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혼 불 18. 고독한 인연
이계숙 (minky1)
2015-5-1 00:04:18
저스틴은 최근들어 인연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다. 징검다리처럼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맺어지는 인연에 대한 생각.
자식과 부모로 맺어지는 인연. 남편과 아내로 만나지는 인연. 만나는 인연, 헤어지는 인연.
그 인연이란 태어날 때부터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계절의 섭리에 따라 떨어져 시냇물 위로 정처없이 흘러가는 이파리처럼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바뀌어지게 되는 것일까. 나뭇잎은 흐르는 물을 따라 마냥 내려가다가 강으로 갈 수도 있고 바다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강과 바다에 도착해보지도 못하고 어느 바윗돌에 걸려 바짝 말라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미진과 나, 저스틴은 어느쪽일까. 처음부터 하늘에서 맺어준 인연일까. 아니면.
저스틴은 왜 자신이 미진을 사랑하게 됐는지에 대한 생각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곰곰히 생각하고 분석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바짝 마른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빠져 든 것이지 명쾌하게 이거다, 하고 꼽을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미진의 첫 인상은 깨끗한 시냇물 속에 잠겨있는 흰 조약돌 같았다. 미진은 그때 귀걸이라든가 목걸이라든가 하는 장식품도 없이 연보라색 남방에 회색 면바지와 흰색 캠버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헤나가 붉은 장미같이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여자라면 미진은 박하사탕같이 싸하고 맑은 느낌의 여자였다. 깨끗하고 청초한 코스모스같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미진의 이력서를 들추어보고 서른 다섯살, 그러니까 자신과 동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저스틴은 깜짝 놀랐다. 대학을 갓 졸업한 새내기인 줄 알았던 것이다.
저스틴은 궁금했다. 이력서에 결혼 여부에 대한 사항이 없었으므로. 그렇다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는데 하루도 안 돼 그에 대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진이 숨 죽이며 아이들과 전화 통화하는 것을 들었던 까닭이다.
미진은 대단히 우수한 직원이었다. 하루에 몇만불의 금전출납을 맡고 있으면서도 단 일전의 차이도 없게끔 일처리가 빈틈없이 정확했다. 그리고 눈치 또한 빨랐고 매사에 센스가 있었다.
아시아나에서 일하게 된 첫날, 미진이 입맛에 딱 맞게 내린 커피를 가져다 주었을
때를 저스틴은 기억한다.
바람불고 비도 오는 음산한 날씨였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속에서 아침부터 하루종일 몰아치다 저스틴은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있었다. 향 좋은 커피 한잔을 마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꼼짝않고 앉아 있는데 미진이 저스틴의 마음을 딱 읽고 있었던 것 처럼 커피를 갖다주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미진은 저스틴이 뭘 원하는가를 정확하게 알아내서 딱딱 맞추어 대령해 주었다. 출출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는 매장안의 주방에서 금방 말았다는 김밥을 내밀기도 했고 갑자기 단 게 먹고 싶다고 느끼고 있을 때는 달달한 쿠기 몇개를 책상에다 갖다 놓기도 했다.
정선우는 미진의 그런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했지만 저스틴에게는 참으로 특별한 일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 외에 누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조건없이 베풀어 준 것은 처음이었다.
헤나에게 저스틴은 하나부터 열까지 해다바치고 베푸는 입장에 있었었다. 왜냐면 헤나는 자신이 공주라고 믿고 있는 여자였으므로. 운동화까지 신겨준 적이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 말리는 게 귀찮다는 헤나를 위해 헤어 드라이어로 머리까지 말려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여자를 위해 헌신만 하던, 챙겨만 주던, 베풀어만 주던 저스틴이었다. 여자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되는 줄 알았던 저스틴이었다.
그랬는데 미진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는 것(비록 그것이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었다.
저렇게 남을 우선하고 배려하는 섬세한 마음 씀씀이를 가진 여자랑 사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저스틴은 미진의 남편이 부러웠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하지 않았다. 저스틴은 미진이 썩 행복하지않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미진의 전화통화 내용과 정선우로부터 간간이 얻어들은 소식을 통해서였는데 어느 날 저스틴은 미진의 눈물을 보았다. 남편과 전화통화를 끝내고 소리없이 흘리고 있는 미진의 눈물을.
그때 저스틴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저 여자의 눈물을 그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저 여자를 보호해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런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미진이 저스틴의 옆으로 걸어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날 밤, 샌드라와 데이트를 끝내고 들어오던 날 밤.
미진을 그만 놓아주고 샌드라에게 집중해 볼까 하던 마음을 먹고 있던 날 밤, 박 매니저 찾아왔던 그날 밤.
저스틴의 머릿속에 어느정도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던 샌드라의 존재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미진과 유현오라는 남자가 같은 집에 산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 외로 미진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불같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미진의 목소리가 심상찮다는 걸 알았을 때 저스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미진을 그만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일념뿐. 그래서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조건 공원으로 달려갔다가 유현오의 딸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있는 미진을 구해 낼 수 있었다.
미진과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할 때도 저스틴에게는 오로지 이 여자를, 이 가엾은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었다. 그러나 미진이 이혼수속에 들어가게 되고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면서 태산같이 험준한 난관이 앞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저스틴은 깨달았다. 보통 강담이 아니면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난관이. 그 난관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첫째는 샌드라와의 관계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만남을 피하고 있던 샌드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는 것.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를 힘 입고 있는 샌드라. 샌드라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할 수 있을까. 저스틴은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그 일은 아주 쉽고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는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자마자 샌드라가 그야말로 ‘쿨’한 반응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당신의 눈빛을 보고 벌써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나를 좋아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그냥 지켜보고 기다려보기로 했지요. 안 돼죠?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노력가지고는 안 된다니까요. 사람 기만하지 않고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마와요….”
샌드라와 작별을 고하고 돌아오면서 저스틴은 인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만약 그날 밤 박 매니저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마음먹었던대로 샌드라와의 인연이 잘 이어져갔을까. 왜 하필이면 샌드라와 잘 해보겠다고 작심하던 날 밤 박 매니저가 미진과 유현오의 얘기를 꺼내주었을까. 일부러 꿰맞추려 애를 써도 잘 안 될 것 같이 복잡한 일이 어쩌면 그렇게 처음부터 계획한 것처럼 착착 진행되었을까. 만약 신이 있다면, 그래서 그 신이란 존재가 사람의 인연을 주도하고 있다면 그 신은 얼마나 짖궃은가.
두번 째는 가장 어렵고도 힘든 일,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둘 다 안동 지방 양반집 자손들이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온 데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부모님에게 아이가 둘이나 딸린 이혼녀와 아들의 결혼이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 일 터였다.
더구나 모든 것을 걸었던 형을 잃은 부모님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슬픔을 삭히려고 애를 쓰고 있는 부모님.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하늘이 무너질 듯한 슬픔은 어느정도 가시고 있겠지만 아주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 부모님에게 미진의 존재를 알린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크나큰 충격을 다시 가중시켜드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님이 받을 충격의 강도를 생각하면 망설이고 또 망설일 수밖에 없는 저스틴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미진을 숨겨놓은 존재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만 했는데.
미진과 만나기로 했던 그날 아침, 저스틴은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아침을 같이 먹자는. 그러나 저스틴은 금방 알았다. 아침을 먹자는 말은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할 말이란 다름아닌 미진과 관계된 말이라는 것을.
박 매니저가 밤중에 미진과 유현오의 관계가 그렇고 그렇다는 것을 알려주러 찾아온 것은 아시아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저스틴은 그것을 잘 알았다. 한인사회에 도네이션도 잘 하고 종업원들 복지에도 신경쓰고 믿을 만한 식료품들만 취급한다는 좋은 평으로 알려진 아시아나 마켓이지만 일개 경리 여자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스캔들에 휘말릴 수 있으니 그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저 하는 충직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저스틴은 박 매니저의 우려를 지나친 기우라고 묵살해버리고 말았다. 무참한 마음이 된 박 매니저. 그냥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길로 부모님을 찾아갔을 것이다.가서는 저스틴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전했을 것이다.
왜냐면 아버지의 호출을 미진이 때문에 다음날 날로 미루고 찾아 갔을 때 아버지의 입에서 미진이에 대한 말이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저스틴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박 매니저가 왔다 갔구나….
점잖고 신중한 아버지는 직접적으로 미진과 유현오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 뭐든지 신중을 기하고 확실을 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미진이가 정직한 사람인 줄은 잘 알지만 너무 믿지말고 가끔 가다 확인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저스틴은 박 매니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아버지에게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말이 길어질 것 같고 또 미진을 두둔하는 격이 될 것 같아 예, 잘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저스틴의 부모님은, 특히 세상을 떠나버린 형과 같이 미진을 다년간 지켜보았던 아버지는 미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음전하고 싹싹하고 일도 잘 하면서 어느 누구에게든지 친절하고 정다운 미진이가 남자 잘못 만나 고생하고 있다고 안타까와하기까지 했다.
미진이가 저스틴의 요구에 따라 아시아나를 그만두었을 때, 그러니까 인사도 하지않고 종적을 감추어버렸다고 어머니가 미진을 섭섭하고 괘씸하게 생각했을 때도 아버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를 나무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우리한테 마지막 인사도 안 하고 가버릴 수가 있지? 더구나 우리가 저한테 해준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우리가 아니었으면 지까짓 게 어떻게 영주권을 그렇게 쉽게 받을 수가 있었겠어? 전혀 얌통머리없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사람은 겉보고 모른다더니 정말 미진인가 그 아이를 두고 한 말이네….”
“우리가 미진이한테 덕을 봤음 봤지 잃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만 하지. 그동안 얼마나 야무지게 일을 잘했나. 미진이한테 준 월급의 두배를 준다해도 아마 그렇게 일 잘하는 아이를 찾기는 쉽지 않을 걸?”
“그래도 마지막으로 인사는 하고 갈 수 있지 않아요. 얼굴보고 못하면 전화로라도. 소문대로 돈 많은 영감 만나 다른 지역으로 야반도주를 하느라 그랬는지. 얼핏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아직 이 동네에 산다는 것같기도 하고….얘, 사직서를 낼 때 자세히 좀 물어보지 그랬니. 왜 갑자기 일을 그만 두느냐고?”
“남의 사생활인데 물어보긴 뭘 물어봐. 그리고 평소의 미진이 성품을 보더라도 묻는다고 다 얘기를 하지 않을 건데….하여튼 우리 마켓으로봐서는 미진이가 그만 둔게 큰 손실이지. 박 매니저도 그렇고 미진이도 그렇고 우리가 인덕하나는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미진을 좋게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시아나에 소속된 직원으로서였을 것이다. 만약 자기 아들인 저스틴과 엮여진 것을 알게 되면, 그래도 아버지가 미진이에게 호의적일까.
저스틴이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것은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아침이었다.
개장하자마자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온 손님으로 인해 저스틴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보다 배가 넘치게 밀려 든 손님들은 가족들과 혹은 연인들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평소보다 몇배의 식료품들을 과감하게 카트에 집어 넣고 있었다. 일년에 몇 번 안 되는 대목중의 대목이었다.
저스틴은 무심하게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날 식사를 같이 하자는 얘기이려니 하고. 그러나 저스틴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심상찮다는 것을.
“저스틴. 너 나한테 뭐 감추고 속이고 있는 것 없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스틴은 태연할 수 있었다. 속이고 감추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떳떳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으므로. 그래서 저스틴은 태연하게 웃으며 농담까지 했다.
“어머니를 속이고 있는 것 있지요. 어릴 때 엄마 핸드백에서 5불 훔쳐 낸 것 말이예요. 그것 말고는 열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거리낄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러나 어머니가 진짜니? 정말 아무것도 없니?하고 재차 물어왔을 때 혹시 미진에 대한 일을 어머니가 알게 된 게 아닐까 싶어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고 있는 손이 와랑와랑 떨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오늘 저녁, 집으로 오너라. 아버지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댄다….”
“어머니….무..무슨 일인데요….”
“정말로 믿고 싶지않은 이야기를 어제 밤에 들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버지와 나는 단 한숨도 못 잤단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해서 당장 너를 불러들이라는 걸 밤이 늦다는 핑계를 대고 겨우 진정시켜드렸단다….”
“어머니….”
“내가 아직도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고 진정이 되지 않는다….”
“무…무슨..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어젯밤 박 매니저가 왔다 갔다….”
“그…그런데요?”
“정말 몰라서 묻니? 네가 언제적부터 우리를 바지저고리로 취급하기 시작했니?”
어머니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
“너랑 얼굴보고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그때까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미진이, 미진이라는 얘하고 너랑 무슨 관계니?”
“….”
“갑작스런 그 아이의 퇴직은 어떻게 된 일이냐? 네가 퇴직하라고 시켰니?그리고 방 얻어서 몰래 숨겨놓고는 차 사주고 생활비까지 대주고 있는 거야?”
“그..그걸.. 어..어떻게?”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정선우씨가 어떻게 알아내서 박 매니저에게 귓띰을 한 것 같더라. 네가 샌드라를 마다 할 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만 미진이를 맘에 두고 있는 줄 몰랐다. 도저히 우리 집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얼토당토않는 신분인 그리스 여자때문에 우리를 기함하게 하더니 이번엔 아이가 둘이나 딸린 이혼녀란 말이냐?”
“….”
샌드라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머니는 무척 안타까와했었다.
“네가 정 싫다면 어쩔 수는 없다만 참 아쉽구나.... 그런데 너는 누구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라도 있니. 그렇지 않고서는 샌드라처럼 참한 여자를 내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
어머니의 미심쩍어하는 눈길을 얘써 피하면서 저스틴은 생각했었다.
예, 있어요. 하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 아버지앞에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여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네가 미진이 방을 얻어줄 땐 걔가 이혼조차 하지 않았을 때라며? 얘야. 네가 어쩌자고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거냐. 남의 유뷰녀를…. 아이고, 말하는 내 입이 부끄럽구나….”
“어머니….”
“저스틴아.네가 지금 제 정신이니?제 정신가지고는 도저히 상상도 해볼 수 없는 일 같은데 말이다”
“….”
“이제 사람들한테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네가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하게 생겼구나.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벌렸는지 몰라도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다. 온 동네가 다 뒤집어 질 일이구나”
“죄송해요. 어머니….”
어머니의 말대로 헤나때문에 얼마나 부모님의 속을 끓여드렸나. 이제 미진이로 인해 다시 같은 전철을 밟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효한 자식인가.
“아버진 아침도 안 잡수시고 서재에 틀어박혀 계신다. 아예 부자의 인연을 끓겠다고까지 하셔. 어쨌든 너의 입장을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다. 당장 오늘 저녁에 집으로 오너라”
“….”
한없이 너그럽고 인자하고 경우 바르지만 한번 화가 나면 물불을 안 가리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미진에 대한 얘기를 들었으니 지금 폭발한 화산같을 것이다.
“일단은 하루라도 시간을 좀 벌어야 할 것 같은데요. 크리스마스 날은 마켓 문을 닫으니까 그날 아침에 찾아뵙는 걸로 할께요.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놓으세요.그렇잖아도 말씀을 드리려고는 했었는데….”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글쎄. 내가 무슨 힘이 있니. 결론은 말 안 해도 뻔한 걸. 미진이와 당장 오늘로 헤어지든가. 아니면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든가….”
전화를 끊고 저스틴은 망연자실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매장안을 바삐 오가는 고객들. 그 정답던 고객들의 모습이 갑자기 먼 나라의 사람들처럼 생경스럽게 다가왔다.
휴, 하고 저스틴의 입에서 깊고 무거운 한숨이 뿜어져나왔다.
그렇잖아도 가까운 시일내에 부모님을 찾아가서 슬쩍 운을 떼보려고 작정하고 있었던 저스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다니.
아버지가 펄펄 뛰며 화를 낼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아버지로부터 멱살을 잡히거나 뺨을 얻어맞거나 주먹질을 당할 수도 있을 거라고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수만 있다면. 그냥 그렇게 한 대 얻어맞는 걸로 끝날 수 있다면.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저스틴에게는 커피전문점을 판 돈이 아직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거의 백만불에 가까운 돈이. 그 돈이면 아버지의 눈에 뜨이지 않는 다른 고장으로 가서 미진이랑 새로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식으로 해결하고 싶지않은 저스틴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부모님을 설득해서 축복받은 결혼을 하고 싶은 게 저스틴의 바람이었다.
어쨌든 폭탄은 터져버렸다. 이제 그 수습을 해야 하는데.
저스틴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정면돌파를 할 수 밖에. 그 정면돌파란 미진이와의 관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님께 사실대로 털어놓고 결혼하겠다고 통보를 하는 것이었다.
저스틴은 아시아나 건물밖을 나왔다.
정선우는 어떻게 미진이와 내 관계를 알게 됐을까.
아, 유현오. 그렇구나 유현오. 저스틴은 유현오가 정선우의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진이는 뭘 숨기는 음흉한 성격이 아니다. 유현오에게 사실을 다 말했을 수도 있다.유현오는 정선우에게, 정선우는 또 박 매니저에게.
저스틴은 무거운 걸음으로 사무실로 올라갔다. 새로 온 경리아가씨는 은행에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박 매니저가 거기에 와 있었다. 정신없이 바쁜 매장을 놔두고 한가하게 사무실에 올라와 있을 박 매니저가 아니었다. 저스틴은 박 매니저가 자신과 미진의 얘기를 하려고 정선우에게 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저스틴은 일부러 소리나게 문을 닫았다.
머리를 맞대고 얘기를 나누고 있던 정선우와 박매니저가 저스틴이 들어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일시에 저스틴의 얼굴에 와서 꽂혔다.
“무슨 얘기중입니까?”
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면서 눈짓을 교환했을 뿐. 두 사람의 어색한 표정.
저스틴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한국사람들의 관습 중의 하나가 내 일도 아닌 데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밤 놔라 대추 놔라 한다는 속담처럼 말입니다...”
정선우와 박 매니저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어벙벙한 얼굴이었다.입을 벌리고 저스틴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저스틴은 울화가 확 치밀었다. 제발 나서지 좀 말아. 당신들 충정은 알겠는데.
“박 매니저가 어젯밤 우리 부모님 찾아갔다면서요? 당신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지난번 미진이와 유현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때 그냥 간과하고 넘어간 게 참 많이 후회가 되는군요. 미진이와 내가 어떻게 되던 내 일입니다. 내 사생활입니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요”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박 매니저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황송하고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겠다는 몸짓을 지으며 말했다.
“저…저는…그냥…걱정이 되어서…그래서….”
“걱정이라고요? 무슨 걱정요?걱정이 됐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냥 속으로만 걱정해주면 안 됩니까? 왜 나섭니까, 나서길? 박 매니저 당신이 뭔데요?”
“….”
“내가 어린 아이입니까? 저능아입니까? 왜 당신들의 간섭을 일일이 받아야 하는데요?”
“사장님!”
정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모두, 그러니까 저를 비롯해 여기 박 매니저, 그리고 유현오 등 사장님과 미진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걱정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냥 단순히 흥미거리로 그러겠습니까. 아시아나 마켓과 관련된 일이니까, 어찌보면 아시아나 마켓의 미래가 달린 일이니까 저희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요?”
“예에?”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합니까?미진이와 깨끗하게 헤어져주길 원합니까. 당신들이 원하는 게 그거예요?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하는데요?”
저스틴의 말에 입을 벌리고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선우와 박 매니저의 얼굴을 보면서 저스틴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당신들뿐 아니라 전 아시아나 직원들이 들고 일어나서 말린다고 해도 미진이에 대한 내 마음은 확고해요.
“그렇다면….”
박 매니저와 정선우가 동시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건데요?”
저스틴이 말했다.
“당신들 바람대로 미진씨와 헤어지지 않아요. 나는 미진씨와 결혼합니다.”
그때 저스틴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모레 아침, 부모님에게 찾아가기 전에 미리 미진과 결혼을 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님도 어쩔수 없을 것이다. 길고 긴 관문을 힘들게 거치지말고 아예 속전속결로 가버리자. 부모님과 친지들의 축복속에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만 그러기엔 갈 길이 너무 머니까 그냥 단 둘이서만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쓸쓸하고 고독한 결혼식.... 우리는 처음부터 고독한 인연으로 맺어졌으니까.
그것은 아주 강렬하고 확고한 생각이었다.
16
쪽지
Back
목록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