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 소리가 났을 때 저스틴은 문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밤 열시, 늦은 밤이었다. 그 시간에 저스틴의 집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십중팔구 집을 잘못 찾은 사람이리라, 하고 저스틴은 생각했다.

수백가구가 사는 콘도단지였다. 더구나 외관마저 거의 똑같게 지은 집들이라 여기에 몇 번 와봤던 방문객들마저도 엉뚱한 집 초인종을 눌러대는 일이 흔했다. 가끔은 여기 사는 사람들까지 자기 집을 못찾아 헤맨다는 콘도단지였다.

몇 번 울려대는 초인종소리를 무시한 채 옷을 벗다가 저스틴은 우뚝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저스틴은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어쩌면 박 매니저일지도 모르니까.

얼마전에 결혼한 막내 여동생이 그 단지로 이사왔다고 했다. 물론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박 매니저 누나의 소개에 의해서였다. 여동생이나 그 남편이나 그 콘도를 구입할 만큼 수입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나 투자용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박 매니저 누나의 강권에 의하여 대출을 많이 끼고 구입했다고 했다.

“여동생이 엄청 마음에 들어합니다. 사장님도 살아보시니 알겠지만 워낙 럭셔리로 지어진 콘도니까요”

박 매니저의 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결혼한 지 반년도 안 된 박 매니저 여동생 부부가 걸핏하면 치고 박고 싸워댄다는 것. 그리고 싸울 때마다 중재해달라고 박 매니저를 밤이든 낮이든 상관 않고 불러댄다는 것. 그래서 본의 아니게 지난 몇 개월 동안 벌써 몇 번이나 여기에 왔었다는 박 매니저의 말이었다.

“불쑥 나타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예까지 왔는데 사장님을 뵙지 않고 간다는 게 좀 죄송하단 생각이 들어서........”

박 매니저는 어느 일요일 저녁, 세 번째로 일어난 여동생 부부의 싸움을 중재하러 왔다면서 저스틴의 집을 방문했다. 저스틴은 박 매니저를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었다. 언제든지 오라고. 무조건 오라고. 왜냐면 저스틴은 박 매니저가 필요했으므로. 박 매니저의 입장에서 보는 마켓 사정을 들어봐야 할 필요.

매장 안에서 고용주와 직원의 입장에서 듣는 의견도 물론 있었지만 술을 한잔 하면서 풀어진 상태에서는 더욱 허심탄회하고 솔직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저스틴은 생각했다.

박 매니저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랬는데 그 이후로는 여동생 부부의 싸움이 소강상태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여기까지 온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싸움만 말리고 그냥 돌아가버리는지 그동안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스틴의 짐작은 맞았다. 박 매니저였다. 그는 등을 보인 채 발걸음을 떼고 있는 중이었다. 문 여는 소리에 박 매니저가 몸을 돌렸다.

“안 계신 줄 알았네요”

“미안합니다”

저스틴은 몸을 한쪽으로 비껴 박 매니저가 들어올 수 있게 해주었다.

동양인임을 감안하더라도 남자로서는 비정상적으로 키가 작은 박 매니저.   남자의 작은 키가 가장 치명적인 결점으로 꼽히는 요즘이다. 그는 오십이 가깝도록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착한 남자였다. 또한 우직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따뜻한 남자인 박 매니저.

저스틴의 형과 아버지가 아시아나 마켓을 처음 열었을 때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충직한 심성을 바탕으로 매장의 총매니저란 직급까지 진급한 사람이었다. 집도 장만했고 급료도 꽤 높지만 그 놈의 키 때문에 선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여자하나 제대로 사귀어보지 못하고 늙어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도 그 신혼부부가 한바탕했나 보군요. 한동안 잠잠한 것 같더니.......”

저스틴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스틴은 박 매니저가 반가왔다. 누군가가 필요한 밤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던 밤.

저스틴은 박 매니저를 거실에 앉게 하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술병과 잔과 얼음과 치즈 몇조각을 찾아들고 박 매니저 앞에 앉았다.

몇 개월전 오늘처럼 박 매니저가 갑자기 들렀을 때 부랴부랴 사다가 마시다 남은 브랜디였다. 박 매니저가 저스틴으로부터 술잔을 건네받으며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쪽으로 올 일이 없지요”

“그래, 이번에는 무슨 문제입니까?”

결혼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피자 주문하는 걸로 언쟁이 붙어서 사느니 안 사느니 대판 싸웠다는 부부였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야채 피자를 원했다고 했다. 거기에 아내가 이견(異見)을 보였다. 고기를 넣은 거나 안 넣은 거나 가격은 비슷하니까 일단 고기 넣은 걸로 시켜서 내가 고기를 다 골라먹고 난 후 당신이 먹으면 될 것 아니냐는 아내의 의견. 남편이 발끈했단다. 누구를 거지로 보느냐, 내가 왜 네가 먹다 남은 피자를 먹어야 하는데? 평소에 네가 나를 얼마나 하찮게 봤으면 그 따위 발상을 하는데?

아내가 반격했단다. 그게 왜 먹다 남은 거야? 고기만 골라낸 거지. 그리고 먹다 남은 거면 어때?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개의치 않고 먹을 수도 있는 것 아냐?

둘은 치고 박고 싸웠고 이혼하자는 말까지 나왔단다. 피자 주문하면서 시작된 말다툼이 나중에는 이혼으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그렇다. 연인간이든 부부간이든 불화는 항상 작은 걸로부터 시작된다. 치약 짜는 일로, 화장지 거는 방향으로, 신발 아무렇게나 벗는 버릇으로. 내가 좋아하는 우유 커피를 상대방은 안 좋아한다는 이유로. 내가 식탁에 앉기 전에 상대가 먼저 수저를 들었다는 이유로.

그 작고 사소한 이유들이 모여서 큰 싸움으로 번지고 종내에는 이별을 입에 올리게 되는 것이다. 처음 맞은 큰 펀치에 한방에 넘어가는 권투선수는 없다. 작은 잽을 많이 맞게 되면 종내에는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친구들한테 이런저런 연애상담을 해주면서 저스틴이 얻은 진리.대부분 작은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지 큰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는 것.

“아무리 손위라지만 결혼도 안 한 제가 남의 부부문제에 일일이 개입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도 우습고 이번에 아주 단단히 경고를 주고 왔습니다. 앞으로는 아무리 SOS를 쳐도 절대로 달려오지 않겠다고요. 경찰을 부르든지 이혼을 하든지 니네들 맘대로 하라고. 연애할 땐 그렇게 죽고 못 살 것처럼 생야단들을 하더니 결혼한 지 반년도 안 돼 저렇게 삐거덕거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입니까. 그러려면 연애만 하지 결혼은 왜 했는지. 결혼이라는 제도에 회의가 드네요. 이 나이에, 이 몰골에 저한테 결혼하자고 드는 여자가 없기도 없을 테지만 지금 같으면 누가 결혼하자고 해도 아이고, 뜨거워라. 멀리 도망갈 것 같습니다”

저스틴은 박 매니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박 매니저의 여동생처럼 그렇게 싸움만 해대는 부부도 있지만 평생 가도 말다툼 한번 안하고 사는 부부도 있는데요 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적절하지가 않은 것 같아서 그냥 미소만 지은 것이다. 저스틴의 부모가 그랬고 헤나와 저스틴이 그랬었다. 같이 살면서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고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었는데.

“그건 그렇고 내가 오늘 여기 온 것은 긴급하게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박 매니저가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에 놓았다. 그는 약간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잠깐 보이더니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리부에 있는 이미진씨 말입니다.....”

편안하게 소파 뒤로 젖혀져있던 저스틴이 몸이 용수철처럼 고추 세워졌다. 미진이. 박 매니저의 입에서 나온 미진이라는 이름.

박 매니저의 태도로 봐서 별로 좋은 내용인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저스틴을 긴장하게 했다.

미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이미진씨가 집을 나온 것 같습니다. 남편과 현재 별거상태인 것 같은데”

저스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미진이가 집을 나오다니. 그러면 지금 어디에서 산단 말인가. 늘상 돈에 쪼들리는 눈치인 것 같은 미진이.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턱턱 일을 저지르는 남편 때문에 죽을 듯 힘들어 하면서도 아이들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던 미진이. 그랬던 미진이가 집을 나오는 결단을 내렸다면 남편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이고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얘긴데.

“그래요? 그런데 그게 어때서요. 부부가 같이 살다가도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별거할 수도 있고 이혼할 수도 있는 것일 텐데....”

저스틴은 무심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야밤에 찾아와 미진이의 별거 사실을 알리는 박 매니저가 좀 생뚱맞다는 생각을 하면서. 혹시 박 매니저가? 저스틴의 등줄기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혹시, 혹시 미진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박 매니저가 눈치를 챈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갑자기 머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문제는......”

박 매니저가 탁자에 내려 놓았던 술잔을 들었다.

“문제는 이미진씨가 지금 유현오씨랑 동거를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 저스틴은 동거라는 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떤 남자랑 연관이 되었다는 말인 것은 알겠는데 ‘미진이와 어떤 남자’ 라는 단어가 별 느낌이 오지 않아서였다. 잠시동안 저스틴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스틴은 알아차렸다. 미진이가 어떤 남자와, 그러니까 유현오라는 남자와 현재 같이 살고 있다는 말이라는 것을.

유현오라, 유현오라는 남자가 누굴까. 그 남자가 누군데 미진이가 같이 동거를 한단 말인가......

저스틴의 얼굴에 나타난 의문을 읽었는지 박 매니저가 유현오씨를 사장님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하고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프로 전기’의 유 사장 말입니다. 우리 매장네의 전기와 냉동, 냉장고 일체를 책임지다시피하고 있는......”

아, 유사장! 유현오씨! 정선우의 친구라는?

저스틴이 가볍게 무릎을 쳤다.

작업비를 수령해가려고 가끔 사무실에 들리는? 가끔 정선우씨와 미진이와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가는? 쓸데없는 말을 일체 않는 성격인 것 같던 과묵하고 점잖아 보이던?

그런데 미진이가 그 남자와, 그 남자와 지금 동거를 한다고? 동거를? 동거라면 한집에서 같이 산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같이 잠도?

“언제부터랍니까?”

저스틴이 다급하게 물었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걸 느끼면서. 배신감으로, 쓰디 쓴 배신감으로.

미진아. 미진아. 네가 이럴 수가 있니.......

“언제부터인지 잘은 모르겠는데.....”

박 매니저가 말끝을 흐렸다.

“미진씨가 자기 차를 운전하고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가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집을 나올 때 남편에게 차를 줘버리고 온 것 같은데....그리고....”

“어떻게 그 사실을.......”

박 매니저의 말을 자르며 저스틴이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별로 중요한게 아닌 것 같고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미진의 성품으로 봐서 자신의 신상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절대로 남들한테 알릴 리가 없었다. 만약 미진이가 그 사실을 남들한테 알렸다면 그것은 확고한 결심이 섰다는 반증이다. 남편과 이혼하고 그 유현오라는 남자와 결혼을 한다든지 하는. 그러나 그동안의 시간으로 봐서 그렇게까지 급하게 발전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며칠 전 정선우와 셋이 가졌던 저녁 식사자리에서도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던 미진이었다. 그때 미진이는 정선우의 차로 같이 움직였기에 미진이가 자기차를 타고 다니는지 어쩌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전 쯤이었습니다. 출근하는 이미진씨가 유현오씨의 차에서 내리는 걸 제가 목격했습니다. 가끔 남편이 차를 쓰면 전철을 타고 오는 이미진씨인지라 유현오씨랑 오다가다 만나 라이드를 받는구나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 다음에 또 유현오씨 차에서 내리는 미진씨를 보게 됐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상하다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둘이 동거를 하는 사이라고는 짐작을 못했는데....”

“그런데?”

“주방에서 일하는 한씨 아줌마 아시지요? 돈은 별로 궁하지 않은데 뛰어난 음식솜씨를 썩히기 아까와서 일한다는 한씨 아줌마. 그 한씨 아줌마가 유현오씨랑 같은 동네에 사나봐요. 저녁에 미진씨가 유현오씨의 차를 타고 집으로 나란히 들어가는 걸 몇 번 봤다는군요. 같은 차를 타고 출근하고 다시 같은 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 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래요........”

저스틴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미진아. 네가 내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프고 힘들어서,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어떻게든 털어내보려고 했었다. 그래서 샌드라를 끌어들여보려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가 되는구나. 이런식으로. 허망하게. 허망하고 허망하게.

“그런데 그 둘이 동거한다는 사실을 저한테 알려주는 이유가 뭡니까?”

농담 잘하고 우스개 소리를 실실 해도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무섭도록 신중한 박 매니저였다. 미진이가 남자와 동거를 하든 섹스를 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사생활일 뿐이다. 이렇듯 야밤에 찾아와 미진이의 동거 얘기를 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음이 분명했다. 단순히 아시아나 마켓 직원의 ‘가쉽’ 차원으로 미진이의 동거에 대한 언급을 해주는 것은 절대로 아닐 터. 저스틴은 불안했다. 박 매니저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있을까봐. 남의 여자인 미진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속마음을.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이미진씨의 생활이 매우 곤궁하고 궁핍합니다. 그 남편이란 작자는 전적으로 미진씨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스틴은 박 매니저의 심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미진이가 가난에 지쳐서 좀 더 윤택한 생활을 위해 유현오란 남자를 택했다는 얘기인지. 그런데 왜 그게 밤중에 찾아와서 알려야만 하는 일인지.

“어제자의 한국 신문을 보셨는지. R시의 한나라 마켓에서 일어났던.....”

그제서야 저스틴은 박 매니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저스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나라 마켓에서 일어났던 일이란 그 마켓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경리 여직원이 거래하는 업체 직원과 짜고 거의 백만불에 달하는 돈을 빼돌린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미진이도 그런 일을 시도하지 않을까, 박 매니저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점이었다. 아시아나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는 박 매니저. 그라면 충분히 걱정하고 우려하는 일일 것이다.

“유현오라는 사람, 저랑 나이도 비슷하고 해서 친구가 될까하고 밖에서 두어번 만나 술을 한잔 해봤는데 아주 진국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소비자가 그런 쪽으로는 전혀 문외한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작업비와 부속품을 속이거나 웃돈을 받아 챙기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요. 정선우씨의 얼굴에 먹칠하는 게 싫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을 질 줄도 아는 사람 같았고. 보통은 작업 대금을 받아가고 나면 나몰라하는데 유현오씨는 작업이 끝나고도 반드시 한두번은 들러서 작동이 잘 되는지 확인을 해요. 그런 점에 마음에 들어서 다른 기술자들 다 제쳐두고 제가 그 양반을 선호하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거지요........”

“..............”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굉장히 송구하지만..... 미진씨를 의심하자는 게 아니라 이미진씨 사는 형편이 매우 어렵지 않습니까. 더구나 집을 나와 두집 살림까지 하니 더욱 더 돈에 쪼들리고 있을 것 같은데요......견물생심이라고 돈이 눈 앞에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미진씨가 마켓의 수입급을 혼자 핸들하고 있는 상황에 당장 횡령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몇만불 속이는 것은 아주 쉬운데.......”

그렇다. 박 매니저의 말대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구조다. 아시아나의 모든 금전거래가 미진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선우가 있긴 하지만 그는 세금과 종업원들의 급료쪽을 맡고 있다. 미진이 혼자서 수입금과 지출금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진이는 그럴 여자가 아니다. 식료품 살 돈이 없어 수돗물로 배를 채울지언정 자기에게 맡겨진 돈에 함부로 손 댈 여자가 아니다. 박 매니저의 걱정은 괜한 한발 앞선 쓸 데 없는 것이다......

아무 대꾸 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 있는 저스틴이 자기 의견에 동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박 매니저의 말투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만약 이미진씨가 예전처럼 남편과 힘겨운 결혼생활을 한다면 제가 오늘 찾아와서 이런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왜냐면 여지껏 그런 불미스런 일이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가정이란 울타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행동을 하지 않으니까요. 회삿돈 횡령은 혼자서는 못합디다. 항상 누군가가 끼어요. 그 끼이는 사람이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불륜의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예요. 거의 대부분 그렇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양심도 도덕도 도리도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요. 그런 사람들이기에 횡령쯤은 서슴치 않는 것 같습니다. 한나라 마켓 경리여자도 결혼한지 10년 넘어 아이까지 둘이나 있는데 거래처 직원과 내연의 관계에 있었다지요. 아, 그렇다고 이미진씨랑 유현온가 하는 그 사람이 그런 사람들과 같다는 뜻은 아니고......”

“.............”

박 매니저가 하는 말들이 저스틴의 귀에는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저스틴은 건성으로 박 매니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어마어마한 결심을 하게 됐을까. 하긴 누구한테나 기대고 싶었겠지. 그 누구에서라도 위로받고 싶었겠지. 그런데 상대가 왜 하필이면 유현오일까. 왜 내가 아니고 유현오일까. 저와 내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라서? 그러니까 나한테 급료를 받는 입장이라서?

저스틴은 자기 앞에서 항상 조심스러워하고 어려워하던 미진의 몸짓을 떠올렸다. 죄지은 사람마냥 쩔쩔 매던, 잘못을 저질러 교무실에 불려온 학생같은 태도를 보이던 미진이......

가만 생각하니 미진이는 그동안 단 한번도 자신을 남자로 대우해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스틴은 미진이를 여자로 보았는데 미진은 저스틴을 월급 주는 직장의 주인, 그 이상도 그 이하로 여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난 번 아파 누웠을 무렵 음식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의 미진이. 식탁에서 이것저것 극진하게 자신을 챙겨주던 미진이를 보면서 저스틴은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정작 일생일대의 가장 큰 결단을 내리면서는 자신에게 의논한번 하지 않았다. 의논은 고사하고 지금까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내가 미진이의 남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그녀의 고용주이기 때문일까......

저스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엉킬대로 엉킬 실타래가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고 커다란 바위가 얹힌 듯 가슴이 답답했다. 앞에 앉은 박 매니저만 아니라면 얼른 샤워실로 뛰어 들어가서 찬물을 마구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띵, 하고 문자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울렸다. 샌드라였다.

잘 도착했나요?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으나 그럴 수는 없는 일. 저스틴은 짧게 대답했다.

예. 잘 도착했습니다.

1분도 안 돼 금방 답장이 왔다.

다행이네요. 술을 하셨는데 무사히 귀가했는지 걱정돼서. 근데 이런 인사도 내가 먼저 해야 하나요? 혹시나 당신으로부터 연락이 올까 기다리다가 성질 급한 내가 먼저 하네요. 지난 번에도 그렇더니.

저스틴은 다시 손가락을 놀렸다.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제가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박 매니저가 문자를 입력하고 있는 저스틴을 흘낏 보더니 말했다.

“제가 오버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사장님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

저스틴이 대답을 않자 박 매니저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다만 걱정이 돼서. 그래서....”

“............”

무슨 말을 해도 저스틴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박 매니저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저스틴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박 매니저는 바닥에 남은 술을 쭈욱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매니저가 말했다.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다시 샌드라로부터 문자가 온 것 같았으나 확인할 생각을 않고 멍하니 앉아 있던 저스틴이 박 매니저가 일어서는 걸 보면서 같이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갑자기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에?”

“이미진씨, 그만 두라고 할까요?”

“...........”

기습적인 저스틴의 물음에 박 매니저는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다.그러다가 얼른 정신을 차린 듯 황급하게 대답했다.

“그...그런 뜻은 아니고......절대로 그런 의도는 아니고.....”

“어떻게해야 좋을지 박 매니저님께서 방법을 강구해 보세요. 제가 보기엔 그렇게 염려를 할 바에야 차라리 미진씨를 퇴사시켜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믿을 수 없는 직원을 계속 쓸 수는 없잖아요. 미래의 범죄자를 옆에 두고 늘 의심해가면서 일을 시킨다는 것은 내가 괴로울 것 같아서요. 또한 미진씨 역시 힘들 것 같고. 우리가 자기를 그런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요....”

“그렇다고 미진씨를 퇴사시키시면....그냥 그렇다는 걸 알려드리는 것 뿐인데...조심하시라고....그리고...그리고......”

“조심요?무슨 조심요?”

“앞으로는 세밀하게 금전 출납부를 확인하시라고......”

“글쎄요, 그렇게 한다고 마음먹고 횡령하려드는 사람을 막을 수 있을까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나라처럼 불미스런 사태로 신문에 나고 싶지 않으려면”

“............”

“아니면 유현오씨와의 거래를 끊어버리는 것은 어때요?”

저스틴의 말에 박 매니저는 손까지 내저었다.

“그거야말로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쌔고 쌘 게 전기 냉동기술자인 걸로 아는데”

“기술자야 많지만 아까 말씀드린대로 그만큼 양심적으로 일 해주는 사람을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서....”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미진씨를 자르는 것도 안 되고 유현오씨와 거래를 끊는 것도 안 되고. 어떻게하면 되겠습니까? 좋은 의견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그제서야 박 매니저는 저스틴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 즉 기우(杞憂)를 가지고 지레 사람을 평가하고 짐작하고 의심하지 말라는 저스틴의 뜻을. 일단 내 회사 직원으로 채용해서 일을 맡겼으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기 전까지는 계속 믿어주어야 한다는 뜻을.

“알...알겠습니다.....”

박 매니저가 인사를 꾸벅하고 돌아갔다. 저스틴은 현관문 바깥에까지 박 매니저를 배웅했다. 문을 닫고 돌아선 저스틴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섰다. 미진이가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한다는 사실이 다시 저스틴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 사실이 한겨울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저스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놀라운 일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백번 양보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동거를 할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말간 얼굴로 자신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알면서. 그녀에게 그렇게 앙큼한 구석이 있었나.

저스틴은 부엌으로 가서 찬물 한잔을 숨도 쉬지 않고 마셨다. 그런데도 답답한 마음은 뚫리지 않았다.

언제인가 어머니가 미진이를 두고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상냥하고 밝은 척 하려 애를 쓰고는 있지만 구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분위기를 감출 수 없는 여자라고. 그 어두운 구석이 마음에 걸린다고. 무슨 일을 저질러도 저지를 것 같다는 느낌이라고.

그때만 해도 미진이에게 마음이 가기전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을 그냥 예사로 흘려들었다.

저스틴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잘 자요. 내 꿈 꿔요.

빨간 하트와 함께 와 있는 샌드라의 메시지였다. 저스틴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지어졌다. 당차고 거침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리광도 부릴 줄 아는 샌드라, 귀여운 여자.

샌드라에게 열중하면서 서서히 미진이를 접으려고 했었다. 미진이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샌드라를 채워보려고 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게 가능할 것 같았다. 샌드라와 자주 만나 시간을 보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저스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진이가 다른 남자와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은.

참으로 이상했다. 단념이, 쉽게 단념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것이다. 단념 대신에 미진이를 믿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미진이는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행동할 여자가 아니라는 믿음 및 미진이가 절대로 그 유현오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동거하는 게 아닐 거라는 믿음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고 저스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만에 하나 미진이가 유현오를 많이 사랑해서 같이 사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어쨌든 미진이의 말을 한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저스틴은 전화기 화면을 확인했다. 11시 7분 전. 전화를 걸기에는, 문자를 보내고 받기엔 너무 늦은 시간.

저스틴은 전화기를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고 침실로 들어갔다.

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간에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잠을 자는 일 외에는.

저스틴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동거. 칙칙하고 음습한 단어, 동거라는 단어가 머리에 다시 떠오르면서 갑자기 불같은 분노가 목구멍으로부터 치밀어서 저스틴은 벗은 윗도리를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상처입은 짐승처럼 헉헉거리면서 방안을 서성거렸다.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나한테 의논이라도 좀 하지. 의논도 하지 않고 덜컥 동거부터 하다니! 다른 남자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아까부터 가슴 속 밑바닥으로부터 미친 듯 끓어오르고 있는 형연할 수 없는 감정, 그것은 질투였다. 그 질투라는 감정은 저스틴이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약한 무엇이었다. 유현오라는 나이 많은 남자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생각하니 저스틴은 참으로 참담하고 부끄러웠다.모든 면에 자신있고 대범하다고 스스로 대견하게 여겼던 자신이 고작 이런 존재밖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미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녀가 어떠한 결정을 내렸든지 간에 그 결정을 존중해주고 이해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질투 따위나 하고 있다니.

저스틴은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친 손길로 냉장고를 열었다. 아까 박 매니저에게 따라주고 남은 술이 있었다. 저스틴은 병째로 한 모금 들이마셨다. 타는 듯한 통증이 목구멍으로 전해져왔다.

그때 저스틴의 머리를 강타한 생각. 밤이 늦었던지 말았던지 미진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미진의 입으로 왜 유현오란 남자와 동거, 아니 한집에 같이 살게 됐는지 그 이유를 듣기 전까지는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저스틴은 거실로 뛰듯이 나가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미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통화 가능하면 전화 좀 해요.

저스틴은 전화기를 노려보았다.10여분의 시간이 흘렀다.

미진으로부터 전화는 오지 않았다. 아니, 문자를 열어보지도 않고 있었다. 저스틴은 다시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거실을 서성대다가 저스틴은 침대로 가서 걸터앉았다. 눈은 여전히 전화기의 액정화면 쪽으로 고정시킨 채.

밤 열 한시가 넘었다. 미진이는 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니면.

유현오와 나란히 한 침대에 누운 미진이의 모습이 저스틴의 눈앞에 떠올랐다. 유현오의 손이 미진이의 옷을 벗기고 있다. 옷을 벗긴 유현오의 손이 미진의 가슴으로 다리로. 그리고.....

“안돼!”

저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