러 가는 길이었다. 유현오는 모든 장비를 설치해주는 걸로 끝을 내지 않았다. 며칠후에 들러서 작동이 잘 되고 있는 지 반드시 확인했다. 그만큼 유현오는 책임감과 신뢰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케이스였다. 몇십년 쓰던 냉장고를 폐기처분하고 새 냉장고를 구입한 한국식당이었다. 오늘 아홉시 반까지 가서 새 냉장고를 다시 한번 점검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유현오에게 한국식당의 냉장고쯤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미진이가, 미진이가 울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미진이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더니 유현오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얼른 시동을 켜고 차창문을 내렸다.

“웬일이세요, 유 선생님? 웬일로 이 시간에 여길?”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미진씨야 말로 이 시간에 여긴 웬일?”

“커..커피 사러......”

“그럼 커피나 살 일이지 왜 이러고 있어요?”

“그..그러게 말이예요.....”

미진이 겸연쩍에 웃더니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환하게 미소지었다. 유현오는 생각했다. 미진이는 웃어야 이쁜데. 웃는 모습이 마치 떠오르는 아침 햇살같은데. 그런데 왜 이 여자한테는 웃을 일 보다 울 일이 더 많이 생기는 것일까......

아시아나 마켓의 새 사장과 미진이 다정하게 함께 있는 뒷 모습을 발견한 후 마음을 다잡고 있던 유현오였다. 마른 스펀지에 물 스미듯이 조금씩 조금씩 들어오고 있는 미진이를 마음에서 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던 중인 유현오였다. 미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얼른 머리를 흔들어 털어내려 했었었다. 그리고 유현오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미진이는 내가 손을 내밀면 안 되는 여자야. 절대로 나랑은 안 어울리는 여자야.....

그 후에 아시아나 마켓에 갈 일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타주에 가 있는 아내의 딸에게 부쳐줄 건어물을 사느라. 그리고 고쳐주었던 온장고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유현오는 이층 사무실에 가지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볼일이 있거나 없거나 이층에 들렀다. 커피도 얻어마시고 정선우와 미진이 있으면 셋이서, 정선우가 없으면 미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잠시 시간을 보내다 왔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현오는 사무실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사무실 쪽의 하늘을 한번 쳐다보는 걸로 대신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데.

유현오는 그 말을 실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말이 어느정도 맞기는 했다. 한달쯤 지나자 미진에게로 향하던 마음이 많이 가라앉게 된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러나 그것은 뿌연 흙탕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입자가 가라앉으며 맑아지게 되는 이치와 비교적 같았다. 유현오의 가슴 속 밑바닥에는 미진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여전히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 그리움과 애정은 휘젓기만하면 금방 뿌옇게 올라오는 흙탕물같았다. 오늘 미진을 다시 보는 순간 그동안 억지로 꾹꾹 다지고 눌러놓았던 그 마음이 맹렬하게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낀것이다.

“나와요. 커피 샀어요”

유현오가 미진을 향해 커피컵을 들어 보였다.

“저기 바깥에 테이블이 있네. 저쪽으로 갑시다”

미진의 얼굴에서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미진에게서 유현오는 느꼈다.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현오는 미진의 차 뒷쪽으로 돌아가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커피 받아요”

순순하게 유현오로부터 커피를 받아드는 미진.

“어딜 가는 길입니까? 목적지없이 나온 길이라면 우리 드라이브나 갈까요?”

유현오의 머리에 한국식당의 냉장고가 떠올랐다. 세 대의 대형 냉장고 작동점검. 따지고 보면 그리 급한 것은 아니다. 오늘 오후나 내일 아침에 들르면 되지 뭐.

“그래요. 야외로 나갑시다. 내 차로 갔으면 좋겠지만 온갖 장비들이 실려있어서. 더구나 대형밴이라서 드라이브하기엔 좀 그래요. 미진씨 차가 좋겠어요. 어때요, 야외 드라이브?”

미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저리로 쭈욱 나가서 고속도로를 타세요. 한 20분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광활한 포도원이 보이면 로컬길로 빠져나가세요. 거기서부터 내가 운전할 테니까”

미진에게 길을 알려주고 유현오는 한국식당에게 문자를 넣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주아주 급한 일이 있어 오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오후나 내일 아침에 틀림없이 들리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유현오는 빙긋이 웃으며 생각했다. 미진이와 같이 있는 일보다 더 급한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암, 아무것도 없고 말고.

유현오는 미진의 옆모습을 흘낏 쳐다보았다.

입을 다물고 앞만 바라보고 운전을 하고 있는 미진이. 아시아나 사무실에서 늘 보던 모습처럼 수수하고 소박한 차림새다. 아니다. 수수와 소박을 떠나서 오늘은 남루하고 초라한 차림새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얼마나 자주 빨았는지 제 본래의 색깔을 잃고 있는 것 같은 청바지. 낡고 헤어진 무릎 나온 청바지에 역시 오래돼서 보풀이 숭숭 일어난 보라색 스웨터에 쟈켓을 걸치고 있다.

그리고 유현오는 미진이가 양말을 신고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끈 한줄이 떨어져 나간 감색 고무 슬리퍼에 담겨져 있는 작고 하얀 맨발. 바닷가가 아니라면, 호텔방 안이 아니라면 여자의 맨발은 언제나 쓸쓸하다. 미진의 맨발이 이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무방비상태로 팽개쳐져 있는 그녀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 유현오는 다시 가슴이 찌르르하게 아팠다.

남편과의 싸움때문에 집을 나온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어느만큼 눈치 채긴했지만, 맨발로 뛰쳐 나올 정도였나. 그 정도로 집을 나오는 일이 다급했었나.

나쁜 자식....

유현오는 미진의 남편이라는 작자에게 증오심이 불끈 들었다. 보석이 보석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보석이 필요가 없다. 또한 그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보석이 얼마나 빛나는 지, 귀하고 아름다운지 진가를 전혀 모른다. 잃고난 뒤에야 알 수 있을런지......

“신문사에서 일하게 됐다는데요”

얼마전 같이 점심을 먹었던 박 교수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미진의 남편이 한울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위촉받아 일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현오는 일말의 안도감이 들었었다. 드디어 미진의 남편이 일을 하게 됐구나. 남편의 월급이 이제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미진이 어깨에 진 가계에 대한 짐이 조금은 덜어지겠구나.....

그러나 연이어 나온 박 교수의 말은 유현오의 기대를 배반했다.

“말이 논설위원이지 월급은 거의 없다고 하더군요”

“월급이 없다니?월급 안 주는 직장도 있나?”

“교통비 정도나 준대나 어쩐대나.....”

“교통비?”

“한달에 돈 천불 정도”

한달에 천불이 어디냐, 하고 유현오는 다시 안도했다. 순 맹탕보다는 말이지. 천불이면 미진이가 한 철에 스웨터 한 벌 정도는 맘놓고 사 입을 수 있을 텐데. 미진이의 하얀 얼굴에 잘 어울리는 색깔 고운 스웨터.....그런데 천불은 너무했군. 명색이 신문사 논설위원이라면서.

“교포 신문사 사정이 워낙 열악하니까요. 거기 일하는 직원들, 돈보고 붙어있는 사람이 따지고보면 몇 명이나 되겠어요. 사람만나고 기사쓰고 하는 게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들이지. 사명감같은 것도 있어 하는 걸 거고요”

예전에 제자 하나가 비자 스폰서 때문에 신문사에서 일 한적 있어 그쪽 사정을 잘 안다는 박교수였다.

“사실 논설위원이라는 직책, 그냥 명예직이지요. 한국에서는 신문사 논설위원을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직책이 아니니까요”

명예직이라. 미진의 남편은 어떤 명예를 원해서 그 직책을 맡은 것일까. 한 집안의 성실한 가장이란 직책에는 손톱끝 만큼의 관심조차도 없는 사람이.

얼마 후에 유현오가 운전대를 잡아서 도착한 곳은 한 호숫가였다.

몇 년전에 구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형 텔레비전이 고장 났다는 한 노부부의 연락을 받고 갔다 오다가 길을 잘못들어 발견하게 된 곳이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게 되면 그렇게 뜻밖의 일도 생기는 것이다. 앞으로 여기 자주 와봐야지 해놓고는 그 후엔 그 호수를 잊고 있었다. 바쁜 일상에 쫒겨서.

그 호수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났을 때였다. 그 호수가 유현오의 좋은 안식처 역할을 했었던 것이다. 깊은 상실감에 세상만사가 귀찮았을 때, 밤이고 낮이고 찾아 갔다. 새벽이나 아침에는 커피 한잔을 들고, 밤늦은 때에는 소주 한병을 사들고 가서 시간을 보내던 곳, 바로 그 이름없는 호수.

그 호수는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간간히 세월을 낚으려는 낚시꾼의 모습이나 한둘 보일까,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이 한적하고 조용했다.

유현오가 미국 와서 가장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경치 좋고 바람 좋고 공기 좋은 곳임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산이고 바다고 공원이고 사람들로 북적대는 한국과는 달리 말이다. 아내와의 결혼을 강행하기로 결심한 후 부모로부터 친척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전부 배척당하고 혼자 남았을 때 유현오는 무척 외로웠다. 자기편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혼자 남았는데 혼자 있고 싶었다. 그 누구의 간섭이나 방해 받지 않고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머리를 식힐 곳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그럴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궁리끝에 찾아낸 것이 호텔방. 룸 서비스도 일절 받지 않고 몇날 며칠이고 곰처럼 틀어박혔었다.

미국에서는 동네공원에만 나가봐도 사람의 그림자를 거의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단 몇 십분만 운전하고 나가도 인적 없는 들판과 강과 호숫가가 여기저기 늘려 있는 것이다.

자기가 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유현오가 운전을 하는 중에도 별말 없이 커피만 마시고 있던 미진이 차창 밖으로 호수가 보이자 와아, 하고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질렀다.

“참 아름답고 멋진 곳이네요!”

미진의 얼굴이 활짝 피는 것을 보자 유현오의 마음도 밝아졌다.

봄이 만개한, 아니 여름에 접어든 이른 아침의 호숫가는 기대했던 것처럼 인적이 없었다. 풀 포기에 맺혀 있던 이슬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고 코끝에 와 닿는 공기는 차가왔다. 풀 냄새와 나무 냄새와 물 냄새는 청량음료처럼 시원하고 신선했고.

“저기에 앉을만한 벤치가 하나 있긴 한데 우선 이쪽으로 좀 걸읍시다”

미진이 고개를 끄덕하고 유현오의 뒤를 따랐다. 미진과 유현오는 각각 한손에 커피잔을 든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참 좋지요?”

유현오가 미진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환하던 표정은 간곳이 없었다.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다. 말하지 않아도 뻔 할 것이었다.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 걱정일 터였다. 밥은 먹었나. 지금 어떻게들 하고 있을까 하는.

“이런 좋은 곳을 어떻게 내가 알아 냈나 궁금하지 않아요? 물어보지도 않네? 섭섭하게 스리....”

유현오가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눙치듯 말했으나 미진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을 뿐.

유현오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묵묵히 발을 떼었다. 앞서 걷는 남자와 한걸음 떨어져서 고개를 숙이고 따라가는 여자. 누가 보면 이별여행을 온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는 쓸쓸한 모습.

호수가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한 바퀴 도는 데는 10여분 정도가 걸렸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유현오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미진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침울해져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과 시간 속에서도 저 여자는 아이들 걱정에만 사로잡혀 있구나.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유현오가 말했다.

“전화 터져요, 여기. 걱정되면 아이들에게 전화해요”

이 남자는 어떻게 내 맘을 이렇게도 잘 알까 하는 표정으로 미진이 유현오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전화 해봐요.......”

미진이 핸드백에서 전화기를 찾는 걸 보면서 유현오는 말했다.

“남편에게도.....”

유현오는 천천히 다시 걸음을 떼었다.

“고등학교 때 문예부에서 잠깐 활동하는 걸 본적은 있는데 그냥 문학 합네 폼 잡고 여학생이나 꼬드기려고 그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쪽으로 소질과 능력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신문사 문예작품 모집에 1등 한 것을 보더라도. 그리고 논설위원으로 일하게 된 걸 보더라도. 참 대단한 친구예요”

박 교수는 미진의 남편이 신문사의 논설위원이란 직함을 가지게 된 걸 꽤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겨우 교통비 정도나 받는 일이라는데 뭐가 그리 부러울까.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내 속을 썩히는 남자일수록 돈 안 되는 일에만 매진한다더니 미진의 남편이 딱 그 짝이로군 하는 생각에 유현오는 오히려 한심한 생각이 들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요, 박 교수가 말소릴 죽였다. 주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동향을 살피는 눈치더니 유현오 쪽으로 입을 가져대면서 말했다.

“그 신문사에 기차게 귀여운 아가씨가 한 명 있다는데요....”

얼씨구. 게다가 남의 여자한테 눈길까지?

“여름이라나 가을이라나 이름마저 예쁜 아가씨랑 같이 일을 하게 됐답니다. 처음부터 그 친구가 홀라당 마음을 뺐겼다나 봐요.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안 되는 게 뻔할 뻔자예요. 그러다가 말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친구의 짝사랑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이게 없으니까”

박 교수가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보였다. 돈이 없다는 뜻이었다.

“요즘은 연애도 사랑도 돈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친구가 인물도, 매너도 유머스러움도 다 갖추었는데, 다른 것은 다 좋은데 결정적으로 돈이 없다 이 말이예요”

미진이가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와 눈물바람을 하는 이유, 혹시 그 아가씨 때문일까......

미진이가 발걸음을 빨리해서 유현오의 곁으로 다가왔다.아까보다 한결 개운한 표정이었다.

“통화했어요?”

미진이 고개를 끄덕했다.

“쟈시와 할머니라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할머니께 전화드렸어요. 좀 들여다보고 아침 좀 먹여달라고.....”

“아니. 아빠는 뭐하고? 아빠라는 사람은 아이들 밥도 못 먹입니까”

“...........”

“어쨌든 이제 그만 아이들 생각은 잊어버려요. 여기까지 왔으니 호수랑 하늘이랑 바람과 놉시다. 그리고 이 유현오랑”

미진이 미소를 지었다.

“미진씨.......”

아까처럼 둘은 천천히 호숫가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로 아침부터 그렇게 상심했습니까”

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봐요, 미진씨. 안 들어도 뻔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요”

유현오가 재촉을 하자 미진이 결심한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있었던 일을.

“돈 쓰고 들어온 일은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어요. 돈이야 천천히 갚아나가면 되니까. 제가 죽을 만큼 속상하고 섭섭했던 것은......지금까지 저는....저는... 적어도 그 사람이 알고는 있는 줄 알았어요.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마음속으로는 미안해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자기 대신 짐을 떠맡아 애쓰고 있는 저한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그런데......”

미진의 목소리가 잠기기 시작했다.

“힘겹고 힘겨웠어도 제가 지금까지 버텨온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었어요. 말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내 노고를 고마워 하고는 있겠거니. 저는 생각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저는 그 사람에게 밥 먹여주고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는 도구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어요. 그 사람은 이기적이고 독단적이고 비....비열한.......”

‘비열한 인간’이란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미진.

“제가 보기엔....”

유현오가 말했다. 상처받은 사람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위로와 격려이겠지만 현실을 직시하게끔 따끔한 충고를 해 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미진씨의 잘못도 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된 데에는.......”

“............”

“버릇을 처음부터 잘못들인 겁니다. 그리고 미진씨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미진씨는 지금 자기만의 테두리 안에 갖혀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테두리를 벗어나야, 눈을 들어야 넓은 세상을 볼 것인데 그 테두리를 벗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맞죠? 내 말이?”

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을 뿐.

“가도가도 끝이 나올 것 같지 않은 험한 가시밭 길이 계속 된다면 깨끗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게 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그게 현명한 일이 될지도 몰라요. 오랜기간 새장 안에 갇혀 있던 새는 문이 열려있어도 날아 갈 줄을 모른다는 말이 있어요. 문이 열려 있는지 확인조차 해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새장 안에 갇혀있는 것에 익숙한 거예요. 가시에 찔려서 피를 철철 흘리며 가시밭길을 걷는 사람 역시 그런 유형이 많은 것 같아요. 그 길에 익숙해져서, 그러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닥치는 걱정거리, 겪어야 하는 고난과 환란에 익숙해져버린 거예요.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위하지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겠거니. 겉으로는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남모르는 나 처럼 고민과 괴로움과 고통이 있으려니. 그렇게 자위해야만 현재 자기 인내에 명분이 서니까”

유현오가 걸음을 멈추고 미진을 내려다보았다 미진은 묵묵히 유현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없었다.

“미진씨가 모르는 세계가 있어요. 생계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고 아무 걱정 없이 남편으로부터 사랑만 듬뿍 받고 사는 여자들도 있어요.......”

유현오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빙빙 돌리기만 했다. 그런 여자들은 미진씨처럼 이렇게 맨발로 이른 아침에 집을 나오는 일 같은 것은 전혀 안 하지요. 아니 할 필요가 없지요 하는 말. 그리고.

“내가 오늘로 미진씨가 눈물흘리는 걸 본 게 세 번째입니다........”

유현오가 정작하고 싶은 말은 당신을 맨발로 집밖으로 내모는 일을 자행하는 남편이라는 사람과는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그 말을 할 수는 없다. 하고 싶은 말을 참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왔다.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아요. 태산같이 많아요. 그러나.... 그러나 나로서는 그냥 으레적인 말밖에 할 수가 없네요.....”

유현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힘내라는 말......매번 말하지만 힘내요, 미진씨....”

미진의 뺨 위로 눈물이, 눈물이 폭포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미진은 선 채로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그런 미진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는 유현오. 가슴속은 온갖 생각들이 천갈래 만갈래 교차되고.

미진의 어깨을 안아 줄 수 있다면. 미진의 갸녀린 어깨를 내 가슴에 기대게 하고 맘껏 울게 할 수 있다면.

미진을 안고 어깨를 토닥거려준다 한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다. 또한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유현오는 선뜻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아시아나 마켓 새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미진의 남편 얼굴이 아니고 왜 그 새 사장의 얼굴일까......

그때였다.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한걸음 정도 떨어져있던 미진이가 비칠거리며 다가오더니 와락 유현오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그리고 미진은 소리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억지로 참느라 흐느끼기만 하던 미진이었다. 미진은 울면서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미진씨......”

“아이들...아이들 때문에.......아이들을 아버지없이 키울 수 없어서.....”

남편이란 사람과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였나. 고작 그런 이유였나. 아버지없이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는 이유? 그렇다면.

유현오가 마침내 가슴에 담고 있던 말을 토해냈다.

“박차고 나와요. 남편과 헤어져요....”

유현오가 덧붙혔다.

“뒷일은 내가 책임질께요"

내가 아이들 아버지가 돼 줄께요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