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될 겁니다”

유현오가 말했다. 아무런 표시를 내지않으려고 애를 쓰는 데도 목소리가 착 가라 앉아 있었다. 얼굴은 억지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는데 목소리만은 어쩔 수가 없는 건가.

“모두 다, 미진씨가 원하는대로 잘 될 거예요….”

유현오는 발부리에 걸리는 돌멩이 하나를 툭 걷어찼다.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찼는데도 돌멩이는 호수 근처로 굴러가더니 물안으로 소리를 내며  빠졌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란 방금 찬 돌멩이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유현오는 생각했다.

무심하게, 정말로 아무런 의도없이 찬 돌멩이였다. 지금 그 돌멩이는 길가에서 누워 햇빛 받던 돌멩이에서 컴컴한 물속으로 굴러떨어진 돌멩이가 되었다. 이제 그 돌멩이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어쩌면 영원히 물 밖 세상을 구경할 가능성이 없을지도 모르는 돌멩이, 가엾은 돌멩이.

제니의 전화는, 그러니까 제니는 미진으로부터 동생과 유현오를 지켜야한다는 일념으로 미진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니의 전화는 결국 미진과 유현오를 두번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고 만 것이다. 그게 제니가 원하던 것이었긴 하지만.

“어쨌든 잘 될거니까, 미진씨…그러니까 미진씨는…그동안 너무 고생했으니까 이제는 잘 될 일만 남은 거야…."

거기까지 유현오는 입밖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같아서는 미진에게 소리내어 말하고 싶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말, 미진씨.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지금 미진씨가 해야 할 일은 저스틴이 하자는대로 하는 거야. 무조건 그의 요구에 따라 줘. 결혼을 하자면 하는 거야. 망설이지 말고, 이거저것 따지지말고 예스를 하란 말이야. 알았지? 하는 말.

그러나 유현오는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있다. 아파서였다. 가슴 한복판에 돌덩이를 눌러놓은 듯 묵직하게 아파서. 그래서 아까부터 잘 될 거라고, 그냥 잘 될거라는 같은 말만 되뇌이고 있었다.

미진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은 후부터는 말이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유현오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

몇달전에, 이 호수를 처음 같이 찾아왔을 때처럼 무겁고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미진이. 예전에 유현오가 알던 미진은 억지로라도 미소를 잘 짓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진의 얼굴에서 그 미소가 사라진지가 언제인지.

가엾은 미진이...

마음같아서는 그녀의 갸녀린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유현오는 헛기침을 두어번 하다가 화제를 돌린다.

“미진씨 덕분에 폴이 신바람이 났어요. 요즘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여차하면 차 키를 압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더니 말입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고물차라도 한 대 사줄 걸. 하하하....”

미진을 위해서 샀던 차가 폴의 차지가 된 것이다. 미진이가 더 이상 그 차를 필요로 하지 않게되었으므로.

유현오의 말에 미진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잘 되었네요….

그날 제니의 전화를 받은 날, 미진이 밖으로 나갔던 것은 그냥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했다. 제니는 유현오가 상상했던 이상의 가슴 후벼파는 모질고 독한 말을 했고 집에 그대로 있다가는 눈물을 보이고 말 것 같았기에 일단은 집을 벗어나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 서둘러 밖으로 나간 거라고 했다. 공원에 산책이라도하면서 시간을 보낸 후 태연한 얼굴로 집에 들어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방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메시지를 유현오에게 보냈던 것이다. 물론 미진은 유현오에게는 제니의 전화에 대해서는 함묵할 셈이었다.

그런데 공원에서 저스틴의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열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조금 늦추면 안 되겠냐는 저스틴의 전화. 갑자기 아버지의 호출을 받아 본가에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미진은 그러라고 했다고 했다. 그랬는데 그 짧은 통화에서 저스틴은 미진의 목소리가 심상치않다는 것을, 미진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만 것이다.

저스틴은 본가로 가려던 차를 돌려 미진이가 위치해 있는 공원으로 단숨에 달려왔고 미진을 보자마자 닥달했다.

“무슨 일입니까, 미진씨? 왜 울었어요. 왜 이 시간에 유현오씨 집에 있지 않고 공원에 혼자 나와 있어요? 내가 도울 일 있음 도울 테니까 말해요!”

유현오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저스틴이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미진은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않았다.그리고 왜 자기가 공원에 나와 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제니와의 일은 없었던 걸로 끝낼 생각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스틴은 이번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삼자였다. 시시콜콜 얘기할 이유가 없다고 미진은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 자리에서 또 제니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미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겁이 난 폴이 다급히 제니에게 전화를 했고 폴로부터 번호를 받아 단박에 전화를 한 거였다. 물론 미진은 전화를 받지않았다. 모르는 번호였기에. 그러나 연거푸 두세번 전화가 오자 미진은 어쩔수가 없어 전화를 받았다. 제니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한채. 그런데 여보세요, 하자마자 귀청을 찢을 듯한 목소리로 제니가 다짜고짜 고함부터 질렀다.

“아줌마아?!”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높았던지 미진은 휘청, 하고 쓰러질 뻔 했다.

“아줌마 지금 어디예요?”

정신을 차린 미진이 공원이라고 더듬거리며 말하자 제니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집으로 들어가지 못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지금 우리 아저씨가 당신에게 관심있다는 걸 빌미로 자기 원하는대로 일을 몰아가려고 수를 쓰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옆에서 가만 보고 있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말도 없이 집을 나와버리면 어쩌자는 거예요? 우리 아저씨랑 폴이 걱정하면서 찾아다니길 원해요? 지금 원하는 게 그거예요?그거냐구요?

빨리 집으로 들어가요!당장요! 우리 아저씨가 알기 전에 냉큼 집으로 들어가라구요! 그리고 며칠간 아무 내색않고 지내요. 그러다가 얼른 마땅한 거처를 찾아 나가달란 말이예요!!!”

제니는 거칠 것 없다는 듯 마구 고함질렀다. 고함소리가 얼마나 셌던지 옆에 있는 저스틴의 귀에까지 고스란히 전달될 정도였다고 했다. 제니의 고함소리는 저스틴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미진의 전화를 빼앗을 때까지 계속됐다. 저스틴은 거칠게 미진의 손으로부터 전화기를 뺏앗았다. 그리고 전화기에 대고 빽 소리 질렀다.

“너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버릇없이 굴어? 너 내 입에서 험한 소리나가기 전에 얼른 전화 끊지 못해?”

맘 놓고 고함을 지르다가 저스틴으로부터 기습적인 공격을 당한 제니는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했다. 저스틴이 나서지 않았다면 바보처럼 마냥 당하고만 있을 미진이었다. 저스틴이 나서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하고 유현오는 생각했다.

유현오는 미진으로부터 그 얘기를 전해들으며 제니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미진이 제니에게 아뭇소리 하지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긴 했지만 이건 아니다. 아무리 내가 저를 이뻐하고 귀여워해도 이것은 아니다….

저스틴은 제니로 인해 미진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고 말았다. 저스틴은 미진의 손목을 이끌고 차로 향했다.

“타요!”

물론 미진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그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괜찮아요, 저는. 여기 조금만 더 있다가 집으로 들어갈 테니 가던 길을 가세요. 부모님이 기다릴 것 아녜요. 얼른 부모님댁으로 가세요”

그러나 저스틴의 태도는 강력하고 단호했다.

“내가 안 이상 더는 당신을 그런 바늘방석같은 자리에 두게 할 수 없어요”

억지로 미진을 차에 태운 저스틴은 운전을 하면서 부모에게 오늘 일이 생겨 도저히 찾아뵈올 수 없겠노라고 전화했다. 그 다음 저스틴이 간 곳은 자기가 살고 있는 콘도단지였다. 매매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리스나 월세나 가능한 곳.

저스틴은 망설임도 없이 방하나를 1년 선불로 계약했다. 현재 저스틴이 살고 있는 곳과는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아랫층이라 나무가 많아 햇볕이 하루종일 들지않긴 하지만 천정이 높고 창문이 많아 시원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저스틴이 미진을 데리고 간 것은 차 딜러였다. 거기서 최신형 차 한대를 미진의 이름앞으로 뽑아준 거였다. 미진이 황당해하고 민망해하자 저스틴이 말했다고 했다. 누가 뭘 줄 때는 토달지 말고 예,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 챙기는게 주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다음에는 가구점에 가서 침대와 소파와 식탁을 사고는 배달을 시켰다. 곧이어 숨돌릴 틈도없이 전자제품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고 그릇들을 사러 그릇 전문점에 갔다.웬만한 사람은 한달정도 걸려야만 하는 일을 아침부터 오후까지 단 하룻만에 다 해치운 것이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차안에서 저스틴이 미진에게 그러더라고 했다.

“미진씨가 거부할 새 없지요? 정신없이 이렇게 몰아쳐버리니까”

유현오는 그 얘기를 전해들으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 더 이상으로 미진을 향한 저스틴의 애정이 깊은 것을 감지했다. 그래,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 것인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살림살이들을 장만해주는 일이. 그리고 어쩌면 마련해 준 그 보금자리에 자기가 같이 있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아 있으니까 더욱 가슴 부풀었을 것이다....

그렇게 둘이 쇼핑을 다니느라 바쁜 줄 모르고 유현오는 그날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금방 돌아올 거라던 미진은 늦게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않았다. 보이스 메일로 바로 넘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화나고 속상해도 남의 전화를 일부러 외면할 미진이가 아닌 걸 알기에 온갖 불길한 생각이 유현오의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유현오는 생전 믿지 않던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까지했다. 제발 우리 미진이에게 아무 일이 없게 해주세요….

미진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아주 늦은 밤이었다. 거의 열한시가 가까운 시간. 저스틴과 하루종일 같이 있느라 전화할 기회가 없었다는 미진. 미진에게 아무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던 유현오는 미진의 입에서 저스틴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리의 힘이 쭉 풀리는 것을 느꼈다.

결국은,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아니나 다를까 미진이 말했다.

“유 선생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어요….죄송합니다. 지금 전화로는 상세한 말씀을 드리기가 그렇고 좀 안정되거든 제가 연락드릴께요. 짐도 가지러 가야 하고…”

정선우의 말도 있고해서 앞으로 가능하면 남들의 눈에 미진과 같이 있는 것을 뜨이지 않으리라고 마음 먹었던게 불과 몇시간 전이었는데 미진은 그렇게 자유를 찾은 새처럼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정선우에겐 그렇게 퉁명을 떨긴했지만 그의 말이 완전 틀린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던 유현오였었다. 더구나 미진은 아직 이혼수속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 그리고 나름대로 아시아나 마켓에서 10여년 가까이 일하면서 나름대로 구축해 놓은 미진의 위치와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남들 입에 구설수로 오르내리는 것을 유현오는 원치않았다. 자기야 어찌됐든, 남들이 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하든 말든 별 상관이 없지만. 이제 미진을 위해서라도 조심하리라. 미진과 밖에 나갈 때는 남의 눈을 의식해 행동하리라, 그랬었는데. 그렇게 작심했었는데.

"빠른 시일내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요, 너무 서둘지는 말고..."

그게 그날 저녁 미진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후로는 미진으로부터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며칠후 정선우가 전화를 했다. 미진이 아시아나 마켓 경리일을 그만 두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려고.

“아마 공부를 더 할 생각이라던데?”

“공부?”

“학비가 어디서 났냐니까 그냥 웃기만 하던데. 그 놈팽이 남편놈이 정신차려 미진을 불러들인 것 같지는 않고. 미진씨 아직 자네 집에 있어?”

유현오는 대답했다.

“며칠전에 나갔어….”

“그랬던 것 같더라….아무 말은 안 하는데 자네집에서 나왔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니까…”

“아예 돗자리를 깔지 그래?”

“그래야겠는걸? 그나저나 이 아줌마가 돈 많은 물주를 하나 물었나, 왜 갑자기 변경이 생겼지? 나가면서 뭐라고 얘기한 것은 없고?”

“없어….”

미진이가 나가버린데 제니가 연관되었다는 얘기를 하기가 싫은 유현오였다. 사람이 서로 간절하게 사랑하면 어떻게든 이어지는 법이니까. 저스틴과 미진이가 서로를 갈구하는 마음이 무척 강했나보지. 그러니까 제니의 일이 빌미가 되어 그런식으로 이어진 게지.

화가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질투가 나지 않는게 이상했다. 그냥 마음만 아팠다. 어떤식이든 미진이 행복해야 할 텐데.그런데, 그런데 미진이가 앞으로 행복할 거라는 예감이 들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공부를 무척 하고 싶어했던 여자잖아. 어떤식으로든 공부를 마쳤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런 한국 마켓 구석에 처박혀 숫자나 치고 있기엔 지나치게 똑똑하고 영리한 여자였잖아”

“그렇지….”

“자세하게 말은 안해서 모르겠는데 당분간 학비며 생활비를 대줄 사람이 나타난 것만은 확실해.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선우는 미진과 저스틴과의 관계를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굳이 쓸데없는 얘기를 할 필요는 없는 일. 유현오는 묵묵히 정선우의 말을 들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허전해서 어쩐다?이거 뭐 닭 쫒던 개 지붕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 말일세. ”

“그 인물에, 그 직업에, 왜 그러고 있나. 밖에 나가면 널린 게 여잔데 하나 골라잡지 못하고?”

“돗자리까는 그 신통방통한 솜씨의 자네가 쓸만한 여자 하나 구해 붙혀주지 그래?”

“그래 볼까?어떻게든 내가 구해줄 테니 툇짜는 놓지 말게, 응?”

그게 정선우와 나눈 미진과 관련된 마지막이었다. 그 후에도 몇번 정선우와 통화를 했으나 서로 미진과 관련된 일은 꺼내지 않았다. 정선우도 미진과 관해서는 별로 할 얘기가 없는 듯 했다. 새로 경리가 하나 들어왔는데 일은 잘 하는지 몰라도 늘 입이 댓발이나 나와있어서 영 사무실 분위기 말이 아니라는 얘기뿐이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 미진으로부터 연락이왔다. 딱 한 달만이었다. 짐을 가지러 오겠다고 미진이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그동안 뭐가 많이 복잡했어요….”

유현오는 생각했다. 떠나가는 미진의 뒷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다. 우리의 이별은 근사한 데서, 집보다는 좀 더 멋지고 근사한 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언제 한 번 갔었던 호수 기억해요?내가 짐을 가지고 그리고 갈 테니까 그 쪽으로 올래요?"

한 달만에 만난 미진은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오죽할까. 편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깨끗하고 좋은 집이라도 윤기나는 새 가구라도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을 것이다. 자기 노력 전혀없이 순전히 남의 도움으로 사는 신세라는 자괴감이 클 것이다.

유현오는 미진의 수척한 얼굴에서 그동안 겪었던 괴로움이 자신에게까지 전달되는 것 같아 깊은 한숨을 몇번이고 쉬었다.

“이혼 수속에 들어갔어요….”

당연한 귀결이었겠지만 유현오는 조금 놀랐다. 유현오가 그동안 느낀 바로는 남편이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미진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이혼하는 것….생각보다 아주 쉽더군요. 싸워야 할 재산이 전혀 없으니까요….”

미진이 자조적으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냥 종이에 싸인 몇번 하니 끝. 이제 6개월 기다리면 그 사람이나 저나 완전 남남이 되는 거죠. 근데 제가 한가지 섭섭한 것은….”

미진이 아이들을 맡겠다고 하자 빈말로라도 한번 말리지를 않더라고 했다.뿐만아니라 안도의 숨까지 내쉬면서 아주 홀가분한 얼굴표정을 짓더라는 것이다.

“저한테야 그렇다치고 그래도 아이들한테는 조금의 애정이 있는 줄을 알았거든요….”

지금 미진은 아이들과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다행인 게 아이들도 아빠를 전혀 찾지를 않는다는 것. 아빠없이 사는 생활에 그럭저럭 아이들이 익숙해져가고 있는 게 무척 고맙다는 미진이었다.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 얘기를 할 때면 눈이 빛나는 미진. 얼굴에 생기가 도는 미진.

둘은 호숫가를 몇바퀴 돌았다. 지난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호수주변에는 사람들이 없었다.풀과 나무와 하늘과 물과 그리고 새들이 있을 뿐.

모든게 잘 될 거라는 유현오의 말에 대답을 않고 걷기만 하던 미진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유현오도 미진을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미진이 말했다.

“내 팔자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

그렇다. 지금까지의 미진의 팔자가 그리 썩 좋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하고 유현오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러나. 앞으로는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미진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저스틴이 옆에 있고, 어쨌거나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되었고. 그런데 왜 마음이 안 놓이는 거지. 왜 미진이가 점점 더 불행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거지….

유현오의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미진이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미진씨….”

“저스틴이 강력하게 직장을 그만두길 원했기 때문에, 사실은 저도 그의 얼굴을 보면서 하루종일 같은 공간에서 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두긴 했는데….그리고 공부랍시고 시작을 하긴 했는데….”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언제까지 저스틴씨의 도움으로 살아 갈수는 없는 일이고. 지금 공부를 한다지만 언제 마칠지 기약도 없는 데다 공부를 마치고 난후 바로 직장을 잡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예요. 모든 게 걱정 투성이입니다. 걱정이 돼서 밤에 잠이 안 와요….그중 제일 힘든 것은 남의 도움으로 무위도식하고 있다는 거예요. 먼지처럼 무의미한 존재로 남한테 기대어 기생하고 있다는 것, 그게 제일 견디기 어려워요….”

“미진씨….”

“그래서….하루하루가 힘들고 고통스러워서….이제 와서 그 집을 나올 수도 없고….”

“당분간, 당분간이잖아요..잘 될 거예요….그리고 저스틴은, 그 사람은 남이 아니잖아요. 미진씨를 누구보다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그리고…그리고 미진씨도 저스틴을 사랑하고 있지않습니까.”

마침내 유현오는 말해버리고 말았다.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마침내 유현오는 말해버리고 말았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저스틴은 미진씨가 마음껏 자기가 베풀어준 물질적 혜택을 누리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미진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줄 꿈에도 모를 겁니다. 저스틴을 위해서도, 그 고마운 사람을 위해서도 힘든 기색 내보이지 말고 즐기고 취하세요, 누리세요, 부담감같은 것은 절대 느끼지 말고요. 그 방법만이 저스틴을 기쁘게 해주는 것일 겁니다. 그가 주는 것은 받고요, 원하는대로 따라주세요…왜냐면 사랑하는 사람끼리 물질을 주고 받는 것, 당연한 일이니까요. 왜 그걸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세요….”

유현오가 태어나서 가장 사랑했던 여자는 물론 죽은 아내였다. 아내를 향한 사랑은 불처럼 뜨거웠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미진을 향한 유현오의 사랑은 그래서는 안되었다. 양보하고 헌신해야하는 사랑이었다.옆에서 지켜보며 잘 되길 빌어주어야 하는 사랑이었다. 아프더라도. 마음이 아프더라도. 왜냐면 미진이를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보다 더 미진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