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진이 거실로 나오자 저스틴이 물었다.

“아이들 벌써 잡니까? 왜 이렇게 일찍 나와요?”

“예, 잠들었어요. 하루종일 노느라 피곤했는지 동화책 한장을 다 읽어주기도 전에 금방 잠들어버리네요”

“미진씨도 수고했어요. 얼른 이리 와요. 이제 좀 쉬어야지…”

미진은 저스틴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저스틴의 팔이 미진의 어깨를 끌어당긴다. 미진의 몸이 자연스럽게 저스틴쪽으로 밀착된다.

“오늘 재미있었나요?”

“그럼요. 날씨가 좀 덥긴했지만 오랜만에 나간 야외라서 참 좋았어요”

오늘 일요일, 미진은 저스틴의 제안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두 시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댐으로 소풍을 다녀왔다. 산책도 하고 배도 타고 놀다가 돌아오면서 100년동안 한자리에서 대를 물려 영업중이라는 한 피자 가게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거의 열시간에 걸친 소풍에 지쳤는지 아이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힘들고 졸린다고 칭얼거렸다. 씻지도 않고 자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들을 야단쳐서 부랴부랴 목욕시켜서 재우고 나온 미진이다 .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 하나도”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비행기 승무원같이 굴지 말고 그냥 있어요. 아무것도 필요한 것 없어요”

“….”

“난 이렇게 미진씨와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 게 참 편안하고 좋은데 미진씬 아닌가봐요”

“….”

미진은 생각한다. 좋다. 두근거린다. 설렌다. 행복하다.눈물이 날 만큼 행복하다. 그러나.

“지난번에 사오신 와인이 남아있는데 한 잔 하실래요?”

“그럴까?”

미진은 어깨에 둘러져 있는 저스틴의 팔에서 빠져나와 부엌으로 걸어가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저스틴의 품에 안겨 있다가 그 품을 벗어날 때마다 습관처럼 나오는 한숨.

그 한숨의 뜻은 무엇일까.

늘 그랬듯이 미진의 머릿속이 어수선한 것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게 옳은지. 어떤 식으로든 먼저 시도를 해야 하는지.

목이 마르다. 타는 듯 갈증이 난다. 눈 앞에 얼음이 둥둥 뜬 냉수가 있다. 그런데 그 냉수를 선뜻 마셔도 되는지, 마신 후 별탈이 없을지 불안해서 주위를 끊임없이 둘러보고 확인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 것같은 그런. 그런 불확실하고 아리송한 기분.

지난 몇달동안 저스틴과 단둘이 있을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다. 오늘밤처럼 아이들은 저녁만 먹으면 여덟시도 되지 않아 졸려죽겠다고 칭얼대기 일쑤였고 그런 아이들을 재우고 침실문을 닫고 나오면 거실에는 오직 저스틴과 미진만이었다.

조용하고 은밀한 둘만의 공간. 그 누구에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둘만의 공간. 둘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조건은 훌륭했다.

질 좋은 소파는 넓고 푹신했고 마루바닥에는 발등이 덮힐 만큼 길고 부드러운 털로 짜여진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둘 중 하나만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 섹스.

그러나 아직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저스틴은 미진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자기쪽으로 끌어 안거나 미진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거나 미진의 이마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행동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것을 시도하지 않았다.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왜 주저하고 있는 걸까.

미진이 답답한 것은 저스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에 있었다. 미진은 알고 싶었다. 저스틴이 자기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지금이라도 저스틴이 원하면 언제든지 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짙은 안개속을 해매는 기분인 것이다.

사실 미진은 창민과 같이 살 때도 부부생활이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었다. 창민이 원하면 마지못해 겨우 응하는 정도였지 단 한번도 미진이 먼저 시작을 하지 않을 만큼 수동적이었었다.

“이거 뭐 수녀도 아니고 나무토막도 아니고. 아무 반응이 없으니까 내가 꼭 널 범하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창민의 불만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진의 머리속에는 항상 딴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형편없는 영어실력으로 공부를 따라잡을까, 어떻게 해야 빠듯한 생활비로 한달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현실에 대한 걱정이 머리를 채우고 있었으니 본능에 충실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임신을 할까 노심초사하느라 더더욱 섹스를 즐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심을 했는데도 임신이 되었고 쌍둥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밤에도 몇번씩이나 깨어 우는 통에 매일 초주검이 되어 살았으니 그 쪽으로는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고

나중에 제이와 케이가 크고 나서는 항상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는 통에 더더욱 그쪽으로 흥미를 잃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환경이, 생활이, 분위기가 미진을 섹스쪽으로 멀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미진의 몸이 원한다. 미진의 몸이 뜨겁다. 사랑하는 남자, 내 것이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만 욕심내던 남자. 같은 공간에 일하면서도 몰래 훔쳐보고 바라만 보던 남자, 그 아름다운 남자가 눈앞에 있다. 숨결이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다.

미진은 기다리고 있다. 죽어도 깨어나도 먼저 시도를 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 손을 내밀지 않냐고 대놓고 먼저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니까 저스틴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가지 미진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저스틴과 잠을 자는 것이 ‘거래’가 되는 것이 아닌지 조심스러워서. 저스틴의 수혜를 받고 있기에, 그러니까 저스틴으로부터 생활비 조달과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까 조공 받치듯 하는 거래.

사실 그건 아닌데. 절대 그런 아닌데. 저스틴을 많이 사랑하고 있는데. 그랬다. 저스틴을 처음 봤을 때, 안경을 쓴 날카롭고 이지적인 저스틴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부터 미진의 가슴에는 작은 불꽃같은 설레임이 생겼다.

그 설레임은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더욱 커져갔고 어느 날 저스틴으로부터 고백 비슷한 것을 들으면서 더욱 커지고 강해져갔다. 낮이나 밤이나 얼굴을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미진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저스틴이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 마음을 표현을 해보지 못했다. 그 마음을 애써 꾹꾹 누르고 눌렀다.

‘그러고 보니 저스틴에게 단 한번도 내 마음을 비추지 않았구나….’

문득 미진은 저스틴이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하지 않았는데, 표현을 하지 않았는데 저스틴이 점쟁이도 아니고 이쪽 마음을 어떻게 알까.

그래서일까. 저스틴이 먼저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신이 되지 않아서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오늘 밤, 내 마음을 표현해 볼 수도 있겠네…. 그러면 어떻게 그 말을 꺼내야 하나….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사랑한다고, 처음봤을 때부터 사랑했었다고?

와인잔을 꺼내다 말고 미진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다. 아이들 목욕시키면서 같이 목욕을 마친후 걸쳐입은 얇은 치자색 내리닫이 원피스 안에 담겨 있는 자신의 몸.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똥배도 나오지 않았고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몸이다. 서른 중반의 여자치고는 괜찮은 몸이다. 겉으로 봐서는 무척 말라보이는 몸이지만 통통한 속살이 찐.

가만….혹시?

순간 강하게 스며드는 의구심으로 미진은 와인을 따르던 손을 멈춘다.

저스틴이 자신의 몸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미진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스틴 정도의 조건을 가진 남자한테 따르고 구애하는 여자가 한두명일까.더구나 저스틴은 아직 싱글이다. 예쁘고 젊고 늘씬하고 온갖 괜찮은 조건을 갖춘 여자들이 줄을 설 것이다. 그런 여자들을 마다할 리가 없는데. 아이를 둘씩이나 낳은, 다른 남자의 손길을 수백번 거친 자신의 몸을 저스틴이 탐할리가 없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미진은 자신이 초라하고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할 생각을 했었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자괴감에 미진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생각만해도 창피한 일이었다. 자신에게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있는 남자한테 사랑고백이라니.

미진은 빠른 걸음으로 식탁으로 걸어가서 의자에 걸쳐둔 스웨터를 집는다. 그리고 그 스웨터를 끈만 달린 원피스 위에 걸친다. 맨어깨와 맨팔을 저스틴에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못견디게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드세요”

와인은 저스틴의 손에 쥐어주고, 치즈 접시는 티테이블에 내려 놓은 미진은 저스틴과 조금 떨어져 앉았다.

저스틴은 내가 불쌍해서, 아이들 데리고 혼자 허덕거리며 사는 게 불쌍해서 도와주고 있을 뿐인데. 나란 존재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데. 나한테 전혀 애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두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김치국을 마시고 있었구나….

얼굴이 모닥불을 부은 것 처럼 화끈거려 미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올 봄 이탈리아 식당에서 정선우의 눈을 피해 미진에게 한 말은. 그리고 저스틴의 아파트에서 했던 말과 행동들은. 그렇다면 그때 저스틴이 한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냥 술김에, 아픈 김에 한번 해본 소리인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부하직원이니, 그리고 이쪽에서 이래저래 헛점을 보였으니 그냥 한번 찔러 본 것인가.

“왜 떨어져 앉아요?”

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둘러댈 수가 없었다. 속내가 들킬까봐서였다. 당신이 내 몸을 건드려주기를 여지껏 기다렸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헛된 기대였고 착각인 것 같아서라고 말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리 와요, 이리 가까이 와요”

저스틴이 미진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미진은 저스틴에게 가까이 갈 동작을 취하지 않은 채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어색하고 공허한 웃음.

“이리 오라니까!”

저스틴이 몸을 일으켜 팔을 잡아끌었으므로 할 수 없이 미진은 주춤주춤 저스틴의 옆으로 옮겨앉았다.

미진의 몸이 저스틴의 옆으로 옮겨지자 그의 팔이 미진의 어깨를 둘렀다. 늘 그랬듯이, 조금전에도 그랬듯이.

“공부는 잘 됩니까?”

“예….”

“다행이네요…. 어쨌든 조바심내지 말고. 새 학기 등록할 때까지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

예, 라고 미진은 대답했으나. 그 대답은 그냥 저스틴을 안심시키기 위한 대답일 뿐.

잘 될리가 없다. 의식주 걱정을 안 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공부만 할 수 있는 조건이 완전히갖추어졌다고는 하나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서 머리에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늘 좌불안석이고 안정이 되지 않아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이다. 파도가 치면 휩쓸려 갈 모래위에 지어진 집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그런 불편한 기분으로 공부가 되는 게 이상한 거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현오의 집에 있을 때는 그런대로 편안했다. 두고 온 아이들때문에 밤을 눈물로 지새울 때가 많았지만 유현오와 폴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는 일이 좋았다.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면서 미진이 만든 음식을 먹는 유현오와 폴을 보면서 바로 이런 게 가정이라는 게 아닌가, 이런 가정이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가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유현오, 그 남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저스틴은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시작된 관계가 아니고 상사와 부하로 만났던 관계라서 그럴까. 그래서 이렇듯 항상 주눅들고 어려운 것일까.

미진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저스틴이 물었다.

“이 집에 사는 게 여전히 편안하지 않아요? 아무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 공짜로 사는 것 같아 마음이 힘들어요?”

미진이 고개를 끄덕했다.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수차례 말했잖아요. 괜찮다고. 아무 부담감 갖지 말라고….”

그랬었다, 저스틴은. 손톱끝만큼의 부담감 갖지 말라고 몇번이나 다짐해주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저스틴의 얼굴만 보면, 저절로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고 몸이 움추려드는 걸.

“미진씨가 사무실에 없으니까 참 좋은 게 있어요”

“전에 미진씨가 같은 사무실에 있을 땐 미진씨 얼굴 쳐다보느라, 미진씨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쓰느라 일을 못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마음놓고 일에만 몰두할 수 있어 능률이 배로 늘었다니까”

미진이 웃었다. 이 남자가 농담도 할 줄 아네. 항상 컴퓨터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언제 나에게 신경쓸 겨를이 있었다고.

사실 저스틴의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미진 자신이었다. 손짓과 눈길과 눈빛과 목소리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던 남자였었다. 그랬었던 남자였다. 그런데.

“미진씨….”

미진의 어깨에 둘러져 있던 저스틴의 손이 미진의 등으로 옮겨졌다. 저스틴은  미진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기다리고 있어요….”

“?”

“미진씨가 자유로운 새가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그때까지 나는 참으려고 해요”

저스틴의 그 말이 미진의 가슴을 쿵 쳤다. 오오,그래서였구나! 그래서!

그러니까 아직 이혼수속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미진이었다. 이혼 서류를 집어넣는다고 해서 무조건 이혼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번에 미진도 처음 알았다. 이혼이 완전히 끝나는 시기는 6개월후였던 것이다.

그래서 따지고보면 미진은 아직도 남의 여자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스틴의 미진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감싸 안아주는 것 외에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였던 것이다!

두 눈을 덮고 있던 짙은 안개가 일시에 걷히면서 미진은 저스틴에게 애정과 존경이 샘물 넘치듯 넘치는 걸 느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적어도 키스는 할 수 있을 텐데.

미진은 저스틴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양쪽 입꼬리가 산같이 올라간 단정한 입술.

미진은 가끔 저스틴과 키스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 어떤 기분일까. 미진은 키스를 해본지가 백만년도 더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창민과는 연애할 때 외에는 키스를 해본지가 오래전이었다. 섹스는 했으나 키스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키스를 하고 싶다….섹스는 아니더라도 키스를 하고 싶다.

미진은 소리나지않게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남자, 저스틴의 입술을 느끼고 싶다.

미진의 갈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저스틴이 말했다.

“이제 두달만 더 기다리면 돼요, 그쵸?”

그렇다. 앞으로 두달 후면 이혼수속이 완전히 끝난다. 그리고 미진은 싱글이 된다.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신조어로 '돌싱', 즉 돌아온 싱글이 되는 것이다.

처음 이혼서류에 싸인할 때 창민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좀 더 노력해 볼 걸, 처음으로 피운 바람이니 용서해줄 걸 하던 후회는 이제 완전이 가져지고 없었다. 이제 두달 후면 미진은 지긋지긋하던 창민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게 되는 것이다.

십년 결혼생활에 남은 것은 ‘이혼녀’라는 타이틀 외엔 아무것도 없지만 케이와 제이를 얻게된 것만으로,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미진이었다. 이제 앞으로는 두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면 되는 일만 남았는데.

저스틴의 말대로 이제 두달이다. 두달만 더 기다리면 된다. 두달 후면 저스틴과 마음놓고 같이 잠을 자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은?

그때 섬광같이 차가운 불안감이 미진을 엄습했다. 두달 후 자유의 몸이 되어 저스틴과 같이 잠 자는 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게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미진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갑자기 미진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만약 미진과 저스틴의 관계를 저스틴의 부모가 알게 되다면? 그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미진이 건너온 그 어떤 험난하고 험준한 강보다 더욱 건너기 힘든 강이 될 테니까. 어쩌면 저스틴의 얼굴을 영영 보지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제니가 전화와서 난리치던 날 아침.

저스틴의 갑작스런 부모님의 호출을 받고 가는 길이라 했었다.그날 미진이 때문에 부모님 댁 방문은 취소되었다. 그 후에 부모님댁에 다시 다녀왔는지, 무슨 일로 호출을 당했는지 미진은 일체 모른다. 그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기에.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지도 모른다. 그때만해도 미진은 아시아나 마켓에서 착실히 일을 잘 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흉 잡히고 책 잡힐 일을 저지른게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미진은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저스틴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쪽 손으로 꾹 눌렀다.

그 당시에는 몰랐다치더라도 저스틴의 부모는 지금에는 미진이가 마켓일을 그만 둔 걸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짐작을 할까. 그러고보니 마켓일을 그만 둔 후 저스틴의 부모에게 그동안 고마왔다는 인사도 안 했다. 아니, 못했다. 인사를 하게되면 저스틴과 관계된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밖에 없을 터인데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제는 저스틴의 부모도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겠지?

갑자기 마켓일을 그만두었으니, 그리고 잠적비슷하게 모습을 감추어버렸으니 온갖 소문들이 떠돌아다닌다는 것을 미진은 알고 있었다.

경황이 없어 화장품가게 윤아에게 인사도 못하고 떠나온 후 나중에 전화했을 때 전해들은 말이 있었다.

“돈 많은 물주를 물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진짜 그런 거니?”

윤아가 물었다. 돈 많은 물주 얘기는 정선우도 했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작별인사를 했을 때,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유현오 그 친구가  갑자기 결혼이라도 하잡디까?아니면 돈 많고 명(命) 짧은 노인이라도 물은 거요? 왜 그만 둬요? 이런 좋은 직장이 어디 있다고?”

“예, 그게 그렇게 됐어요.”

그때 미진은 긍정도 부정도 않은채 애매모호한 웃음으로 얼버무렸었다.

유현오의 집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물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얘기가 길어지게 되고 제니에 대한 얘기를 부득이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냥 사정이 생겼을 뿐이라고 나중에 모든 일이 정리되면 그때 말씀드리겠노라고하고 미진은 정선우의 의혹에 찬 시선을 애써 피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선우나 윤아나 세상 사람들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돈 많은 물주가 생긴 게 사실이었으니까.

저스틴의 도움으로 집 얻고 차를 얻어가지고 학비며 생활비를 조달받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해도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인데.사람들이 얼마나 욕들을 할까. 아이가 둘이나 딸린 여자가 뻔뻔하고 낮짝도 두껍다고. 베풀어 준다고 해서 어찌 거절도 하지 않고, 사양도 하지 않고 따박따박 받 아 먹고만 있었다고 도둑년이 따로 없다고 욕들을 할 것이다.

그동안 아이들과 같이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늘 가슴 한쪽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저스틴의 말대로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 늘 불안하고 무섭고 안절부절한 나날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불안의 실체는 저스틴의 부모님이었다. 혹시라도 행여라도 저스틴의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봐. 어느날 갑자기 저스틴의 부모가 들이닥칠것만 같아서. 머리채를 휘어잡을 것만 같아서.

오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텐데….

머리채를 휘어잡히거나 마당에 패대기를 쳐지는 망신과 수모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나 저스틴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상상만으로 벌써 가슴이 미어지고 울음이 터지려 하는데...

“무슨 생각해요? ”

미진의 얼굴에 나타나는 참담한 기색을 느낀 것일까. 저스틴이 미진의 눈을 보며 물었다.

“우리 관계요”

다른 때 같았으면 아무 생각도 안 해요 하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미진은 그렇게 말 할 수 없었다. 이혼 서류가 끝나지 않은 지금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양심적으로 아무 행동을 할 수가 없다치고 두달 후 미진이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됐을 때는 마음놓고 서로 원하는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런 다음은. 결혼은 죽었다 깨어나도 꿈꿀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숨겨진 여자가 되어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초인종 소리에도 누군가의 발자욱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면서?

저스틴이 미소지으며 되물었다.

“우리 관계?우리 관계가 어때서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미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서워요.무섭고 두려워요….”

“미진씨...”

저스틴이 미진을 쓸어 안았다.

“나는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결혼이라는 말에 아까보다 더 크게 미진이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서 당신을 영원히 내 옆에 붙잡아 두고 싶어요. 결혼만이 당신을 내곁에 영원히 둘 수 있는 방법이잖아요”

“….”

“내가 다 알아서 할 겁니다.미진씨는 그냥 내가 하자는대로 따라 오기만 해요”

결혼하자면 얼른 예스, 를 하고 뭐든지 저스틴이 하자는대로 따르라던 유현오의 말이 생각났다. 그런가. 정말 모른 척하고 바보인 척하고 저스틴이 하자는대로 이끌려가면 되는 것인가.

“미진씨, 당신을 사랑해요”

저스틴은 부드럽게 미진의 이마에 입맞추었다.

오오, 결혼, 결혼이라.

미진의 가슴이 불안과 기쁨과 걱정과 환희와 그 무어라 형연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마구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저스틴과 미진, 둘은 과연 결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