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맞추러 갔다.

친하게 지내는 검안의 K씨가 내 눈을 검사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차마 말은 안했지만 제 구실도 못하는 이런 눈을 뭐 하러 달고 다니냐,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검사를 마치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

"보니 평소에 안경을 안 쓰고 다니는 것 같던데 이런 형편없는 시력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요?"

당연히 안 가능하지.

그렇지만 모르는 길을 운전해 갈 때나(사인판을 읽을 수 없으니까) 경찰차가 얼씬거릴 때 외엔 (안경 없이는 운전할 수 없는 법적 시력장애인(legally blind)이니까) 안경을 쓰지 않고 꿋꿋하게 버틴다.

며칠전 밤엔 한국마켓에 갔다가 L씨 부부를 만났다. 그들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고 해야 옳겠다. 내 쪽에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경우는 아주 드무니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내게 L씨가 말했다.

"그렇게 눈이 나쁘면서 평상시엔 왜 안경을 쓰지 않아요?"

내가 대답했다.

"아이고, 이 못난 인물에 안경까지 걸쳐놓으면 어쩌라구요"

정말이다. 안경 쓴 내 모습은 딱 ‘B사감과 러브레터’에 나오는 심술궂은 사감선생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잘 쓰고다니는 안경이 나는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신은 참 공평하다. 나쁜 시력 대신 기찬 후각을 주셨으니.

나는 냄새를 잘 맡는다. '개코'가 따로 없다. 상대방이 오늘 목욕을 했는지 안 했는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인지 아닌지, 하다못해 어떤 회사의 향수를 뿌렸는지도 금방 안다. 지인들이 헤어스프레이나 세수비누를 바꾸어도 얼른 알아챈다.

이런 뛰어난 후각을 가진 줄 일찍 좀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내 인생의 방향이 좀 달라졌을 텐데. 조향사(調香師)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향을 조합하는 조향사. 오, 내가 조향사가 돼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어릴 때의 내 꿈은 서점 주인이었다. 원없이 실컷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소설가나 기자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맙게도 나는 내 꿈을 대충 이루며 살아온 것 같다. 서점 주인은 못되었지만 돈만 생기면 서점에 달려가는 것으로 책에 대한 갈증은 충분히 푼 것 같고, 기자도 해보았고 ‘작가님’ 소리를 들으며 계속 소설도 쓰고 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해 어릴 때 꿈이 뭐였었는지 까마득한 사람들도 많은데, 평생 꿈 언저리를 맴돌다 그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현재 나는 또 다른 꿈을 가지고 있다.

내게는 식은 죽 먹기인 정리정돈. 그 정리정돈을 잘 못해서 쩔쩔매는 사람을 도와주는 오가나이저 컨설팅(organized consulting)이다. 나는 확실히 집안 정리정돈 하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남의 집에 발을 딱 들여놓으면 벌써 어떻게 그 집을 정리해야 할지 머리에서 그림이 파파팍, 그려지는 것이다.

물론 우리집은 초년병사의 사물함같이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사람들이 말했다.이계숙씨 집은 사람이 안 사는 집 같다고. 모델 하우스 같다고.

또 하나는 65세에 은퇴한 후 이룰 꿈이다.

바로 작은 다방을 하나 차리는 것이다. 에스페로스니 뭐니 혀도 안 돌아가는 고급 커피 말고 설탕 듬뿍, 프림 듬뿍 넣은 한국의 7~80년대 스타일의 커피를 파는. 7080 가요를 늘 들을 수 있는. 타향살이에 지친 사람들이 고향의 추억에 젖을 수 있는 그런 다방.

나는 한복을 떨쳐입고 그 다방의 ‘이 마담’ 이 되어 남의 신세 한탄 들어주고 조언도 해주는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가만있자, 지금으로부터 65세가 되려면  십몇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십몇년 후면 내 다방의 단골손님이 될 지인들이 80, 90이 넘을 텐데 그때까지 살아 있기나 하겠나?

그럼 그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시작 해볼까? 10년 너머 다닌 직장이 슬슬 진력이 나기 시작하는데 이 참에 확 때려치우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