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해서 나도 빨강 립스틱 바르고 운전해 봤거든? 그런데 아무도 안 따라오더라고..."

지지난 일요일, 교회에서 P씨 부인이 한 말이다. 그녀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와르르 웃었다.

중앙일보 독자라는 한 여성은 날 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빨강 립스틱 안 바르셨네요? "

빨강 립스틱을 바른 내 모습에 홀린(?) 남자가 회사까지 따라왔다는 글을 쓰고 난 뒤 많은 놀림을 당했다.

얼마나 쥐 잡아먹은 듯 진하게 입술을 칠하고 다녔으면 남자가 다 따라오냐는. 그 남자가 맨정신이 아니고 분명히 간 밤에 마신 술이 덜 깼을 거라는. 차도 빨강, 립스틱도 빨강, 유난히 빨강색을 좋아하는 것 보니 이계숙씨는 전생에 무당이 틀림없었을 거라는.

그랬는데 같은 이야기를 들은 남편의 반응은 남들하고 판이하게 달랐다. 남편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즉각 내 신변부터 염려하는 것이다.

그 남자가 범죄자 같아 보이지는 않더냐. 정신은 올바른 사람같더냐. 그러기에 내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라고 하지않더냐. 다음에 또 이상한 사람이 따라 오는 것 같음 즉시 가까운 경찰서로 차를 돌려라....

나는 다시금 느꼈다.

아, 미우니고우니 해도 날 생각해 주는 이는 역시 남편이구나....

사실 지금 내가 타는 차도 남편이 내 안전을 염려해 사준 것이다. 여든살 할머니같이 벌벌 기는 운전솜씨 주제에 스포츠 카만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없는 살림에 과용을 한 것이다. 만약 사고가 나더라도 튼튼한 차체의 차가 부상을 최소화하지 않겠냐면서. 나를 배려하는 남편의 마음이 눈물겹지 않은가.

얼마 전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던 밤이었다.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내 차 주유기 바늘이 제로를 가리키고 있었다는 게 문득 생각났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기름이 없어 어쩌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더니 남편이 부시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그리고 비바람을 뚫고 나가서 기름을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나도 차에 기름정도는 넣을 줄 안다. 그러나 결혼 후 단 한번도 내 손으로 기름을 넣어보지 않았다. 남편이 다른 것은 안 해도 내 차에 기름넣는 일은 도맡아 해주는 것이다.

최근에 Q씨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나왔다.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아무래도 건강상태가 예전과 못해졌다.

Q씨의 부인이 말했다.

"아유. 이제는 이혼도 못하게 생겼으니 꼼짝없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겠네..."

Q씨 부인의 말인즉슨 30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하루도 이혼 생각을 안 해본 날이 없었단다. 그랬는데 몸도 성치 않은 남편을 두고 어찌 떠나갈 수 있겠냐면서 이혼생각을 완전히 접었단다.

내가 이죽거렸다.

"아이고, 나 같으면 오히려 병수발 하기 싫으니 기회는 이때다, 얼씨구나 이혼하겠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그런 일이 닥치면 나 역시 실행을 하지 못할 것이다. 미운정 고운정 다 든 남편, 어렵고 힘들 때 끝까지 옆에 있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내가 마지막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면 그 역시 그럴 것이므로.

지난 두어달동안 나는 거북이처럼 엎드려 칩거했다. 친하게 지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추악한 뒷면을 발견하고 너무나  실망했기에. 나름대로 '사람의 관계'라는 것과 나를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직장 외에는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전화를 하지도 않았고 받지도 않았다.

절간처럼 조용한 집에서 혼자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새삼 재확인 한 게 있다. 뭐 특별히 대단하거나 심오한 건 아니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 둘러 쌓여 있어도 인간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평범한 것. 그러나 마음맞는 동반자가 같이 있다면 적어도 인생길이 쓸쓸하거나 외롭지는 않다는 것.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나랑 항상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니. 나랑 항상 같은 뜻을 가지고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니. 비바람 몰아치고 천둥번개 우는 고해의 인생길을 묵묵히 나랑 동행하는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은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