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혼 불 14.유혹
이계숙 (minky1)
2015-3-1 07:09:10
“제가 부담스러우세요?”
여름이가 그렇게 물어왔을 때 창민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부담스럽다고 할 수도, 그렇지않다고 말할 수도 없었기에.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았다. 그쪽이 애매모호한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는 방법이니까. 비중을 보자면 부담스럽다는 쪽이 더 무거웠다. 그러나 다른 쪽을 보자면 암담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 여름이만이 유일한 기쁨이요, 행복이요, 낙이었다. 그러니 딱히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할 수밖에.
“대답해봐요. 제가 부담스럽죠?”
여름이가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며 다시 물었다. 창민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말했다.
이 한심한 자식아. 지금 여기서 넌 뭐하고 있니?
정말로 자신이 한심하고 대책없는 놈이라는 자책이 들었다. 지금 자기가 사랑놀음을 하고 있을 때인가 말이다. 그 자책과 함께 가슴을 치는 안타까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예전처럼 평안한 일상이 유지되고 있었을 때 여름이와 이런 시간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아까 여름이의 집으로 들어 오면서 언뜻 시계를 봤을 때 아홉시가 가까와 오고 있었다. 지금은 열시가 넘었을 것이다. 여름이의 집에서 잘 수는 없는 일이고 돌아가야 하는데 그 돌아가야 할 일이 또한 태산처럼 무거운 짐으로 창민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 젠장. 내 인생이 어쩌다가 이리 구질구질하게 됐을까….미진에 대한 분노가 새삼 치솟았다. 그 미친년은 왜 뜬금없이 갑자기 짐을 싸들고 나가서 나를 이렇게 곤란한 지경에 빠트리고 있을까.
“아저씨?”
“부담스럽다기보다…”
정말로 짜증난다, 여자들은. 미진이도 그렇고 여름이란 이 아이도 그렇고 뭘 하나 물으면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대답하기 곤란하고 난감한 질문인가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갈 일이지 왜 이리도 집요하게 끝까지 물고 늘어질까.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그 대답을 들고야말겠다는 얼굴인 여름이었다. 창민은 소파에 비스듬히 눕다시피 하던 몸을 고추 세웠다.
“그냥 겁이 나서…”
“제가요?”
“으응….”
그 말은 사실이었다. 갈수록 여름이가 겁이 났다. 왜냐면 여름이란 아이를 종잡을 수가 없어서.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되바라지고 맹한 것 같으면서도 영악하고 착한 것 같으면서도 욕심과 실속은 대단하고 수동적인것 같으면서도 대담하고 저돌적인 아이, 여름이. 성녀와 악녀가 한 몸에 공존하고 있는 아이, 여름이.
어느 부분이 여름이의 참모습인지 갈수록 헷갈리는 창민이었다. 어느 부분에 맞추어 행동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창민이었다.오늘 저녁만 해도 그랬다. 창민에게 먼저 입술을 갖다댄 것은 여름이었다. 창민은 여름이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름이는 키스가지고는 성이 안 찬다는 듯이 계속 몸을 밀착시키면서 창민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무기삼아 공격을 가해오고 있는 것이다.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와인 한잔씩을 곁들여 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여름이는 그냥 보통 아이였다. 길거리에서 흔히 오다가다 볼 수 있는 평범한 처녀아이. 또한 여름이는 저녁을 다 먹을 때까지 처음 전화로 한울 신문사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된 것을 알려주던 때의 목소리톤으로 일에 관계된 얘기만으로 일관했다. 누가 보아도 직업상 저녁 식사를 곁들인 미팅을 하고 있는 걸로 보일 정도로. 그러나 저녁을 먹고 바깥으로 나와 창민이 담배 한대를 피우고 난 뒤 작별인사를 했을 때 여름이가 말했다.
“저희집으로 가서 술 한잔 더 하지 않을래요?”
그렇쟎아도 집으로 들어가기 싫었던 창민이었다. 집이란 박교수의 집이었다. 지금 창민은 박 교수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며칠전, 아파트를 비우고 짐을 챙겨 박 교수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미진이가 나가버리고 난 후 한 달은 이럭저럭 버텼다. 그런데 두달째로 접어들자 아파트 렌트비와 내야할 공과금을 마련할 일이 캄캄한 것이었다.아파트 렌트비가 석달 이상 밀리게 되면 강제퇴거라고 했다. 어느날 외출했다 돌아와보면 현관문 열쇠가 바뀌어 있든지 아니면 새벽에 단잠을 자고 있을 때 시퀴리드가드와 아파트 관리 매니저가 갑자기 들이닥쳐 퇴거를 명령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겁이 덜컥 난 창민이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제이와 케이한테 보이고 겪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렌트비가 더 밀리기 전에 일단 아파트 방을 빼는 게 급선무였다.
창민은 쟈시와 할머니에게 사정설명을 했다.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아이들을 당분간 맡아달라고. 만약 쟈시와 할머니가 거절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 창민의 사정을 딱해하면서 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제이와 케이가 태어날 때부터 베이비 시터를 맡아서 아이들에게 정이 듬뿍 들대로 든 쟈시와 할머니였기에.
바깥에 내다놓아도 아무도 집어가지 않을 것 같은, 짐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넝마같은 짐들 몇가지는 박 교수의 거라지로 들어갔다. 그리고 당분간 머무르기로 하고 그 집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창민은 집도 절도 없는 신세였다.
박 교수의 집은 부촌이라 일컬어지는 신흥 주택단지였다. 다운타운과 좀 떨어진 교외에 위치해 있었다. 최근에 건축되는 집들이 다 그렇듯 최신형, 최첨단의 기술로 지어진 집이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손과 몸을 가능한 한 덜 쓰고도 더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를 연구한 전문가들의 고민이 전부 녹아든 결집체였다. 모든 게 버튼 하나로 통했다.게임개발에 일가견이 있는 만큼 기계 작동하는 데는 두려움이 별로 없는 창민도 어리버리해 할 만큼 하나부터 열까지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만 완벽하고 신속하게 작동이 이루어지는 우주선같은 집. 목욕탕이 방마다 갖추어진 침실 다섯개의 집이었다. 큰 통창으로 푸른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서재와 원하는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영화관과 각종 운동기기로 마음놓고 체력단련을 할 수 있는 짐을 갖춘 집에서 박 교수는 살고 있었다.
예전부터도 창민은 박 교수의 집을 생각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왔지만 요즘은 그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자신의 신세가 비참해서. 술주정뱅이와 마약중독자가 대부분 거주하는 최하 빈민 아파트세도 못내 쫒겨나다시피 나와 있는 자신의 신세가.박 교수의 집으로 들어가던 첫날을 창민은 잊지 못한다. 저 멀리서도 방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크기의 박 교수의 집. 예전에 몇번 놀러갔던 집이었다. 그때도 크고 웅장하다는 생각을 하긴했었지만 거지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없이 빌붙어 사는 입장에 처하니까 더욱 위풍당당해보이는 집이었다.
운동장만한 드라이브웨이 한쪽에 고물차를 세우고 출입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올려다보던 그날의 하늘은 왜 그리 높고 파랗던지.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그 어떤 침입자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당당하고 완강하게 닫혀 있던 현관문. 그 현관문의 위용과 기세에 압도당해 기가 팍 죽던 굴욕적이던 그날.
미리 문을 좀 열어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박 교수나 그 아내나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현관문은 성처럼 굳게 닫혀있었고 창민은 한동안 초인종을 누르지 못했다. 당분간 지낼 건데 뭐 어때, 하고 호기롭게 척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 뿐 현관문 앞에서 거의 삼십분이나 서성거렸다. 서성거리며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담배를 피우는 일일 뿐. 창민은 그날 현관문 앞에서 담배를 세대나 피웠었던 것이다.
담배를 피우며 창민은 몇번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었다. 여름 하늘은 여전히 돌을 던지면 구멍이 뽕 뚫이며 푸른 물이 콸콸 쏟아져내릴 듯이 청명했다. 창민은 속으로 한탄했다.누구는 와이프 잘 만나 이렇게 큰 집에서 돈 걱정없이 떵떵거리며 살고 누구는 이 나이에 집도 절도 없이 친구집을 전전하는 신세고… 박 교수가 가진 복이 뼈저리게 부러웠다. 박 교수 아내의 재테크하는 수단과 배짱이 부러웠다.
사실 박 교수의 월급은 그리 많이 되지 않았다. 지금의 부를 이룬 것은 박 교수의 아내 덕분이었다.처음에는 박 교수나 창민이나 형편이 모두 같았다. 두 집 다 방 한개짜리 아파트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진과 박 교수의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미진이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전자제품 콘센트를 일일이 빼고 다니면서 콩나물 한봉지를 구입하는 데도 몇번 고심을 할 때 박 교수의 아내는 다른 방법에 눈을 돌렸다. 친정에서 돈을 끌어다가 고물차 한대를 사서 운전해 다니면서 부동산을 보러 다녔던 것이다.
그때 창민은 여자가 조신하게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 밖으로 나댄다고 못마땅해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현명하고 똑똑한 여자인지. 박 교수 아내는 다 쓰러져가는 집 한채를 아주 헐값에 구입했다. 그 다음 한달에 걸쳐 그 집을 다 고치고 개조했다. 그리고 몇달 후 그 집을 거의 배나 되는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몇달사이에 십만불이 넘는 차익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십만불로 다시 다른 집을 샀고 역시 같은 방법으로 되팔았다. 그러기를 몇번 하자 벌써 박 교수네의 수중에 집한채값이 저절로 굴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식으로 돈 불리기는 박교수의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할 때까지, 그리고 부동산 경기가 예전처럼 원만하지 못해 돈을 더 이상 벌수 없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이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창민이 부럽고 아쉬운 표정을 지을 때마다 박 교수가 말했었다.
“우리 와이프는 그 당시 돌보고 키워야 할 아이가 없었잖아. 아이가 딸렸다면 절대 못할 일이지. 육아에만 전념하라고 내가 못하게 했을 지도 모르지. 그리고 와이프에겐 절대적인 조력자가 있었기도 하고 말이야”
절대적인 조력자란 바로 유현오였다. 박 교수의 먼 친척 남편되는 유현오는 전기냉동 기술자라고 했다. 그래서 건축계통으로도 잘 아는 사람이 무궁무진 많았다고 했다. 그는 헌집을 사서 증축 개축하는데 필요한 사람들을 조달해 주기도 하고 매물들을 소개해 주기도 하면서 박 교수의 재산을 불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세상일이란 참 재미있다. 그리고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말이 딱 맞다. 알고보았더니 미진이가 현재 그 유현오란 남자집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박 교수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창민은 잠시 머리가 띵했다. 어떻게 미진이랑 그 유현오랑 남자가 엮어질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었다. 유현오가 아시아나 식품의 전기와 냉동기기들을 전담하고 있는 기술자이기에 미진이와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긴 했지만 창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않았던 것이다. 미진이 유현오랑 얽혔다는 사실이.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다는 사실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박 교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었다.
“믿어도 돼, 그 형님을”
박 교수는 유현오의 성품을 잘 안다고 했다.
“내가 장담하건데 그 형님, 남의 여자나 취하는 그런 사람 절대로 아니야. 그냥 미진씨를 도와주려는 것 뿐일 거야”
그래서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얼굴로 창민은 박 교수를 쳐다보았지만 아무말을 하지 못했다. 믿지 못하면 어쩔 것인가. 설사 둘이 같이 잠을 잤다 한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쫒아가서 미진을 끌어올 생각이 없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 밖에.창민은 그저 미진이 괘씸했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게 나몰라라 모든 것을 팽겨쳐버리고 나갈 수 있었던 거지.
미진이 집을 나간 처음 얼마동안은 금방 돌아올 것을 창민은 믿었다. 네 까짓게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니까, 하고. 그렇게 창민이 자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라면 벌벌떠는 여자니까 곧 돌아오리라. 가진 돈도 없으니까 밖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미진이 돌아올 것을 믿었기에 일부러 전화 한통하지 않았다. 이참에 아예 버릇을 고쳐놓아야지. 어디 여자가 건방지게 집을 나가 나가길.
그러나 일주일, 보름이 지나도록 미진은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가출의 배후에는 유현오라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박 교수로부터 알아낸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창민은 감지했다. 이제 미진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물론 돌아온대도 창민은 받아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여자를 받아줄 만큼 자신이 형편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창민이었다. 창민은 속단했다. 그 년놈이 벌써 사단이 나도 열번은 더 났을 것이라는 것을. 박 교수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라고 옹호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아무 일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이고 그리고 아무일 없다고 믿는 사람이 병신 쪼다 아닌가. 그 유현오란 놈이 고자라면 모를까 말이다.
후유, 하고 창민은 소리내어 한숨을 쉬었다. 여름이가 무서운 것도 무서운 거지만, 그래서 그 핑계를 대긴 했지만 키스 외엔 더 이상 진도를 내볼 욕구가 생기지 않는 창민이었다. 손을 내밀면 금방 잡히는 농염하고 도발적인 여름이가 앞에 있는데도.조금전에 했던 몇번의 깊은 키스. 그것도 늘 그랬던 것처럼 여름이가 먼저 주도했다. 몇달전 호텔의 정원에서 첫 키스를 나눈 이래 만날 때마다 키스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동안의 키스는 밖에서, 그러니까 키스 외에는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할래도 해 볼수 없는.
지금은 달랐다. 여름이의 아파트 안이었다. 둘 밖에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육체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위기.그러나 창민의 행동을 가로막고 있는 현재의 가장 큰 걱정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교외에 떨어져 있는 만큼 30분 이상 운전을 하고 박 교수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박 교수 아내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미소와 친절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얼굴에 드러나는 멸시감와 무시감을 모를 바 없는 창민이었다.
하루 빨리 그 집을 나와야 할 텐데...
박 교수가 창민의 일자리를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 했다. 창민 역시 매일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인터넷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큰 대박을 터뜨릴 예상을 하고 준비중이던 게임 개발은 잠시 뒤로 미루어야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급한 것은 일자리였다. 우선 직장을 먼저 잡아야했다. 직장만 잡으면 바늘방석같은 박교수의 집을 나올 수 있었으니까.
예상외로 직장은 쉬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에니메이션 회사 두어군데에 인터뷰라는 것을 보기는 했으나 입사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웬만한 회사들은 모두다 경력자를 원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이라는 것을 한번도 해본 일이 없는 창민에게 경력이라는 게 있을리 만무했다. 그래서 번번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에서 나오는 월급이래봤자 담배값도 안됐고 박 교수가 틈틈히 아내 몰래 쥐어주는 몇푼의 돈으로 용돈과 기름값을 충당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정말로 구차하고 또 구차한 나날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안 되면 한인이 운영하는 차 딜러에 세일즈맨이라도 들어가 일하라는 박 교수에 말에 화를 벌컥 냈던 창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국 최고의 대학을 나온 사람한테 차 세일즈맨이라니. 더구나 한울 신문사의 논설위원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정 안되면, 정 안 되면 한국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창민이었다. 언제까지 박 교수의 집에 빌붙어 있을 수는 없는 일,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나가버리지 뭐.그게 미진에게 복수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나쁜년, 감히 지까짓 게 나를 버리고 집을 나가?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됐다, 미진이가.
차 사고는 대충 해결이 됐다. 한국에서 부쳐온 돈으로 상대방의 렌트카비를 다 부담해주었다. 문제는 차 보험료가 껑충 뛰고만 것인데 그거야 목돈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매달 은행에서 자동이체되는 보험료가 약간 높아진 것뿐이었다.그래서 예전처럼 아무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일상이 이어질수 있을 것 같았다.그랬는데 어느날 저녁 미진이가 얼음장같이 싸늘한 얼굴을 해가지고 들어오더니 집을 나가겠다는 통첩을 해 온 것이다. 그리고는 뒤 한번을 돌아보지 않고 바람처럼 집을 나가버렸다.
미진이 집을 나간 후 여름이가 몇번이나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으나 창민은 응할 수가 없었다. 돈이 없어서. 선물은 그렇다치고 밥도 못사주면서 어떻게 여자를 만날 수 있겠나. 여름이는 굴하지 않고 계속 연락을 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어쩔수 없이 여름이를 이탈리안 식당에서 만난 것이다. 박 교수가 ‘잘 해봐. 아예 오늘 저녁 만리장성을 쌓아버려’ 하고 눈을 찡긋거리면서 찔러 넣어준 백불짜리 한 장을 들고. 아무리 궁기가 덕지덕지낀 살림이지만 여름이로부터 얻어먹을 수는 없으니까 창민은 말 없이 그 돈을 받았다.
창민은 저녁을 먹으면서 여름이에게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털어놓았다. 자존심 상하고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름이의 만나자는 요청이 계속 집요하게 이어질 것 같으니까. 그럴 때마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는 것도 힘드는 일이니까.
“와이프가 집을 나가버렸어. 말을 안 해서 무슨 이유인지는 나도 몰라. 그리고 아파트를 비웠어. 나는 지금 친구집에 기거하고 있어.”
창민의 말에 여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물었다. 아이들은요?
“베이비시터 할머니에게 가 있지. 당분간 한푼도 베이비시터비를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고맙게도 맡아주시겠다고 해서”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묵묵히 둘은 식사를 마쳤고 창민이 계산을 했다. 박 교수가 준 백불짜리가 몇십불만 남기고 마른 모래처럼 날아가버렸다. 여름이의 집에 가서도 창민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여름이가 내온 와인만 찔끔거리면 마셔댔을 뿐. 그러다가 키스를 했고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키스를 했다. 키스외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여름이는 흰 탱크톱을 안에 입고 속이 다 비치는 얇은 보라색 남방을 입고 있었다. 단추 구멍이 헐거웠는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그랬는지 단추 몇개가 풀어져있었다. 여름이는 단추를 다 채우더니 일어났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새 와인잔을 들고 왔다. 벌써 두 잔째였다. 아까 식당에서 마신 것을 합치면 벌써 세 잔째. 창민은 여름이의 손에서 와인잔을 받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렇잖아도 돌아가기 싫은데 취하면 여기 소파에서라도 자고 가지 뭐, 하는 배짱이 생긴 것이다.
“아저씨….”
여름이가 창민에게 다시 다가갔다. 와인잔을 높이 쳐든 채 창민은 또 여름이의 입술을 받았다. 달콤하고 시큼한 와인 내음이 배여있는 여름이의 입술은 늘 새로왔다. 마치 더운 여름날 냉장고에 재워져있던 수박을 먹는 느낌이었다.여름이가 창민의 손에 든 와인잔을 탁자에 놓더니 그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가슴에다 갖다댔다. 바람이 잔뜩 든 공같이 탱탱한, 탄력있는 여름이의 가슴. 창민이 움찔하고 손을 뺐다.창민이 손을 빼자 여름이가 창민의 손을 다시 끌어다가 자신의 가슴에다 갖다 대게 하면서 속삭였다. 괜찮아요. 아저씨가 원하는 거잖아요. 그랬다. 간절히 원하는 것. 그러나. 그렇다고 원하는대로, 본능이 시키는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개돼지가 아닌 이상. 창민이 힘겹게 내뱉았다.
“이러지 마라, 여름아”
여름이가 창민의 몸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냈다.
“….”
어색해진 분위기. 여름이는 자신의 몸을 탐해주길 원하고 본능보다 이성이 , 그러니까 골치 아픈 현생활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창민은 선뜻 그러지를 못한다. 여름이는 부엌으로 가서 아예 와인병을 들고 왔다. 그리고 반쯤 비어 있던 창민의 잔에 보랏빛 액체를 넘치도록 따랐다. 그리고는 창민의 손에 들려주었다. 창민은 꿀꺽꿀꺽 소리나게 와인을 마셨다. 마구 목이 탔다. 실내는 추울 만큼 에어컨이 마구 돌아가고 있음에도 목이 탔다. 가슴은 불덩어리가 올라오는 것 처럼 뜨거웠고.
창민은 오늘 저녁같은 자리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창민은 직감한 것이다. 피할 수 없음을. 오늘 저녁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말 것임을.
“저는 아저씨가 좋아요”
여름이가 와인병을 부엌으로 가져다 놓고 돌아오면서 말했다.
“가면 갈수록 좋아요”
“….”
“아저씨가 이미 눈치챘는지 모르지만…”
여름이가 어린 새처럼 창민의 품을 파고 들었다.
“저는 그동안 막 놀았어요. 거침없이 놀았어요. 공부해라, 좋은 대학 들어가라, 얌전하게 있다가 좋은 남자 만나 시집이나 가라는 부모님의 찍어누름에 반발하느라 일부러 더 그랬어요. 그래요. 그동안 저는 여지껏 누구를 진심으로 좋아해본적도 사랑해 본 적도 없어요. 또한 저는 그동안 돈 많은 사람을 좋아했어요. 돈만 많으면 나이와 인물에 상관없이 데이트해 주고 같이 잠을 자 주었어요…. 그런데…”
여름이가 바짝 붙어 앉더니 창민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얘가 지금 뭘하려는 걸까. 창민은 여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갖 골치아프고 복잡한 일들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이 상황에 여름이 일까지 더 보태고 싶지않은데 지금 이 아이는 뭘 시도하려는 걸까.
“돈이 없어 제가 원하는 것을 척척 사주지 못하지만 지금껏 제가 만났던 그 어떤 남자보다도 아저씨가 나는 좋아요. 왜인지 알아요?”
“….”
“달라서요…”
창민은 여름이의 손길을 저지하지 않고 묵묵히 내려다 보았다.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동작도 할 수 없었기에.
“아저씨는 달라요. 다른 남자와는 달라요. 제게 함부로 손을 대지 않잖아요. 지금 역시 그렇잖아요”
“….”
“제가 아저씨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창민의 셔츠 단추를 다 풀고나서 여름이가 아까 채웠던 자신의 남방의 단추를 도로 하나하나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남방을 벗었다. 끈만 달린 탱크톱을 입은 여름이의 상체가 드러났다. 한쪽에 켜진 스탠드의 불빛이 여름이의 통통하고 하얀 상체를 비추고 있었다. 양쪽에 볼 우물이 파져 순진하고 여리고 착하게 생긴,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것같은 여름이의 얼굴과 풍만한 가슴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저 남자경험 많아요, 아저씨.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여름이가 말했다. 그리고 여름이는 마침내 상체를 가리고 있던 탱크톱을 벗어 던졌다.이어서 양손을 뒤로 돌리더니 브래지어를 떼어냈다. 출렁, 하고 희고 탱탱하고 풍만하기 그지없는 여름이의 가슴이, 붉은 젖꼭지가 도발적으로 앞을 향해 빳빳하게 서 있는 여름이의 가슴이 드러났다. 여름이의 가슴이 드러나는 동시에 음, 하는 신음소리가 창민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창민은 얼굴을 외로 돌리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일그러진 창민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낭패감이었다. 그리고 그런 창민을 보는 여름이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나타났고.
“아저씨. 눈 떠봐요”
여름이가 창민의 몸을 올라타듯 가까이 다가가 창민의 양쪽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눈 떠요”
“여름아….”
“괜찮아요….”
창민이 일초 정도동안 눈을 떴다가 다시 질끈 감았다.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여름이의 가슴, 입에 물면 금방이라도 달콤하고 싱싱한 수액이 뿜어져나올 것 같은 그런. 아아, 오늘 나는 잘못걸렸다. 여길 오는 게 아닌데. 나는 얼른 이방을 나가야 한다. 뿌리치고 얼른 나가야 한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몸이 마음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얼굴은 붉어지고 그리고, 그리고 아랫쪽의 한부분이 힘차게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저는 아저씨의 이런 냉철함이 너무 좋아요. 원하는 걸 앞에 놓고도 허겁지겁 덤벼들지 않잖아요”
얘야. 내가 허겁지겁 덤벼들지 못하는 것은 내 처한 상황이 너무 힘겹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때문이란다. 그리고 나는 결혼한 사람, 너보다 나이가 열살이나 많은 사람, 그리고 우리는 직장동료잖아. 그 여러가지 벽이 앞을 막고 있는데 그 벽을 무시하고 너를 취할 수가 없는데….
“아저씨…저 무서워하지 말아요...”
여름이가 창민의 아랫부분에 손을 갖다댔다. 바지를 뚫을 기세로 힘차게 팽창해 있는. 여름이는 그 부분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
창민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한 여름밤, 여름이의 유혹.
11
쪽지
Back
목록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