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는 봄볕처럼 환한 여자였다.

부모와 주위사람들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 특유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만만해보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어떤 어려움이나 곤경에 빠져본 일도 없었고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며 살아온 사람이었음을 감안한다해도 샌드라에겐 보통 여자들에게는 찾을 수 없는 당당함이 넘치고 있었다.

일 주일 전 처음 샌드라를 만났을 때 저스틴은 생각했었다. 이 여자한테도 결핍이라는 게, 부족함이라는 있었을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직업도 가정환경도 학벌도 뛰어난 여자가 외모 또한 빠지지 않는다. 동양여자로서는 조금 이국적이다 싶은 화려하고 특이한 얼굴에 운동으로 다져진 날씬하고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딜 가나 눈길과 관심을 받는 것 같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샌드라가 커피숍안으로 걸어들어 올 때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샌드라쪽으로 쏠리는 것을 저스틴은 보았다.

샌드라는 까만색 바지정장을 입고 있었다. 양쪽 주머니 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그냥 까만색의 평범한 옷이었다. 오늘, 샌드라는 귀걸이로 그 밋밋한 의상에 포인트를 주고 있었다. 어깨까지 늘어지는 금속재질의 반짝반짝 빛나는 귀걸이가 까만색 옷을 눈에 확 뜨일 정도로 멋지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회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역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심플한 원피스였는데 왼쪽 가슴부분에 여러 가지 색깔의 스톤이 박힌 공작새 모양의 브로치를 달았는지라 바로 파티장에 간다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화려해 보였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요, 하는 뜻으로 저스틴은 고개를 저어보이며 물었다.

“뭘 주문할까요? 지난 번과 같은 것으로?”

대답을 않고 샌드라는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그러더니 저스틴의 앞에 놓은 커피컵을 가져다가 한 모금 마신다. 한번밖에 만나지 않은 남자의 입술이 닿은 자국에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입을 갖다대는 샌드라의 그 스스럼없는 행동이 놀라와서 저스틴은 아연한 얼굴이 된다.

“커피는 됐구요. 그냥 조금 앉았다가 나가 저녁을 먹어요. 아이고, 힘들어라.....”

퇴근하고 바로 피트니스 센터로 가서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라는 샌드라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운동으로 땀을 빼고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여자에게서 마구 풍겨져나오는 싱그러움과 상쾌함. 마치 방금 비를 맞은 풀잎같은 느낌이다. 섹시하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저스틴의 머리를 채운다. 저녁식사고 뭐고 얼른 집으로 가서 눕고 싶다. 피곤하고 피곤하다. 그리고 귀찮다. 영혼없는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며 오늘 저녁을 또 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저스틴의 어깨를 짓누른다.

첫 번째를 끝으로 그냥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이렇게 다시 만남의 자리를 만들고 만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다.

굳어진 저스틴의 얼굴을 본 것일까. 샌드라가 저스틴쪽으로 몸을 숙이며 묻는다.

“피곤하세요? 나 피곤해 하고 얼굴에 써 있네?”

“예. 좀......매장에 해결할 일이 많아서 신경을 좀 썼더니....”

매장 한쪽에 올개닉 코너를 새로 오픈할 예정에 있다. 해야 할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럼 그냥 헤어져서 각자 집으로 갈까요? 피곤한데 굳이 저녁을 먹으러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샌드라가 단 1초의 망설임없이 말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당돌하고 직선적인 성격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았지만 그런 식으로 뾰족하게 반응해올 줄은 몰랐던 저스틴. 기분이 약간 상하는 걸 느끼는 저스틴이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하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저스틴은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 도리라는 게 있으니까. 예의라는 것도 있으니까. 데이트를 하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오늘 두 번째로 만나자고 청한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참아주는 것도 예의다.

양쪽 부모의 강요와 요구로 이루어진 만남이든 어쨌든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해 만나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만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러세요? 그렇게 피곤해서 어떡해요 하고 염려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왜일까.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운 것은.

밥은 먹었나요. 몸살기가 있다더니 좀 괜찮아졌나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몸조심해요 하는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하는 그런 일상적인 인사를 듣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인사를 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시아나 마켓안의 모든 직원들은 저스틴을 어려워한다. 업무에 관계된 얘기아니면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미진이가 그런 인사를 해주었는데 최근에는 저스틴쪽으로 얼굴을 보이는 것도 꺼려하는 것 같다. 출근해서는 퇴근할 때까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일만 하고 있다. 미진이한테 요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까. 갈수록 침울하고 말수가 적어지고 있는 미진이. 저스틴은 가볍게 머리를 흔든다. 머리엔 떠오른 미진이 생각을 털어내느라.

“많이 피곤했었는데 샌드라한테 일격을 당하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데요. 일단 저녁을 먹기로 하죠. 어디로 갈까요?”

저스틴은 애써 웃으면서 물었다.

오늘 저녁으로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만 만나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저스틴이다. 괜히 시간을 끌면서 기회를 보고 눈치를 보느니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저스틴이다.

그런데 뭐라고 이유를 대지.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외모나 성격이나 직업이나 학벌이나 집안이나 어딜 봐도 다 괜찮은데,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결혼의 모든 조건을 골고루 잘 갖춘 백점짜리 여자인데 단 한가지 느낌이 없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무런 관심이나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도 샌드라의 성격으로 봐서 별로 기분나빠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오히려 호기롭고 시원하게 반격해올지도 모른다. 오, 그래요? 그것 참 잘 되었네요. 먼저 말해 줘서 고마워요. 사실은 내 쪽에서 말 할참이었는데. 나도 당신한테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는다는 사실 말이예요.

이번에 샌드라를 만나고 나서 저스틴은 알았다.

이성에게 향하는 감정, 그 좋아한다는 감정. 이해해주고 싶고 위해주고 싶고 늘 가까이 있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그리고 상대방으로부터도 나랑 똑같은 마음이기를 바라는 감정, 그 감정이란 것은 억지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 감정은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고 일부러 노력해서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는 것처럼 극히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사실을.

어머니의 협박과 애원과 읍소로 샌드라와 만남의 자리를 갖게 됐다. 지난번 중국여행에서 알게돼서 친하게 지내게 된 한 부부의 2남 1녀중 막내딸이라고 했다.

나이는 저스틴과 동갑이며 직업은 변호사. 그동안 학교 공부만 하느라, 변호사 자격시험에 올인하느라, 그리고 변호사가 되고 난 후에 들어간 직장에서는 회사 업무에 충실하느라 남자 만날 기회가 없어 혼기를 놓친 여자라했다.

“그 집에 초대되어가서 샌드라를 두어번 보았는데 성격이 막힌 데 없이 시원시원하고 활달해서 마음에 딱 들더라. 그것이 날 언제봤다고 벌써 나를 어머니 어머니하는 거야. 첨엔 조금 거북스럽더니 어느새 걔한테 어머니로 불리우는 게 무척 자연스러워지는 거야. 붙힘성도 좋고 애교도 많고 게다가 똑똑하고 눈치까지 빠르니 여자로서는 금상첨화지 뭐냐.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명랑하고 활발해야 해. 네 형수를 봐라. 뭐가 그리 불만이지 시집와서 이날 이때껏 웃는 낯을 한번 본 적이 없어요. 입을 한발이나 내밀고 늘 뚱해 있으니 시어미인 나는 물론이요, 네 아버지까지 할 말도 못하고 늘 눈치만 봤지 않니. 혹시라도 네 형수 비위라도 거슬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조심조심하면서. 죽은 네형이 불쌍하다니까. 마누라가 그렇게 늘 죽상을 하고 있으니 집안 분위기가 뭐가 되겠니. 컴컴한 먹구름이 잔뜩 낀 집안에서 마누라와 눈 맞춰 제대로 한번 웃어보지도 못하고 살다 갔지. 살아보니 곰보다는 여우가 낫다는 말이 헛말이 아닌 걸 알겠더라니까.”

어머니는 벌써 샌드라에게 푹 빠진 듯 했다. 샌드라와 매일 전화통화를 한다고 했다. 지난 주 공휴일에는 쇼핑을 같이 갔다고 했다.

평생을 살면서 예쁘고 멋진 옷이나 장신구를 사다가 자기 치장, 집안 장식하는 일밖에는 하는 일이 없었던 어머니에겐 얘교많고 사람의 비위를 맞출 줄 알고 더구나 물건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샌드라가 천만대군이다. 어머니는 샌드라를 며느리로 들인 후 같이 쇼핑도 하고 수다를 떨 생각에 벌써부터 들떠있는 것 같다.

그런 어머니한테 샌드라랑 안 되겠다고 말하면. 그 안 되는 이유가 단지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아서라고 말하면.

불 보듯 뻔하다. 어머니는 펄쩍 뛸 것이다. 그러나 교양있는 어머니는 큰 소리는 내지 않을 것이다. 화를 최대한 억누르느라 애를 쓸 것이다. 그리고나서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얘야. 그렇게 짧은 만남으로 벌써 결단을 내리는 것은 매우 성급하다고 본다. 두어번 만나보고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길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무리한 일이지. 적어도 열 번 정도는 만나봐야 되지 않겠니?”

어머니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샌드라와 만나는 것을 정말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저스틴이다. 별 감정이 생기지 않는 여자를 감정이 생기기를 기다리며 만나 같이 얼굴을 보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부담감이 집채처럼 크다. 그냥 이번 만남으로 딱 끝을 냈으면 좋겠는데.

저스틴은 샌드라를 쳐다보았다. 로숀밖에 바르지 않은 듯한 샌드라는 서른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어려보였다. 지난번에 화장을 했을 때는 오히려 제 나이가 보였었는데 붉은 립그로스같은 것을 바른 것 외엔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얼굴은 오히려 어린아이같아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육감적인 몸을 가진 샌드라가 앞에 앉아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앞으로 몇번 더 만나면 샌드라가 좋아질까? 몇번을 더 만나야 부담스럽고 귀찮다는 생각이 가셔질까?

“요앞에 감자탕집이 새로 생겼다는데 우리 그리로 가요”

샌드라가 말했다. 운동을 좀 심하게 했더니 배가 많이 고프다는 말을 덧붙히며.

세련되고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식성은 완전 육칠십대 아저씨다. 처음 만났을 때도 우거지 갈비탕 잘하는 집이 있다면서 그리고 갈 것을 종용한 샌드라다. 첫 만남이니까 저스틴은 군말없이 샌드라가 원하는대로 따라주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저스틴은 감자탕집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한국식당에서는 조용히 밥을 먹을 수가 없다. 상대방의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오며가며 아는 척을 해서 그렇다. 그러니까 저스틴의 얼굴을 알아보고 (저스틴은 전혀 그쪽을 기억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인사들을 해오는 통에 늘 자리가 산만하고 어수선해진다.

좀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 더구나 오늘 저녁 어쩌면 헤어짐을 고하는 자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감자탕 집은 다른 사람하고 가시고 오늘은 다른 데로 갑시다. 내가 아는 미국 식당으로.....”

저스틴은 퉁명을 떨면서 말했다. 결혼상대자를 찾으러 나온 자리에서 감자탕집을 언급하는 샌드라, 그 거침없음이 약간 얄미운 생각이 드는 저스틴이다.

지난번 갈비탕집에서 아는 척 해오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걸 샌드라는 분명히 보았다.

자신만만도 좋지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약간은 할 줄 알아아지.....

저스틴은 샌드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지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내들고 먼저 일어섰다. 샌드라는 그런 저스틴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한번 쳐다본 뒤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는 앞서가는 저스틴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오더니 턱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출입문으로 쪽으로 저스틴을 이끌듯이 걷는다. 전혀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는 듯 몸짓이다.

“미안해요. 한국 음식점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서......”

차 시동을 켜면서 저스틴이 말했을 때 샌드라는 아무 대답하지 않고 서양사람처럼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다.

웬만한 여자같으면 아주 기분 나빠할 상황. 나아가서 팩 토라져서 집으로 가버릴 수도 있는 상황. 샌드라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이상하다. 샌드라가 너무 씩씩해서일까. 마음이 가지 않은 여자여서일까. 챙겨주고 배려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샌드라로부터도 같은 대접을 받고 싶다는 생각 역시 전혀 없다.

저스틴은 대학때는 물론이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친구들의 연애상담을 도맡아했었다. 한달 아니면 두달, 길어야 1년을 넘지 않은 자기들에 비해 대학 입학할 때부터 십년이란 긴 세월을 아무 탈없이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저스틴에게 어떤 방법이 있나 궁금해했고 알고 싶어했기에.

“방법이나 비법이라는 것은 없어. 그냥 끝내주게 사랑만 해주면 돼. 밤이든 낮이든 말이지”

글쎄, 어떻게보면 백프로 농담이 아닌 것이 그 그리스 여자 ‘헤나’는 공주였다. 저스틴의 사랑만 먹고 사는 공주. 하나부터 열까지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공주이기도 했다. 물 한 컵도 제 손으로 떠먹지 않는 여자가 헤나였다. 집안 청소와 요리와 빨래와 기타 집안일은 모두 전문가의 손을 통해 해결했다. 그리스에서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고관대작의 외동딸이니 그럴만도 했다.

헤나는 저스틴과 같이 살면서 그냥 저스틴의 사랑만 받았다. 저스틴은 그에 대해 아무 불만을 가진 적 없었다.

지난 봄, 감기몸살로 아파누워 있을 때 미진이가 먹을 것을 해가지고 왔다. 음식을 식탁에 차려놓고 옆에 앉아서 먹기 좋게끔 그릇을 당겨주고 밀어주었다. 그런 대접은 어릴 때 어머니한테 외에는 받아본적이 없다.

그때 저스틴은 참 행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 그 자그마한 손길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이런게 사랑이 아닐까.

미진이를 생각하면 저스틴의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러나 그 따뜻함은 잠시뿐이고 금방 쓸쓸해지고 어두워지고 암담해진다. 눈 앞에 있는데도 늘 멀리, 이 세상이 아닌 곳에 있는 여자같아서.

미진이는 저스틴을 착잡하게 하고 미안하게 하고 안타깝게 하고 견딜수 없게 만든다. 미진이 때문에 저스틴의 마음이 늘 혼란스럽다. 어지럽다. 어떻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고백 아닌 고백을 두 번이나 해놓고 저스틴은 많이 후회했다. 자신의 경솔함에 자책을 많이 했다.

그래서, 남의 가정있는 여자한테 좋아한다고 늘 그립다고 같이 있고 싶다고 고백을 해놓고 어쩌라고. 미진의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은 아닌지.

정선우와 함께 자리를 같이 했던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약간 술김이었다. 정선우가 전화받으러 나가고 없는 미진이와 단 둘만의 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마음에 있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말을 하지 않고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사실 그때,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자기 나라, 그리스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번하는 저스틴의 전화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던 헤나였다. 그런데 헤나의 전화번호가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렸다. 디스커넥트 넘버라는 녹음음만 흘러나왔다.

헤나는 그렇게 저스틴과의 인연을 정리해버린 것이다. 가는 실처럼 이어지던 헤나와의 인연마저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하니 견딜수가 없었다.

아무일 없다는 듯 출근은 했었지만 그때 저스틴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황폐해 있었는지.

그게 몸살로 이어져서 며칠동안 정신을 못차리고 누웠었다. 그때 미진이가 음식을 가져왔고 잠시동안 시간을 보내다 갔다. 미진이가 머물다가 떠나간 자리에 남은 미진의 향기, 그 향기 때문에 얼마나 어지러웠던지. 그리고 얼마나 쓸쓸했던지. 그 향기때문에 저스틴은 다시 미진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당신이 떠나간 자리가 시베리아 벌판같이 추워요. 쓸쓸해요....

두번이나 고백을 한 후에도 미진이는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다. 남편과는 늘 그랬던 것처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고 고달프고 힘든 것도 여전한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는 미진이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더욱 짙어진 것 같다. 정선우의 농담에 여전히 하하 웃고 저스틴과 가끔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고 환한 표정으로 커피와 차를 서비스하고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응대를 하지만 뭔가 신상에 변화가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가끔은 저스틴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눈빛에 온갖 사연을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저스틴은 외면한다. 외면해야만 하는 저스틴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다.쓸데없는 말로 두 번 다시 미진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가끔 정선우가 없을 때, 둘이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저스틴은 일상적인 얘기외에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기분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편과의 사이는 어떤지 물어보고 싶지만 저스틴은 참는다. 저스틴이 참는 것은 그것뿐만 아니다. 커피잔을 들고 옆에 서 있는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싶고 어깨에 팔을 올리고 싶고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싶지만, 그렇지만 참는다. 꾹꾹 참는다.

그러면서 저스틴은 생각한다. 미진이 너는 강 건너 저쪽이 있고 나 저스틴은 이쪽에 있지...... 둘 사이에 놓인 강, 그 강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멀고 차갑고 깊다. 배가 있어야 할 텐데, 그래야 노를 저어 미진이 있는 쪽으로 건너갈 텐데 배가 없다. 튼튼하고 힘있는 배가 필요하다.

저스틴은 가끔 자신에게 반문한다. 네가 그 배를 장만하려고 노력이나 해봤냐. 아니다. 작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면 애써 노를 저어 강 저쪽 미진이에게 도착한다해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시 넘어야 할 험준하고 가파른 산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용기가 없다. 그렇다. 저스틴은 용기가 없고 자신이 없다. 용기와 자신이 있다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저스틴이 지금 너무 많이 지쳐 있기 때문이다. 기력이 없다. 노를 저어 미진이가 있는 강쪽으로 건너가기에는 너무 힘이 빠져 있다. 자기 감정에 못이겨 미진이에게 고백을 하긴 했지만 미진이를 쟁취하기 위해서 겪어내야 할 고난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샌드라를 만나보라는 어머니의 부탁에 순순히 응했는지도 모른다. 돌파구가 필요했으니까. 미진이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보면 뭐가 달라질지도 모르니까.비겁하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니다. 역시 미진이다. 미진아.

저스틴은 운전을 하면서 조용히 입속으로 미진의 이름을 불러본다.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샌드라가 물었다.

앞뒤 다 잘라먹고 단도직업적으로.

“뭘요, 뭘 말이예요?”

“저스틴 당신, 아직 그 옛날 여자, 그 그리스 여자를 못 잊고 있죠?”

저스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니까. 어찌 헤나를 잊을 수 있을까. 헤나에 대한 그리움은 평생 갈 것이다.

“지난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누군가가 저스틴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게 그 여자였군요. 아직도.. 아직도 말이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여전히 헤나가 그립고 보고싶기는 하다. 그러나 예전처럼 죽을 듯한 안타까움이나 절실함은 없다. 지금 저스틴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미진이다, 미진이.

“나는 대타예요, 그쵸?”

“무슨 그런 말을.......”

저스틴이 고개를 돌려 샌드라를 보고 헛, 하고 웃었다. 샌드라의 말이 맞긴 했지만 그 마음을 들켜버린게 미안하고 쑥스러워서.

“대타라도 괜찮아요, 난. 사실 나도 큰 기대를 하고 당신을 만난 것은 아니니까”

샌드라가 저스틴의 팔을 가볍게 툭 치면서 말했다.

“그냥 좀 궁금했어요. 미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괜찮은 직장을 마다하고 커피샵을 다년간 운영했다는 이력도 궁금했고 성공적으로 운영하던 커피샵을 하루아침에 접고 한국마켓의 사장님이라는 타이틀로 쉽게 바꾸어탔다는 점도 궁금했구요. 아무리 부모님의 명이라지만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단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단력이 대단한 사람일 텐데.... 그냥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좀 일었어요. 그리고 그중에 제일 궁금했던 점은......”

샌드라가 잠시 말을 쉬었다.

“그중 제일 궁금했던 점은 십년 가까이 한 여자만을 지고지순하게 바라보고 살았던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그거였어요. 그게 제일 궁금했어요”

샌드라가 덧붙였다. 지고지순이라는 뜻 알아요?

저스틴이 대답했다. 알아요.

둘은 ‘문 라이트’ 라는 미국 식당에 도착했다.

저스틴은 맥주와 꼴뚜기 튀김을 주문했고 샌드라는 와인과 함께 해물국수를 먹겠다고 했다.

웨이터가 물러가자 샌드라가 의자를 끌어당겨 저스틴쪽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숨까지 후욱 몰아쉬면서.

“당신 이제 큰일 났어요”

그렇게 말해놓고 그녀는 저스틴 쪽으로 얼굴을 바짝 디밀었다.

“별 기대없이 당신을 만났는데 만나보니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요. 특히 당신 얼굴에 차 있는 안개 같은 우수, 그게 맘에 들어요”

안개같은 우수라. 저스틴은 조금 놀랐다. 아주 문학적인 표현이네. 여기서 태어난 여자가 한국말을 뛰어나게 잘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표현도 참 잘 하는군......

주문한 술이 날라져 왔다. 샌드라는 와인잔을 단숨에 반이나 비웠다. 그리고 샌드라는 말했다.

“난 당신과 연애할 거야. 당신이 나를 마음에 들어하든지 말든지 그런 것은 별 상관이 없어요”

얼굴에 소년같은 장난스러움을 가득 머금고 있는 샌드라.

저스틴은 샌드라를 향해 웃었다. 당돌하지만 귀여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우리 앞으로 몇 개월만 더 사귀어봐요. 아니, 올해 말까지만요. 음. 지금이 6월이니까 앞으로 6개월, 크리스마스까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적어도 크리스마스 선물은 교환하고 헤어지더라도 헤어집시다. 어쨌든 그때까지 사귀어 보구요. 그때까지 인연을 이어보고, 그때까지도 당신이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면 깨끗하게, 아주 깨끗하게 떠나가 줄께요. 응?"

저스틴은 다시 흐흣 하고 웃었다. 오늘 저녁을 먹는 것으로 청산하려고 했었던 만남이었다.그 마음이 가셔진 것이다.그래, 그것도 별로 나쁘지 않겠군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외롭다. 외롭고 공허하다. 그래서 곁에 누군가가 필요하다. 가끔은 같이 저녁을 먹어줄 사람도 필요하고 한두시간 거리로 훌쩍 드라이브를 같이 가줄 사람도 필요하고 휴일 낮에 맥주 한잔과 함께 피자를 먹어줄 사람도 필요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을 때 그 얘기를 들어줄 사람도 필요하다.

샌드라같으면, 샌드라같으면 그게 가능 할 듯 싶은데. 늦은 밤중이라도 전화 한통만 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달려와 줄 여자같은데. 그런데.

샌드라가 그렇게 해준다고 해서 외롭고 공허한 마음이 채워질까. 외로움의 근원은 미진이로부터 생긴 것인데 샌드라가 그걸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대답해 봐요”

샌드라가 얼굴의 웃음기와 장난기가 거두어지고 있었다.

“제 말대로 할 것인지 대답해봐요”

저스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을 뿐. 그는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맥주를 다시 주문했다. 그런 저스틴을 말없이 잠깐 바라보다가 샌드라가 말했다.

“나 지금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요. 벌써 내 인내심의 한계가 온 것 같은데요.”

“그, 그럼 그렇게 해볼까요?”

“뜨뜻미지근하게 말고 확실하게요. 확실하게 그렇게 합시다라고 대답해봐요”

“...........”

“얼른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샌드라의 말대로 해요”

주문한 맥주가 날라져 왔기에 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웨이터가 물러가자 샌드라가 반 정도 남은 와인잔을 치켜들었다.

“건배해요. 우리의 육개월 계약연애를 위해서”

저스틴도 맥주잔을 들어 샌드라의 와인잔에 부딪쳤다.

저스틴은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해서라도 미진이를 정리해보자. 잘 안되겠지만 어쨌든 시도라도 해보자. 정 안되면 미진이를 다른 직장으로 옮기게 해서라도 미진이 생각을 잊어보자.....

우리의 인생이 계획한대로 원하는대로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밤 저스틴은 뜻하지 않은, 진짜로 뜻하지 않은 방문객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