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재밌는 일이 있었다.

출근길에 한 남자가 나를 회사 주차장까지 쫒아 온 것이다. 나는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도 누가 따라 오는지도 몰랐다. 핸드백을 챙겨 차에서 내리려는데 어떤 남자가 앞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어 얼마나 놀랐던지.

그가 말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매혹적인(!)옆 모습에 반했다고. 나의 핸들 쥔 손을 확인했더니 결혼반지를 끼지 않았더란다. 그래서 자기 회사에 늦을 각오를 하고 나를 따라 왔다나. 손을 많이 씻기에 거추장스러워 반지를 끼지 않았을 뿐인데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다니!

결혼했다는 내 말에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 돌아섰다. 멀어져 가는 그 남자 차를 보면서 나는 중얼거렸었다.

'얌마. 니 말대로 나 같이 매력적인 여자가 아직까지 싱글로 남아있겠냐? 내가 아직도 싱글이면 그게 이상한 거지....'

가끔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시는 여성이 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아주 예쁜 사십대 초반의 여자인데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산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결혼해야겠다고 여러모로 노력중인 그녀가 내게 하소연했다.

"좀 괜찮다 싶은 남자들은 왜 모두 기혼자일까요? 남아 있는 싱글들은 하나같이 영 별볼일 없네요"

내가 독신일 때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

'쓸만한 남자들은 왜 다 결혼을 했을까'

그러나 그건 당연한 일이다. 쓸만한 남자니까 내 차례까지 오기도 전에 벌써 다른 여자가 채갔을 것 아닌가.

나랑 자주 전자우편을 주고 받는 뉴욕에 사는 여자 팬이 한 명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십대 중반의 싱글녀이다. 인물도 뛰어나고 재력도 있는 여성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않았다.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이고 별로 아쉬울 게 없으니 결혼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최근 사랑에 빠졌단다. 불행하게도 부인과 별거중인 남자와. 남자는 곧 부인과의 정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는데 어쨌든 그 여성은 그 남자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나도록 행복하단다. 하품하는 모습마저 매력적인,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남자이기에 절대 놓치고 싶지않단다.

누굴까. 그 까다로운 여자를 사로잡은 남자는.

생각해 본다. 그는 지금 그 남자의 보여지는 모습만 보고 사랑에 빠진 건 아닐까. 남자의 본모습을, 남자의 실체를 알고 나서도 지금과 같은 애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작가 최인호의 '겨울 나그네'란 오래된 소설이 있다.

주인공 민우가 다혜라는 여자의 꽃같이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사랑의 열병을 앓자 민우의 친구인 병태가 이죽거리며 말한다.

"야야, 한커풀 벗겨보면 여자란, 계집애란 다 똑같은 족속이야. 니가 천사같이 여기는 그 계집애도 사실은 방귀도 뀌고 트림도 하고 밤에 침 질질 흘리고 자는 생물체란 말이야"

같이 사는 배우자한테 신비감을 느끼고 있는 부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밑바닥까지 볼 것 다 보고 지지고 볶으며 산 사이에 그런 게 남아 있을 턱이 있나.

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더 신선하고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밖으로 드러난 좋은 모습만 보는 까닭이다. 적어도 저 여자는, 저 남자는 내 마누라나 남편과는 다를 것이다, 하는 환상의 비늘이 눈에 씌어 있기 때문이다.

밖에선 펑펑 돈을 잘 써 통 커 보이고 대범해 보이는 남자도 집에선 1전까지 따지는 쪼잔한 남자일 수 있고 애프터 세이브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말쑥하고 상큼한 남자도 집에서는 소변보고 물도 안내리는 지저분한 남자일 수 있다.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이 지고지순한 여자로 보이지만 실상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매일 남편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사나운 여자일지도 모르며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 입고 퍼지르고 앉아 양푼으로 밥 먹는 여자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차리고 나가면 멋있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하지만(자랑이 아니라 실제다)집에서는 여느 여편네와 다름 없다. 사시사철 가운 하나만 입은채 종일 세수도 안하고 뒹굴거리는 게을러터진 여자인 것이다.

아무리 멋져보이는 사람도 살아 보면 다 똑 같다. 그러나 남의 떡은 항상 더 커 보이고 남의 잔디밭이 원래 더 푸르다.

그리고 환상은 늘 무지개 빛깔로 아름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