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민의 신상에 변화가 생긴 것을 미진이 안 것은 신문을 보고서였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 비가 오고 있는 이른 아침. 여느 때처럼 아이들에게 계란과 토스트로 아침을 해주고 난 후 커피 한잔을 들고 펼친 한울신문이었다. 내년 1월 1일부터 독자 한마당의 심사위원이 김창민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했던 다른 인물로 교체되었다는 사고(社告)를 본 것이다.

미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일까. 지난 번 이혼서류에 최종 사인을 하던 날 만난 이후 한번도 얼굴을 보거나 전화통화할 일이 없었던 창민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예작품의 심사를 맡은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흙속에 묻혀 있는 보석같은 글을 찾아내는 솜씨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창민이었다. 또한 간간히 써내는 창민의 논설은 날카롭고 명쾌하고 예리하기로 정평이 나서 벌써 수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고 했었다.

창민의 심사평이나 논설을 읽고 미진도 많이 놀랐었다. 십여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했지만 창민이 그런쪽으로 그렇게 뛰어난 실력과 재능이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비록 월급이랄 것도 없는 수고비를 받고 일하고 있긴 하지만 잘 나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미진은 망설일 것 없이 창민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웬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신문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닐까. 술 먹고 다니다 사고라도 내서 감옥에 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신호음이 또르르또르르 두어번 갔다. 그러나 창민의 음성 대신 나온 것은 차가운 기계음이었다.

지금 건 전화는 결번입니다 하는.

혹시 잘못 걸었나 미진은 번호를 확인해 보았다. 잘못 걸리가 없었다. ‘김창민’이라 저장된 번호 그대로 건 것인데.

서너번 더 같은 번호로 전화걸기를 시도하던 미진은 마침내 단념했다. 그리고 급하게 다른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다른 번호란 바로 박 교수였다. 창민과 가장 가까운 친구, 박 교수.

박교수라면 창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전화기에 저장된 번호중에서 알파벳으로 ‘박’자를 찾는 미진의 손가락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래야 할 텐데….

박 교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확인하는 즉시 연락요한다는 메세지를 남기고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벨이 울었다. 미진은 액정화면을 확인 할 새도 없이 황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저스틴이었다.

“일어났어요?”

“그…그럼요….”

“뭐해요?”

“아, 예, 그냥….”

“하룻밤 자고 올 수 있는 간단한 여행 준비를 해요”

“….”

비도 오고 있는데 무슨 여행일까. 더구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러나 저스틴의 말에 일절 토를 달지 않는 미진이었다.

“10시쯤 데리러 갈 테니까 그리 알고 준비하고 있어요. 아이들은 베이비 시터에게 맡기고….”

“그럴께요….”

아파트 단지내에 새로 알게 된 베이비 시터에게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가방을 싸면서도 미진의 머릿속은 온통 창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스틴과 단둘이 처음으로 떠나는 단 둘만의 여행. 그동안 아이들을 대동하고 여기저기 다니기는 했으나 단둘만이, 그것도 자고 오는 여행은 처음이었었다. 자고 오는 여행이라면 저스틴과 한방을, 한 침대를 쓴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섹스를 할 수도 있겠다. 이혼이 끝나면서 저스틴은 미진에게 딥키스를 하기 시작했으나 섹스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행에 대한 기대나 흥분이나 궁금증보다는 창민에 대한 걱정때문에 불안한 가슴인 미진이었다.

창민의 친구 전화번호가 박 교수밖에 없는 것이 그날따라 아쉽고 원망스러운 미진이었다. 다른 친구라도 있었으면 그쪽으로 연락을 해볼 터인데 박 교수의 전화만 마냥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

미진의 애를 태우기로 작정을 한 듯이 거의 두 시간 넘게 소식이 없던 박 교수에게서 마침내 전화가 왔다. 지금 떠나니까 10분쯤이면 도착할 거라는 저스틴의 전화를 막 받은 후 트렁크를 현관에다 옮기고 있을 때였다.

“아, 미안합니다. 미진씨. 운동을 좀 하느라고요. 요즘 배가 자꾸 나오는 것 같아서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운동기기가 갖추어진 체육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들떠도 안 하고 있다가 최근에야 드디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미진은 그래, 운동을 잘 시작하셨다. 오랜만인데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셨냐는 인사를 할 경황이나 여유가 없었다. 다짜고짜 창민의 안전과 거처부터 물었다.

“그 사람 지금, 지금 어디에 있나요? 아픈 데 없이 무사한가요?”

박 교수는 오히려 미진에게 반문했다.

“그 자식으로부터 무슨 연락이 없었나요? 적어도 미진씨에게는 연락할 줄 알았는데?”

“아니요, 아무 연락도요.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오늘 신문 보고 놀라서 전화를 했더니 결번인 번호로 나오던데 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나요? 아직 그 아가씨랑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그 아가씨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사실은….”

박 교수의 입에서 나온 얘기. 정말로 뒤로 넘어갈 만큼 경악스러운 소식이었다.

그 여름이란 아가씨와 창민과의 관계가 여름이 아버지 귀에 들어갔다는 것.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나이까지 많은 창민에게 푹 빠져 집에 불러들여 동거까지 하는 것을 보다 못한 여름이의 친구들이 여름이의 아버지에게 고해 바친 것. 그런데 그 여름이의 아버지가 바로 한울신문사의 편집국장인 인물이었다는 것. 한울그룹내 다른 계열사로 부임해 가면서 편집국장 자리에 추대까지 해놓을 정도로 창민을 신임하고 믿었던 여름이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고 그 길로 창민에게 해고를 통보했다는 것. 그리고 강제로 여름이도 신문사를 그만두게 하고 집으로 불러들였다는 것….

“세상에, 어쩌면 그런 일이, 그런 일이….”

“창민이 이 친구 충격과 낙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창민씨는 어디 있는 거예요?”

“저도 모릅니다. 여름이도 모른다고 합니다. 전화가 안 되니 그 자식의 행방을 알아볼 도리가 없어요. 그래도 미진씨에겐 연락을 할 줄 알았는데….”

“….”

승승장구 잘 나가면 몰라도 그런식으로 몰락 비슷한 처지가 됐는데 연락을 취해 올 창민이 아니었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요….”

“그러게요. 이 친구 홧김에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지 그게 걱정이네요….”

창민에 대한 작은 소식이라도 알게 되면 서로 연락해주기로 하고 미진은 박 교수의 전화를 끊었다.

“무슨 전화예요?”

미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저스틴이 웃는 얼굴로 현관에 서 있었다. 저스틴의 차림새가 새로왔다. 늘 청바지 아니면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던 저스틴이 양복바지에 와이셔츠에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이다.

“어디 파티라도 가나요?”

미진의 물음에 저스틴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응. 파티에 가지요. 우리의 결혼 파티….”

어리둥절하고 있는 미진에게 저스틴이 말했다.

“내가 늘 말했지요? 당신과 결혼 할 거라고. 오늘이 그날이야”

저스틴은 현관에 선 채로 미진을 끌어 안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 어떤 고난이 와도 당신을 놓칠 수 없어요. 어젯밤을 꼬박 새우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도 결론은 똑같았어요. 그래서 오늘 결혼으로서 당신을 영원히 내 옆에 묶어 두려고 하는 거야”

저스틴이 미진에게 깊고 깊은 키스를 했다.

미진은 저스틴의 입술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어쩔 수가 없구나. 거부할 수 없구나.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저스틴과 이런식으로라도 결혼하는 것이 내 운명일 수밖에 없다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오늘일까. 신문사에 내쫓기고 종적을 감춰버린 창민때문에,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는 창민에 대한 걱정때문에 불안하기 짝이 없는 오늘.

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며칠전부터 그치지 않고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는 겨울비.

“흠, 그 쪽엔 완전 눈천지이겠는 걸? 여기에 비오면 그쪽엔 눈 오는 걸 알죠?”

조수석의 미진에게 직접 안전벨트를 매주며 저스틴이 말했다.그 쪽이란 레이크 타호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네바다주에 위치한 ‘레이크 타호(lake Tahoe)’라는 호수. 인디언어로 큰 물을 의미한다는. 호수의 길이가 22마일, 폭만 12마일에 달한다는 오레곤의 크레이터호 다음으로 미국에서 2번째로 깊은 호수. 해발 1896미터 높이에 있기 때문에 여름에도 서늘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기에 스키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그곳에는 일년 내내 즉석 결혼식을 치를 수 있는 웨딩 채플이 수십개였다. 저스틴은 급한 결혼식을 위해 레이크 타호를 택한 것이다.

저스틴은 차를 출발 시켰다.

“보통은 네 시간쯤이면 도착한다는데 오늘은 비와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우니 아마 더 걸릴 수도 있겠네요. 거기서 결혼식을 하고 하룻밤 묵은 다음 내일 오전쯤 내려 오려고 해요. 내일 저녁을 부모님 집에서 먹기로 했거든. 물론 당신도 같이 가야 해요”

저스틴의 부모님집에 같이 가야 한다는 말에 미진의 몸이 움찔했다. 저스틴은 핸들은 잡지 않은 오른쪽 손으로 무릎에 포개져 있는 미진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겁 먹지마요. 나만 믿어요. 다 잘 될 거야…”

도시를 빠져나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어서도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 비는 레이크 타호로 진입하는 산에서 진눈깨비로 변하더니 곧 굵은 함박눈으로 변했다.

“눈이 많이 오네요….”

“그러게요. 이쪽으로 눈 많이 온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쏟아지는 줄은 몰랐네요. 체인다는 곳에서 체인을 달아야 할 것 같네요. 내려서 커피도 한잔 하고 가요”

체인을 달 동안 화장실에 가고 커피를 산 후 다시 출발했다. 저스틴의 차처럼 굵은 체인을 탄 차들이 거북이 걸음을 하고 하고 있었다. 산 위로 올라갈 수록 경탄할 경치가 눈 앞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하얀눈이 숲과 나무와 바위를 덮고 있는 산속은 크리스마스 카드속의 풍경과 똑같았다.

“와아, 참 아름답네요….”

머릿속을 덮고 있는 창민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저 미진은 일부러 소리높혀 환성을 올리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결혼하는 날이었다. 행복해야 하는 날이었다. 들떠야 하는 날이었다.

“그렇죠? 미진씨가 즐거워 하니 나도 좋은데요….”

거의 여섯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레이크 타호. 가장 첫번째 눈에 뜨이는 웨딩 채플에 둘은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미진은 저스틴의 팔짱을 꼈다. 웨딩 채플 입구의 꽃집에서 산 분홍장미와 안개꽃으로 엮어진 부케를 들고서. 돈 받고 증인 서 주는 두 사람의 할머니와 함께. 저스틴은 급하게 구입하느라 예쁜 디자인을 고를 수 없었다며 심플한 백금반지를 미진의 손가락에 끼어주었다. 저스틴의 손가락에도 똑같은 반지가 끼어졌다. 명실공히 둘은 부부가 된 것이다.

십분만에 끝난, 아주 간단하고 짧고 약소한 결혼식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바에 올라가 칵테일 한잔씩을 하고 그리고 밤이 되었다.

깊고 진한 키스 후에 저스틴의 혀가 가슴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미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추렸다. 저스틴의 혀는 강하고도 부드러웠으나 미진의 몸은 한 겨울, 바깥에 내걸린 빨래처럼 빳빳하게 경직돼 있었다.

마음은 구름위에 누운 듯 황홀하고 행복했으나 긴장이 풀리지 않고 있는 거였다.

두꺼운 커튼이 무겁게 내려진 방안은 동굴속처럼 어두웠다. 목욕탕에 켜둔 전등 불빛 만이 미진의 벗은 몸을 비추고 있을 뿐.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지난 1년동안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순간들이었다. 마침내 그 순간이 현실이 되었다. 오롯이 저스틴과 단둘이 되었다.

더 이상 눈치볼 사람도 이제는 없다. 방해할 사람도 없다. 왜냐면 둘은 결혼을 했으니까.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으니까. 그런데도 미진의 몸은 편안하게 이완되지 않고 있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요….”

미진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는 걸 눈치 챈 저스틴이 미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의 첫날밤이야….”

첫날밤이란 결혼을 하고 처음맞는 밤이란 말이었다. 처음으로 섹스를 나눌 수 있는.

그랬다. 첫날밤이었다.

“사랑해….”

저스틴이 미진의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힘차게 빨기 시작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미진이 신음하면서 말했다. 그동안 가슴속 깊이 꽁꽁 감추어놓았던 말, 사랑한단 말. 처음으로 저스틴에게 해보는 미진이었다.

저스틴을 사랑함으로, 그와 결혼함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고행의 가시밭길일 터였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더욱 날카롭고 뽀족한 가시가 천지사방 깔린 가시밭길. 그러나 저스틴과 옆에 있는 댓가로 치루어야 하는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 눈물이 날까.

미진의 온몸을 혀와 손으로 탐색하던 저스틴이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미진의 두 다리 사이로 몸을 포개는가 싶더니 딱딱하고 강한 남성으로 미진의 아래를 헤집고 들어왔다. 아, 하고 가볍게 탄성을 올리는 미진.

드디어 드디어 둘은 하나가 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둘은 눈을 뜨자마자 다시 한번 사랑을 나누었다. 샤워를 마치고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가기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저스틴은 다시 미진에게 깊고 깊은 키스를 했다.

저스틴의 입술이 목덜미로 내려가려는 순간 미진은 저스틴을 가볍게 밀어 내었다.

“누가 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단 한번도 자신의 가슴에 있는 말을, 하고 싶은 말을, 자신의 의견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던 미진이었다. 저스틴이 뭘 물어도 예, 아니오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던 미진이었다. 무슨 요구를 해도 죽은 듯이 수용만 하던 미진이었다.

어젯밤 폭풍같은 섹스를 마치고 저스틴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 미진은 다짐했다.

나는 오늘로서 이 사람의 아내가 된 거야. 더 이상 주눅들지 말고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해야지….

미진의 변화가 놀랍다는 듯 저스틴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저스틴은 크게 하하 웃으며 미진의 이마에 키스했다.

“하하하, 좋았어요! 벌써 아내 역활을 하려고 하네요?”

아침을 먹은 후 체크인을 하고 호숫가를 드라이브했다.

눈 덮힌 산을 주변으로 청록색의 물은 담고 있는 호수는 환상처럼 아름답고도 신비했다. 금방이라도 집채만한 괴물이 물을 박차고 튀어나올 것 처럼.

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저스틴의 손은 미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간간히 고개를 돌려 미진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하기도 했다. 누가 봐도 행복한 한쌍이었다. 막 결혼을 한 남녀. 첫 섹스를 마친. 서로 사랑하는. 행복에 겨워하는.

그러나 미진의 마음속은 불안으로 가득 차기 시작하고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가슴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는 것이다.

어젯밤부터 아침까지는 꿈같이 달콤한 시간이었지만 이제부터는 현실이었다. 드라이브를 마치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면, 그래서 앞으로 몇시간 후면 시부모가 될 사람들과의 대면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무섭고도 공포스러운 시간이 눈 앞에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긴장하지 않고 떨리지 않으면 이상한 거였다.

미진의 불안해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저스틴이 말했다.

“정 내키지 않으면 다음으로 미루어도 좋아요…”

미진을 염려하고 배려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언제 맞아도 맞아야 할 매. 하루라도 빨리 맞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미진이었다. 무섭다고 미룬다면 그 미루어진 시간만큼 지옥같은 시간을 경험해야할 터인데.

“괜찮아요. 설마 저스틴씨 부모님이 저를 죽이기야 하겠어요?”

호기롭게 말하고 하하 웃기까지 했으나 머리까지 아파오는 미진.

“그래요. 너무 걱정말아요. 결혼까지 했는데 부모님이라고 더 할 말이 있겠어요? 그나저나 아무래도 지금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마음같아서는 보트도 타고 쇼핑도 하고 여기서 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지만 날씨가 심상찮아요. 지금 떠난다 해도 부모님집에 제 시간에 도착할지 걱정이네….”

호수를 한 바퀴 돈 저스틴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눈발은 더 거세지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눈때문에 내려가는 길이 막힐지도 몰랐다. 특히 오후에 날이 어둡기 시작하면.

저스틴의 예상대로 내려가는 길은 위험했다. 길인지 산인지 바윈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덮혀 있었고 차바퀴들로 다져져서 도로는 빙판같이 미끄러웠다. 낭떠러지 위로 나 있는 가파른 길로 접어들자 여기저기 미끄러져 널부러져 있는 차들이 보였다. 아무리 체인을 감아도 미끄러지는데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차들은 다행히 산을 향해 미끄러져 있었다. 다른쪽 방향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즉 여차하다 낭떠러지쪽으로 미끄러졌다면 차와 함께 바로 굴러떨어져서 형체도 못찾을 상황이었다.

“조심하세요….”

미진이 저스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풀어내며 말했다.

“두 손으로 핸들 잡아요….”

“그래야겠네요. 진짜 조심해야겠네. 운전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겠네”

속력은 절대로 낼 수 없는 상태였다. 시간은 자꾸 가고 있었다. 저녁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눈발은 여전히 거셌다. 바람까지 불고있어 와이퍼를 빠르게 작동시키고 있는데도 앞 유리창에 눈들이 마구 들러붙고 있었다.

숙박과 음식을 해결할 수 있는 건물들 몇개가 서 있은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앞뒤로 거북이 걸음을 하던 차들이 하나둘 없어지고 있었다. 운전에 자신없는 사람들이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고 호텔로 들어가는 까닭이다.

“정말로 굉장한 눈이네요. 다섯시까지 부모님 집에 가기로 했는데 이거 많이 늦겠는데요?”

열한시에 떠났는데 두시가 되도록 아직 반도 내려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빨리 출발할 걸 그랬나?”

“….”

바깥 상황이 어떻든 앞으로 닥쳐올 상황이 어떻든 어쨌든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차속에 있는 시간이 참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미진이었다. 저스틴은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면서 조바심을 내고 있었지만 미진은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시가 지나자 주위가 아예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저스틴은 헤드라이트를 켰다.

“아무래도 오늘 부모님집에 가는 걸 포기해야겠네….”

저스틴의 말에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미진. 맞아야 할 매라면 얼른 맞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피하고만 싶은 미진인 것이었다.

“지대가 너무 높아서 여기선 전화가 안 터질 것 같은데. 어쨌든 뒷자석에 있는 내 전화 좀 줘봐요. 못 간다고 전화를 해드려야지….”

저스틴의 전화를 집어주고 미진도 핸드백에서 자신의 전화를 꺼냈다. 혹시라도 창민이나 박 교수가 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고보니 결혼식을 하는 순간부터 창민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미진이었다. 아니, 일부러 하지 않았다. 전남편에 대한 걱정을 한다는 것은 현남편인 저스틴의 대한 도리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호텔에 도착해 저스틴이 샤워를 하는 틈을 타 베이비 시터에게 전화해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을 뿐 일체 전화기 쪽으로 신경을 끄고 있었던 것이다.

박 교수로부터 전화가 메세지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꽤 긴 메세지였다. 미진은 흘낏 저스틴을 쳐다보았다. 저스틴은 운전대를 잡은 채 한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다가 곧 저예요, 어머니 하고 말했다. 다행히 통화가 된 것이다.

메세지를 들을 수 있는 버튼을 누르려던 미진, 그러나 미진은 바로 동작을 멈추어야 했다.

저스틴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앙되었기에.

“박 매니저가 전화해서 뭐라고 했다구요? 아니, 그 박 매니저는 아버지 어머니 간첩입니까? 뭐예요, 도대체? 그래서 이번엔 무슨 말을 하던가요? 어머니. 마켓의 책임자는 접니다. 하루 쯤은 제가 없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기에 마켓을 비운 건데 그래, 그걸 또 일일이 다 보고를 한 겁니까? 사실 오늘 저녁에 찾아뵙고 마켓을 비운 이유에 대해 모든 걸 다 말씀드리려고 하고 있었는데...”

목소리를 높히다가 미진을 흘낏 쳐다보는 저스틴. 미진의 불안해 하는 얼굴을 보고 저스틴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분노가 어려있는 말투로 말했다.

“저 내일 출근하면 당장 박 매니저부터 해고시킬 겁니다. 그리고 도착하면 정식으로 인사올리고 말씀드리려 했었는데….”

저스틴의 결연에 찬 목소리에 미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얼른 들었다.

“지금 여기 레이크 타호예요. 미진이랑 같이 왔어요. 어제 저녁 우리 결혼했습니다....”

저스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뭐라고? 지금 너 뭐라고 했니?하는 여자의 외침이 전화기 밖으로 새어나왔다. 미진의 귀에 그 외침은 똑똑하고 선명하게 날아와 앉았다.

오, 저스틴. 그런 소식을 전화로 통보하면 어떡해요….

미진이 저스틴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저스틴이 걱정말라는 뜻이 담긴 표정으로 미진을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불현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머니? 어머니? 괜찮으세요?”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차가 갑자기 세차게 옆으로 미끄러진다 싶더니 세상을 날려버릴 듯 요란하고 세찬 굉음이 미진의 귀를 강타했다.

눈발은 여전히 세차게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