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창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전화를 받지 못할 상황에 있었으므로. 그 상황이란, 미진이와 같이 있는 상황이었다. 금방 비가 오려는 듯 하늘이 잔뜩 찌푸린 12월 어느날 오후 법원 앞 커피집에서 미진이와 마주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누구를 만나고 있는 중인 줄 잘 알면서 전화를 하네. 내가 전화를 받는 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한 건가….

창민은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창민의 기분은 한국의 낙후한 동네의 전봇대에 얽히고 설켜 걸려있는 전깃줄처럼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시원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그런 온갖 감정을 뭉떵거려 표현하라면 착잡하다가 맞을 것이다. 창민은 착잡했다. 목구멍 바로 위에까지 울음이 차올라 있지만 관객앞에서는 마냥 활짝 웃어야만 하는 광대처럼.

띵, 하고 문자가 들어왔다. 여름이었다. 전화를 안 받으니 문자를 보낸 것이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저녁에 한 잔 해요. 축배를 들어요-

축배라. 무슨 좋은 소식인 지 모르지만 오늘 저녁에 축배를 들긴 들어야 한다. 여섯달이 걸렸던 이혼. 드디어 최종 서류에 사인을 마친 날이니까. 다시 훨훨 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고대하고 원하는 일인가. 그러나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한 이 지랄맞은 기분은 왜이지?

“그 아가씨야?”

미진이가 창민의 전화기를 흘낏 훔쳐보면서 물었다.창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걸치고 있는 쟈켓 주머니에 전화기를 집어 넣었다.

여름이의 아파트로 들어가 산 지 벌써 두 달째다.

창민은 여름이에게 들어가는 것을 많이 망설였다. 어찌하다보니 섹스를 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하긴 했지만 동거까지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이 불알 두쪽만 차고 여름이에게 들어가 산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서.

또한 남의 입과 눈도 무서웠다. 누가 알기라도 하면, 그래서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남녀가 좋아서 같이 사는 게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니지만 여름이의 나이가 문제였다. 열살이나 어린 아가씨를 유린한 파렴치한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둘은 신문사에서 같이 일하는 사이이다. 다른 데도 아닌 공명정대와 권위를 자랑하는 한울 신문사의. 그 신문사 이름에 맞게 행동해줘야 하는데.

그랬는데 처음 섹스를 나누고 하루 이틀 여름이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내다가 그냥 눌러 살게 되었다. 그렇게 되었다. 의도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여름이와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든 독립을 해야만 할 것 같은데 현재 창민의 형편으로서는 그게 요원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데.

어쨌든 창민은 여름이와 사는 것이 좋았다. 편했다. 박 교수의 집에 얹혀지내면서 박 교수 와이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참으로 괴롭고 고통스러웠었는데.

여름이도 좋아하는 것 같다. 자기 친구들을 불러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 것만 빼놓고는 창민과 같이 사는 게 행복하다고 한다.

“그 아가씨가 잘 해줘?”

“….”

“대답 안 하는 것보니 아주 잘 해주나 보네”

미진이가 입술을 비틀면서 웃었다. 상대방 기분 나쁘게 하는 묘한 웃음.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한.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창민의 가슴에서 물결이 일렁이듯 반발심이 일었다.

잘 해주는 것은 둘째치고 적어도 여름이는 너처럼 돈돈돈 하지 않아.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실수를 해도 항상 웃어 줘 . 잔소리 일절 하지 않고.

창민은 그렇게 말할뻔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아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어 꾹 눌러 참았다.

미진이가 이혼에 대한 결심을 굳힌게 여름이때문이라지 않는가. 여름이와의 관계를 알게된 것이 헤어질 단서가 되었다지 않은가.

둘 사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미진은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만 말했다. 창민 또한 구구절절 물어보기가 구차한 것 같아 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었다.

“어쨌든 둘이 끝까지 잘 살길 바래. 그 아가씨,굉장히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같아 보이던데 심각하고 진지한 것 싫어하는 당신과 잘 맞을 것 같아”

칭찬인지 욕인지.

창민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커피잔을 들어 쭈욱 마시고는 소리나게 탁자에 놓았다. 미친년같으니. 끝까지 사람을 갈구네.

“전화번호가 바뀌든지 하면 반드시 연락해주고. 딴 건 몰라도 당신 연락처는 꼭 있어야 하니까. 제이와 케이를 위해서라도”

미진이 핸드백을 챙겨들면서 말했다.

“전화번호가 바뀔 일이 뭐가 있어”

창민이 퉁명스레 말하자 바로 가시가 돋친 것 같은 미진의 대답이 돌아왔다.

“혹시 알아?나랑 관계된 모든 것들이 다 지긋지긋해서 없애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을지 ”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염려말아”

“그래, 다행이네. 아이들 보고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

미안하다. 아이들한테.

그러나 창민은 생각했다. 별로 보고 싶을 것 같지는 않다고. 애교덩어리인 케이는 눈에 가끔 밟히겠지만. 왜냐면 아이들은 아빠보다 엄마와 더 가깝고 살가운 사이였으니. 창민은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미진이 자기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등한시 하니까 아이들 역시 그렇게 자기를 대한다고.

어쨌든 더 이상 아이들에게 험한 꼴을 안 보여주어도 된다는 사실이 아빠로서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고 창민은 생각했다. 그게 작은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늘상 어르렁대던 부모를 보고 자라는 게 아이들의 심리상태와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으니까.

‘미진이를 후원해주고 있다는 그 친구는 미진이와 안 싸울까. 아마 생전 싸울 일이 없겠지. 돈이 많으니까….’

돈만 많으면 싸울 일이 없다. 미진이와 그렇게 싸워댔던 것도 돈 때문이었다. 미진이 혼자 생계를 짊어지고 있으니 그렇게 극악스럽고 지독하게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이해를 하긴 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하고 창민은 여름이를 생각했다.

지금 여름이도 혼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름이는 미진이처럼 돈돈돈 하지 않는다. 쓸 데 쓸 줄 알고 기분낼 때 기분도 낼 줄 안다.

까도 까도 속을 알 수 없는 양파같은 여자가 여름이다.

옷, 구두, 핸드백, 남자, 나이트 클럽이 최대 관심사일 것 같은 여름이. 철딱서니가 아예 없는 줄 알았는데 요리도 제법 잘 한다. 예외라는 게 있다는데 참으로 여름이가 요리를 잘 하는 것은 예외다. 오늘 저녁은 무슨 음식을 할까?

창민이가 돈 없다는 걸 알고는 일체 외식을 요구하지 않는 배려도 할 줄 안다. 한마디로 보기보다 무척 속이 깊고 사려 깊은 아가씨다. 참으로 괜찮은 아가씨다. 내 복에 어찌 이런 횡재를 했을까 싶을 정도다. 나무랄 데가 없는 아가씨. 또 한가지 여름이가 마음에 꼭 드는 것은 .

섹스에 있어 망설임이나 몸사림없이 매우 과감하다는 것이다.

다시 줏어입기 귀찮다고, 혹은 실내가 춥다고 옷을 다 벗기 싫어하는 여자가 미진이었다. 어쩌다 마음이 동해서 기분 좀 내보려다가 팬티만 겨우 내리고 누워있는 미진을 보고 기분을 잡친 게 한두번이 아니었던 창민이었다.

여름이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창민을 즐겁게 할 줄 알았다.

창민이 친구들을 만나고 여름이보다 늦게 집에 들어갔던 어느 날 밤. 여름이는 실오라기 한 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빨간 색 하이힐을 신고 소파에 앉아 창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창민은 생애 처음,생애 최고의 광란의 섹스를 했다.

어느날은 신문사로 출근했던 여름이로부터 문자가 온 일이 있었다.

‘아저씨. 오늘 나 팬티 입지않고 출근했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치마속의 내 아랫도리를 상상해 봐’

오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쿵쿵 뛸 정도로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런 기발하고 깜찍한 일을 여름이 말고 누가 또 시도할 수 있을까. 하루종일 힘차게 불뚝불뚝 서는 놈을 달래면서 창민은 저녁때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여름이가 현관문을 여는 기척이 들렸고 창민은 성난 황소같이 뛰어나가 여름이를 거칠게 덮쳤었다.

“고마와. 이런저런 태클 안 걸고 잘 끝내줘서….”

누가 할 소리를.

양육비니 위자료니 청구할까봐 은근히 걱정을 했던 창민이었다. 청구해봤자 줄 생각도 없고 줄 수도 없지만. 그야말로 탁탁 털어봤자 먼지 한 톨없는 형편이니까. 양육권을 포기하는 걸로 창민은 두 아이들에 대한 부담과 의무를 깨끗하게 시원하게 끝냈다.

갑자기 떠오른 여름이와의 섹스 장면을 털어내고자 머리를 흔들면서 그나저나 그 남자는, 네 보스였다던 그 남자는 너한테 잘 해주니 하고 물으려다가 창민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 알면 뭐하나.

창민은 핸드백을 집어들고 일어서는 미진을 흘낏 바라보았다. 아무리 뜯어봐도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는 얼굴이다. 어딜 갔다놔도 그냥 묻혀버리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남자들이 그렇게 목을 매고 좋아들 할까. 숨어 있는 매력이 있는 걸까. 아니면 저렇게 새초롬한 얼굴로 밖에 나가 남자들 앞에서는 틈을 내보이면서 끼를 흘리고 다니는 걸까.

박교수의 먼 친척형이라는 유현오. 그 남자도 미진이를 아시아나 사장에게 뺏기고 닭 쫒던 개 신세가 되었겠지, 지금은? 흥. 그러든지 말든지.

유현오인줄 알았더니 사실은 아시아나 마켓의 젊은 새 사장이 미진의 남자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창민은 놀라움과 함께 배신감을 느꼈었다.

그리고 창민은 미진의 앙큼함에 치를 떨었다. 그 말간 얼굴을 하고 삼각, 사각관계를 맺고 있었다니.

여섯달 전, 이혼을 하자는 얘기를 꺼내면서 미진은 말했었다. 여름이란 아가씨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외도까지 하는데 더 이상 부부의 인연을 이어갈 생각이 없노라고.

그때, 창민은 자기가 지은 죄도 있고 해서, 사실 그때까지만해도 여름이와 키스 이상은 하지 않았던 떳떳한(?)관계였었지만 어쨌든 어린 아가씨와 단둘이서 만남의 자리를 가지고 키스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꼬리를 내렸었다. 또한 미진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고 확고해서 반론을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순히 이혼하는데 동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미진이가 남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나도 아닌 두 남자와.

창민은 미진의 두 남자에 대해 일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두어달전 쯤 미진이가 아시아나 사장과의 관계를 털어놓았을 때 아이 둘을 키워내야 하니 맹탕인 것 보다는 어느정도 재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니 다행이다는 생각을 했을 뿐.

전혀 궁금하지가 않았다. 어쩌면 그게 자기보다 몇백배, 몇천배 나은 미진의 새 남자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별로 알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미진의 뒤를 따라 창민은 커피집을 나왔다. 아침부터 어두컴컴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잘 가라. 그리고 잘 살아라”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미진을 향해 창민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미진의 입술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그래….”

미진은 천천히 창민의 손을 마주 잡았다.

“부디, 부디 당신도 잘 살아….”

미진의 손을 놓고 창민은 차를 향해 뛰었다. 얼굴과 목덜미를 적시는 빗방울이 차가왔으므로.

차안에 비치돼 있는 휴대용 휴지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으면서 창민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진이 커피집 앞에 그대로 멍청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아까처럼 여전히 시선은 하늘을 향한 채였다.

‘저 여잔 저렇게 끝까지 청승을 떠는구나….”

차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름이었다.

“다 끝났어?”

“응, 지금 마악….”

“와이프 안 울어?”

“울긴….”

“와아, 그 아줌마 되게 독하다.십여년 결혼생활을 끝내는 데 울지도 않어?”

“글쎄, 오히려 시원하겠지. 그동안 내가 워낙 속을 썩혔어야지. 그나저나 그 기분 좋은 소식이란 게 뭐야?”

창민은 별 기대를 하지않고 물었다. 창민의 현재 삶에 있어 기분좋은 소식이 있을리가 없었으므로. 기껏해야 창민이 맡고 있는 한울 신문사의 ‘문예 한마당’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라는 것이겠지. 지난 몇개월동안 수도 없이 들은 찬사와 칭찬이라서 별로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다.

“지금 말 안 할래. 나중에 집에 가서 얼굴 마주 보고 할께. 왜냐면 진짜로 기분 좋을 소식이거든”

그러든지.

창민은 차 시동을 걸었다. 한두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가 잠깐 사이 제법 거세지고 있었다.

“축배들자고 했었지? 진짜 오늘 거하게 한잔 했으면 좋겠는데….”

이혼한 날이고 하니 말이야 라는 말은 빼는 창민이다.

“그래, 아저씨. 나 곧 퇴근할 거니까 들어가면서 와인 사갈께”

“그럴래?소주가 남은 게 있을 텐데?”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니까 와인으로 해. 비싼 와인으로”

비 오는 날 와인이라 그것도 괜찮다.

“그래라, 그럼. 슈퍼마켓 들리는김에 저녁거리도 좀 사와라”

“알았어. 진짜 오늘 비까지 오고 날씨까지 우리 기분 내라고 도와주고 있네. 목욕재계하고 기다려. 깜짝 놀랄 소식인데 그냥 들을 수는 없으니까. 알았지?”

처음에는 별 기대없이 덤덤했지만 여름이가 재차 강조하자 은근히 호기심이 생기는 창민이었다.

신문사에서 근무 중에 연락을 해온 것 보면 분명히 일과 관계된 것인데 무엇일까. 설마 나를 정식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창민이 알고 있는 한 한울 신문사에 현재 창민이 들어가 앉을 만한 공석은 없었다. 타 신문사와 비교해 급료나 베니핏이 워낙 좋은지라 직원들의 이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지난 10년 이래 직원 구한다는 사고를 내본 적이 없을 정도라고 했는데.

어쨌든 여름이가 오면 알게 될 일이니까.

창민은 빗속을 뚫으며 천천히 운전해 아파트에 도착했다.

입주인들의 80퍼센트가 싱글들이라는 여름이의 아파트. 싱글들을 겨냥해 지은 아파트인만큼 옆집도 앞집도 철저하게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게끔 설계되어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차에 타고 내릴 때나 현관문을 나설 때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창민이었다.

현재 여름이와 동거중인 것을 아는 사람은 미진이와 박 교수밖에 없었지만 누구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한인사회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까. 어쨌든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았다.

“야, 정말 부럽다 부러워. 넌 무슨 여복이 그리 많냐? 그 나이에 이십대 아가씨라니?! 여름이한테 괜찮은 친구 없대? 나 좀 소개시켜줘 봐. 아니 그런데 여름이는 왜 너같이 돈도 없고 직업도 없는 늙어빠진 아저씨한테 푹 빠졌대 그래?”

지금 살고 있는 집이며 모든 부의 기초를 세운 와이프가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지는 바람에 기가 눌려 못살겠다고 하소연 하는 박교수의 질투섞인 항의였다.

글쎄. 창민 자신도 모른다. 왜 여름이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왜 돈 한푼 없는 백수인 자기를 데려다가 재워주고 먹여주고 가끔 용돈까지 주는지.

돈 많은 남자들만, 그리고 나이지긋한 남자들만 사귀었다는 여름이었다. 매일 먹어오던 기름진 쌀밥에 식상해진 것인지. 그래서 꺼끌꺼끌하고 색깔도 거뭇거뭇 보기 싫은 잡곡밥으로 눈을 돌린 것인지.

제발 여름이의 창민에게로 향한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랄 뿐. 이제 정말로 오고 갈 데 없어진 창민이다. 여름이마저 변심하면 그야말로 큰일이니까.

아침에 일어나 나간 그대로인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물 끓여 커피 한 잔을 할까 하고 주전자를 드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름이가 들어왔다. 일찍 들어올 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아저씨. 나 왔어. 일도 없고 해서 세 시간이나 일찍 나와버렸어”

여름이의 손에는 슈퍼마켓 봉지가 들려 있었다. 창민은 주전자를 내려두고 뛰어나가서 쇼핑봉지를 받아들었다. 여름이의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오, 비가 아직도 많이 오나보네? 다 젖었군”

방음장치가 잘 된 아파트라 문을 닫고 있으면 바깥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아직도 비가 오고 있는 줄 몰랐다.

“응, 막 뛰었는데도 다 젖어버렸어”

“전화하지. 그럼 우산들고 나갔을 텐데”

미진이였으면 비를 맞든지 말든지 나 몰라라 했을 터인 창민이다. 그러나 여름이에게는 최대한 살갑고 다정하게 군다.

“괜찮아”

“들어가서 뜨거운 물로 목욕해라. 저녁은 내가 할께.”

“연어가 싱싱하길래 두 토막 샀으니 소금이랑 올리브 기름 바르고 구우면 될 거야”

“그래,알아서 할 테니까 얼른 목욕부터 해”

“아저씨. 좋은 소식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그렇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여름이가 목욕탕으로 들어가고나서 창민은 여름이가 일러준대로 연어에 양념을 뿌려 오븐에 넣었다. 그리고 드레싱만 뿌리면 되게 돼 있는 샐러드를 유리 접시에 담고 바케트의 배를 갈라 마늘소금과 버터를 발라 오븐에 넣었다. 와인을 따르고 포크와 나이프를 챙기고 촛불까지 켜니 손색 없는 식탁이 차려졌다.

“와아, 멋지네?”

가운차림으로 나오던 여름이가 식탁을 보더니 환성을 질렀다. 여름이는 작은 일에 이처럼 기뻐한다. 어떤 땐 손뼉까지 치면서 천정으로 펄쩍 뛰어 오를 때도 있다.

“아저씬 진짜 끝내줘!”

여름이가 좋아하자 창민의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아, 이게 행복이려니.

“자,다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자리에 앉으시지요”

식사가 시작되고 여름이가 전해준 소식. 기분 좋은 소식. 창민이 한울 신문사의 편집국장 자리에 내정돼 있다는 소식이었다. 현 편집국장이 한울 신문사와 연관된 방송국 고위 관계자로 이직해 가면서 자기 자리에 창민을 적극 추천했다는 것이다.

오오! 이거야 말로 생애 최고의 기분좋은 소식이다!

“기쁘지, 아저씨?”

“그…그럼…기..기쁘고 말고…”

창민은 말까지 더듬거렸다. 정말로 정말로 기쁘다. 게임 개발로 한 밑천 잡겠다는 계획은 벌써 물 건너갔고 다른 직장도 잡힐 기미가 안 보이고 백수로 이대로 계속 지내야만 하나, 의기소침해 있는 상황에서 들은 최고로 기쁜 소식인 것이다.

“이제 아저씬 한울신문 편집국장이 되는 거야. 이 여름이는 그 밑에 직원이 되는 거고. 나 잘 봐줘야 돼? 알았지?”

“물론이지!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빠르면 이달 말, 늦어도 다음달 초면 결정이 날거야. 아니 결정나고 말것도 없어.완전히 결정된거나 다름없으니까. 아마 곧 편집국장님이 아저씨를 부를 거야. 그러면 그때 예스, 하고 수락만 하면 되는 거야”

“여름아!”

창민은 벌떡 일어나서 여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릎을 굽히고 여름이를 와락 힘차게 껴안았다.기다렸다는 듯이 여름이도 들고 있던 와인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창민을 마주 껴안아 왔다. 창민의 입술이 여름이의 입술을 덮쳤다. 늘 향기롭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름이의 입술. 창민은 미친듯이 여름이의 입술을 빨기 시작하면서 두 손으로는 여름이가 걸치고 있는 가운을 뒤로 벗겨내렸다. 조금 전, 뜨거운 물로 씻어낸 여름이의 포동포동하고 매끄러운 상체가, 샹들리아 불빛 아래 환하게 드러났다.

“여름아….”

창민은 여름이의 입술로부터 자기 입술을 떼었다. 대신 도드라지게 앞을 향해 솟아나 있는 여름이의 가슴으로 입을 가져갔다. 언제나 붉고 빳빳한 모습으로 창민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는 여름이의 젖꼭지. 창민은 여름이의 젖꽂지를 입에 물었다. 여름이가 진저리를 치면서 창민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여름아….”

“아, 아저씨….”

여름이가 하악하악 들뜬 숨소리를 내면서 쓰러지듯이 바닥으로 허물어져내렸다. 동시에 허리께에 허술하게 걸쳐져있던 가운도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머리부터 발끝에까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름이의 나신. 방금 삶아서 까놓은 계란처럼 희고 깨끗한 여름이의 나신.

창민은 한손으로 자신의 바지를 벗겨내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여름이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벌써 흠뻑 젖어있는 여름이의 그 곳,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아아, 이 아이는 항상 나를 미치게 하는구나!

창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창민은 흘러넘치고 있는 그 젖과 꿀을 흡입하기 위해 여름이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열흘 후.

창민은 한울신문 편집국장으로부터 고대하고 고대하던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창민이 전해받은 소식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소식이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