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우의 전화를 받았다. 봄볕이 완연한 삼월의 일요일 오후였다.

“뭐하고 있나?”

정선우가 물었다.

“그냥…거실에 하릴없이 앉아 텔레비젼 보고 있지….”

유현오가 대답했다.

“아이들은?”

유현오는 고개를 비틀어 부엌쪽을 바라보았다. 떡볶이를 만든다고 부엌은 아까부터 떠들썩했다. 높은 웃음소리와 그릇부딪치는 소리와 도마소리와 냉장고 여닫는 소리와 뭐가 맘에 들지않게 됐는지 한탄하는 소리가 어루러진 속에서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 제니와 폴과 그리고 케이와 제이가.

“엄마를 찾지는 않나?”

“다행히 아직까지는. 제니가 돌아가고나면 어떨지는 모르지만….”

“언제 가는데?”

“글쎄 급한 집안 사정이라고 말하고 온 거라니까. 곧 돌아가겠지”

“제니가 참 고맙구먼. 보기보다 속이 깊은 아이일세….”

“글쎄….”

제니가 집으로 돌아온 건 미진의 소식을 듣고서였다. 유현오가 제니에게 전화로 미진의 소식을 알렸다.

일전에 우리집에 잠깐 머물다가 나갔던 미진이란 아줌마 기억하니? 그 아줌마가 죽었단다. 자동차사고였단다 라고만 간단하게 얘기했을 뿐인데.

만나지 않았고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심하게 대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 제니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제니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었다.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란 말만 연신하면서.

유현오가 제니에게 미진의 죽음을 전한 것은 제니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통보를 하기 위해서였다. 케이와 제이를 데려와야겠다는 통보.

“그 아줌마에게 쌍둥이 딸이 있어. 지금 아무도 돌봐줄 수가 없는 형편이라 당분간 우리집에서 폴과 같이 지내게 해야겠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삶은 많이 복잡하단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단다. 미진이 아줌마가 우리집에 와서 거처가 정해질 때까지 머물렀던 것도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였지. 그런데 그걸 네가 견딜 수 없어하더구나. 그래서 이번엔 미리 얘기해두는 거야, 하고 유현오는 말했다.

제니가 직접적으로 미진을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한데 큰 일조를 했다는 말은 하지는 않았다. 마음같아서는 하고 싶었다.

제니가 그날 그렇게 퍼붓지만 않았더라도 미진이가 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저스틴의 얻어준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저스틴과 진도가 그렇게 빨리 나갈 일이 없었을 것이고 결혼하기 위해 폭설이 내리는 한겨울에 레이크타호 지역으로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사고가 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미진이가 그렇게 어이없이 죽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미진이가 그렇게 허망하게 바람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 누구 탓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고 유현오는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간 일을 가상해보는 일 또한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미진이가 저스틴과 결혼식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다가 차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 지금까지 유현오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저스틴과 얽히지 않았더라면 미진이가 지금 살아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그냥 우리집에서 살고 있었더라면, 아니면 저스틴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방을 얻어나가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었더라면 미진이는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옛날 어른들이 늘 입에 올리는 ‘팔자’라면, 그러니까 미진이가 그날 그 시간에 죽을 팔자라면 피할 수 없을 죽음이긴 한데….'

“그래서 제니가 아이들과 잘 어울려?”

어울리다마다. 친언니, 아니 친엄마처럼 제이와 케이를 돌보고 있었다. 미진에게 심하게 했다는 죄책감때문인지 엄마잃은 아이들에 대한 동정심때문인지 병아리를 품은 어미닭처럼 한 침대에서 잠도 같이 자고 한 탕에서 같이 목욕까지 하면서 알뜰살뜰 보살피고 있는 제니였다. 그 때문인지 두 아이들도 제니를 엄청 잘 따른다. 그리고 엄마를 찾지 않는다.

어쨌든 엄마의 부재를 알 만한 나이인데 벌써 죽음이라는 것을, 아무리 투정하고 울어봐도 한번 죽은 엄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체념하고 있는가….

“그나저나 웬일인가. 어제께도 전화를 하더니….”

어저께도 전화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던 정선우였다. 별 용건없이 안부전화였다고 했다. 어제도 제니에 대해 물었고 미진의 두 아이에 대한 동황을 물었었다.

“사실은….”

정선우가 잠시 말을 끊고 침묵했다. 말을 꺼내는 것을 많이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다는 게 얼굴을 보지않아도 짐작이 될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부엌쪽에서 들려오는 떠들석한 소음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면서 유현오가 재촉했다.

“자네답지 않게 뭘 망설이나. 할 말 있음 빨리 해”

“그래, 할말이 있네…. 다름이 아니고 저스틴이 결혼을 해”

“…."

유현오는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 저스틴이 결혼을 한다고?

결혼, 결혼, 결혼.

누구나 할 수 있다. 나이가 차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기고 상황과 조건이 맞으면 할 수 있는 결혼. 그러나 이건 아니다. 정말로 이건 아니다.

“나도 첨엔 무척 놀랐어. 그런데….”

미진이가 죽고 혼자 가까스로 살아남은 저스틴이었다. 굉장히 운이 좋은 편에 속한 저스틴이었다. 높은 낭떠러지에서 차와 함께 수십번을 굴렀는데도 갈비뼈 몇개가 부러지고 두 다리가 부러지고 온 몸에 타박상을 입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으니. 높이 쌓인 눈이 완충작용을 해서 그렇다는 얘기를 유현오는 전해들었다.

미진이는, 가엾은 미진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구르는 차에서 몸이 튕겨져 나와 머리를 바위에 부딪친 게 죽음의 원인이었다. 무슨 일인지 미진이가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있었다던 게 경찰조사결과가 나왔다. 매우 조심성있는 성격의 미진이 왜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있었을까. 내내 하고 있다가 뒷자석에 있는 물건을 집으려다 잠깐 풀었을 수도 있긴 한데.

미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짓찧고 울면서 몇날 며칠을 괴로워하던 저스틴이라고 했다. 서너달 입원해 있는 동안 그 누구와 대화를 나누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더라는 저스틴이었다. 혹시라도 나쁜 생각을 할까봐 부모가 특별한 보호를 요청했다는 저스틴이었다.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해있다 얼마전에 퇴원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게 엊그제였는데 결혼이라니. 벌써 결혼이라니.

“미진이와 가까와지기 전에, 그러니까 결혼을 결심하기 전에 양쪽 부모님의 권유에 의해 잠깐 만나던 여자가 있었다네. 이름이 샌드라라고 하던가. 바브라하고 했던가.나도 병원에서 두어번 본 일이 있는데 아주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의 아가씨였어. 직업이 변호산가 그렇다네. 그런데 그 화려한 외모의 주인공이 애정인지 동정심인지 모정인지를 저스틴에게 느낀 것 같아. 하루도 빼지 않고 퇴근후 병원으로 가서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했나봐. 두 다리를 못쓰는 저스틴의 용변까지 받아내면서 시중을 들고 돌봐주었다네. 그 정성이 저스틴의 마음을 움직여서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는 것 같다고 하던데….”

“….”

그래도 그렇지. 미진이가 죽은 지 이제 겨우 석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예전 어른들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닿은 유현오였다.

저스틴은 샌드란지 바브란지 그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하하 웃으며 알콩달콩 살아가겠지. 미진이란 존재는 완전히 잊은 듯이 단란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태어나서 한번도 행복해보지 못한 여자처럼 항상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던 미진이. 하늘에서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슬플까….

“오늘 전화한 것은 저스틴의 결혼소식을 전하려는 것도 있지만….”

정선우의 다음 말이 유현오를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게 했다. 저스틴이 케이와 제이를 데려다가 키우겠다는 말.

“와이프가 될 여자하고는 이미 상의하고 내린 결정이라네. 샌드라인지 바브라인지 그 아내가 될 여자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선선하게 받아들였다지. 그런 걸 보면 저스틴이 결혼을 참 잘 하는 것 같기고 하고. 요즘 세상에 처녀의 몸으로 남의 아이를 둘씩이나, 그것도 자기 남편 될 사람이 죽도록 사랑하던 여자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운다는 게 보통 일인가….”

유현오는 정선우의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스틴, 이 자식! 이 나쁜 자식!

옆에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였다.

내게 미진이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 아이들마저 빼앗아 가려고 드는구나!

“저스틴도 참 대단하지. 완전 영화나 소설속에나 나올 법한 순애보의 주인공이지 않은가. 한때 자네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었더랬지만 말이야. 자네나 저스틴이나 보통 사람들이 아니야. 아무리 미진이를 사랑했다하더라도 어떻게 결혼과 동시에 두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울 생각을 했는지. 우리 정서로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네. 어찌보면 평생 혹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부모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가 둘이나 딸린 여자와 결혼을 강행한 것도 보통 멘탈의 소유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강한 건가? 아니, 나는 무서워.사랑이라는 게 무서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세상의 도리와 법도와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과감하게 저질러버려대니까. 캠퍼스 커플로 만나 아내가 임신하는 바람에 사랑이고 나발이고 모른 채 대충 결혼해치워버린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고 이해할 수가 없네….”

“….”

“도대체 사랑이란 게 뭘까. 어떻게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저스틴과 미진이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됐을까. 지난 일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 계기와 이유를 모르겠네. 작년 봄부터라고 하던데. 내가 한국에 잠깐 나가 있을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그때 나 없는 빈 사무실에서 둘이 서로 눈을 쳐다보고 있다가 사랑에 빠지게 됐을까.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 같이 오래 있으면 자연적으로 애틋한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

“그 화려한 변호사 아가씨가 아이 둘을 데려오는 저스틴과 결혼하려는 것도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지. 꿈같은 신혼생활을 해야할 마당에 남의 아이들의 뒷치닥거리를 하는 것을 감수하고 저스틴과 결혼하려는 것 말이야. 그정도 스펙을 가진 여자라면 저스틴 아니라도 얼마든지 더 훌륭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정말로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큰 힘이 있는 것 같아….”

“저스틴을 내가 만나봐야겠군. 전화번호를 주게”

유현오는 연극대사 읊조리듯 하는 정선우의 말을 끊었다.

“뭐라고?”

못 알아들은 듯 정선우가 되물었을 때 유현오는 빽 소리를 질렀다. 저스틴의 전화번호를 달라고!

“미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게 자기 책임이라는 죄책감속에서 현실감각을 상실한 채 내린 결정인 것 같은데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삶에 대한, 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깊은 고찰도 없는 부잣집 귀공자가 남의 아이를 둘이나 키운다는 것, 자네는 이게 가능할 것 같나? 아이를 키우는 것, 양육은 현실이야. 일시적인 감상에 빠져 결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일세…”

“나도 처음에 많이 말렸지. 저스틴의 부모는 물론이고 박 매니저까지, 그리고 샌드라의 부모님까지 나서서 죽기 살기로 말렸어. 그런데 저스틴의 결심은 확고하던데?거기다가 결혼할 여자까지 동조를 하니 어쩔 수가 없는 거야. 저스틴과 그 여자의 결심이 워낙 강경하니까….”

“….”

“어쨌든 아마 가까운 시일내에 저스틴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갈 거야. 아이들을 데려가겠다는 얘기를 할 거라고. 충격을 받기 전에 내가 미리 귓띰을 해주는 거야. 잘 됐지 뭐야. 자네도 몇달동안 일하면서 아이들 돌보느라 힘들었을 건데 맡아 키우겠다는 사람이 나섰으니. 아이들한테 각별한 자네 마음은 알겠는데 눈 딱 감고 얼른 넘겨버려. 더 정들기 전에….”

“아이들은 내가 키워….”

“뭐라고?”

잠시 말이 없는 정선우였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확인하듯 유현오가 힘주어 재차 말했다.

“이 아이들, 제이와 케이를 내가 앞으로 맡아 키울 거라고….”

미진이는 죽고 아이들 아버지인 창민은 한국에 나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유현오는 제일 먼저 아이들을 걱정했었다. 두 아이들에게는 실질적인 보호자가 없는 형편이었므로.

두 아이들을 맡아주고 있다는 집에는 열몇명의 어린 아이들이 드글대고 있었다. 베이비 시터를 하고 있는 여자는 남편과 이혼한 후 받은 콘도가 유일한 재산인 여자였다. 별다른 인컴없이 오로지 남의 아이들을 봐주고 사는 여자였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나 책임감없이. 오로지 돈을 위해. 그런 집에 미진의 아이들을 방치해둘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유현오였다.

제이와 케이를 집에 데리고 오자 천정까지 펄쩍 뛰어오르면 좋아하는 사람은 폴이었다. 예전에 미진이가 잠깐 들어와 살 때처럼 두 아이들과 같이 살게 된 것을 대환영했다. 아이들 또한 폴과 제니를 잘 따르고 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박교수를 통해 창민의 의사를 타진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맡아 키우겠다는 의사를. 유현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아버지라는 창민이가 도저히 아이들을 데려가 앙육할 입장에 있지 않는 것도 큰 몫을 했다. 창민은 지금 한국에 가 있었다.

“완전 얼이 빠진 놈같아요. 대낮인데도 술에 취해 있고….”

박교수의 의하면 창민은 신문사에서 쫓겨난 뒤 바로 한국으로 출국해버렸다고 했다. 미진이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며칠을 수소문한 끝에 혹시나 싶어 한국의 본가로 전화해서 알아낸 사실이라고 했다. 그게 지난 12월이었다.

요즘 박교수를 통해 간간히 들은 창민은 현재 완전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엄마 아빠없이 고아나 진배없이 미국이란 땅에 떨어져 있는 아이들의 사정이나 미래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위인같았다고 했다.

미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려주었을 때도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고 했다. 갑작스런 미진의 죽음의 원인이나 장례식 일정 따위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마지못한 듯 아이들의 거처와 누가 돌봐주고 있느냐고만 덤덤하게 물었다고 했다.

창민은 말했단다. ‘박교수 당신이 다 알아서 해줘’라고.

이혼할 때 양육권을 미진에게 넘겨준 것을 이유로 아이들에게 친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박교수가 키우든지 적당히 알아서 좋은 데로 보내달라고. 한국으로 데리고 와봤자 자기는 죽어도 키울 수 없고 어머니나 동생들 또한 사정이 좋지 않으니 고아원으로나 보내야 할 형편이라고.

박교수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창민에게 아이들이란 그냥 귀찮은 존재였던 것 같았다고.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아이들이었답니다. 그래서 책임감이나 애정 따위는 전혀 없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창민이 그러더란다. 미진이를 만나 결혼한 것은 일생일대의 큰 실수였다고.

그 말을 전해들으면서 유현오는 중얼거렸었다. 진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훌륭한 보석도 한낱 돌멩이 일뿐이지….

“누가 뭐라 하든 아이들은 내가 책임져….”

유현오는 다시 정선우에게 힘주어 말했다.

엄마 아빠를 한시에 잃은 불쌍한 아이들이다. 아이를 전혀 키워본적 없는 사람들에게, 더구나 신혼인 사람들에게 보내 눈치꾸러기, 천덕꾸러기가 되게 할 수 없다. 저스틴과 그 부인되는 여자는 동정심과 치기로 아이들을 데려가려는 것 뿐이다. 그것은 한시적인 감정이지 절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저스틴에게 전해. 결혼하면 새 신부에게나 충실하라고….아니, 그럴 것 없이 빨리 전화번호를 주게. 내가 직접 말하겠어”

유현오는 어이없어 하는 정선우를 재촉해 저스틴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정선우가 뭐라고 더 얘기를 하려는 걸 끊고 유현오는 시계를 보았다. 일요일 오후 다섯시였다.

며칠 후쯤 적당한 날을 잡아 만나서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입양수속이 더 진행이 시작되기 전에 그만두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현오는 길게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저스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스틴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유현옵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그렇잖아도 연락드리려고 했었는데...”

유현오는 일단 축하의 말부터 꺼냈다. 결혼한단 얘기를 정선우로부터 전해들었다. 축하한다….

그리고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미진의 아이들을 입양하겠다는 결심을 하셨다구요. 아주 어려운 결심하셨습니다….”

갑자기 유현오의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다. 정선우의 말대로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예전에 아이 둘 딸린 아내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 사방에서 날아들던 돌. 그 돌을 다 맞으면서, 맞아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아내와 결혼을 강행했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단지 사랑했기 때문에. 저스틴 역시 그랬다. 미진과 결혼함으로 온갖 어려움을 다 겪을 걸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그런 가파르고 험한 길을 걸을 생각을 했다. 단지 사랑한다는 사실하나만으로. 그리고 이번엔 다시 하기 힘든 결심을 했다. 그런 저스틴이 웬지 측은하고 안 됐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유현오는 그런 생각을 조금도 목소리에 담지 않은채 냉랭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 문제만은 조금 심각하게 생각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동안 여러사람으로부터 같은 얘기를 들으셨겠지만 제가 한마디 더 보태지요. 생판 모르는 아이들을 손주로 받아들여야 할 부모님과 신혼의 단꿈에 젖어야 할 부인에게 아이들이 얼마나 큰 부담스런 존재가 될지 감안하고 결정을 했는지요?”

유현오는 자기의 경험을 얘기했다. 주위의 눈은 그렇다치고 제니때문에 빚어졌던 수많은 문제와 갈등과 고난과 반목.

그러나 저스틴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잘 알아들었습니다만. 즉흥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정선우씨로부터 아이들 아버지가 친권을 포기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이후부터 몇달을 심사숙고하고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부인될 사람을 생각하시라 이 말입니다.당신이야 책임감도 있고 주위의 이목도 있고 아이들과 잠깐 이나마 시간을 같이 했으니 애정도 있겠지만 부인이 무슨 죄란 말입니까? 제가 보기엔 저스틴씨가 굉장히 이기적입니다.”

유현오가 다시 강경하게 말하자 저스틴이 침묵했다. 그리고 주저하더니 말했다.

“제가 결혼하려는 이유, 서둘러 결혼하려는 이유가 바로 아이들때문입니다. 사실은….”

망설이는 듯 잠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던 저스틴이 결심했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싱글인 남자에게는 입양이 잘 안 됩니다. 조건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겁니다. 아이들을 하루라도 빨리 입양하기 위해서….”

"뭐라고요?"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에게는 입양이 훨씬 쉽다고 해서... 그래서...."

"그렇다면 그 사실을...."

뒤통수를 한대 맞은 심정으로 유현오는 다급하게 물었다. 이 사람 정말 큰일 낼 사람일세...

“그..그 사실을… 내가 묻기엔 좀 주제넘은 것 같기 하지만… 그 여자분이.. 결혼할 여자분이 알고 있나요? 아이들을 입양하기 위해 자기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이용’이란 말을 해놓고 유현오는 아차, 했다. 그렇지만 이용이란 말 외에는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던 유현오였다. 그러나 저스틴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예. 다 말했습니다.

유현오는 할 말을 잊었다. 저스틴 이 사람, 참 대단하구나….

아연하고 놀랍고 감탄스럽고 대견하고 고맙고, 그리고 감동스러운 마음이 복합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번에도 졌구나…

그러나 유현오는 기분이 좋았다. 유쾌했다. 이 남자, 진정으로 미진을 사랑했듯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구나….

“좋습니다.”

유현오가 경쾌하게 말했다.

“그런데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가끔 저도 아이들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우리 딸 제니랑 폴이랑 같이요….”

“아, 그거야 물론이죠”

전화를 끊고 부엌으로 나갔다. 어느새 떡볶이는 다 해먹고 치웠는지 부엌이 깨끗했다. 유현오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병을 꺼내 들었다. 뒷뜰로 나가면서 흘낏 보니 아이들은 소파에 나란히 기대 앉아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정다워보였다.

유현오는 뒷뜰 의자에 앉아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바람이 된 미진아. 너는 결코 외롭지 않구나. 너를 저토록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이 항상 같이 있으니. 너는 바람이 되어서도 혼자 떠돌지 않아도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