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만에 반가운 지인을 만났다. 낯선 남자의 팔을 끼고 다가온 그녀는 옆에 머쓱하게 선 남자를 우리에게 약혼자라고 소개했다. 축하한다며 그녀를 껴앉았더니 나의 남편이 삐쳤다. 그들이 민망하도록 나의 팔을 잡고 획 돌아서던 남편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그들에게 많이 미안했지만 남편의 마음을 읽으니 안스러웠다.

그녀는 남편 친구의 아내다. 몽고메리에 이사와 남편이 주말마다 테니스 파트너로 만나며 오랫동안 친분을 쌓았던 그녀의 남편은 2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의 두 딸과 어릴적에 자주 어울려 놀았던 그집의 딸들도 집을 떠났고 넓은 집에 그녀만 동그마니 남았다. 간혹 그녀가 어떻게 지내나 생각하다가 이번에 행복에 겨운 그녀를 만나니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아픈 남편을 간호하던 2년 전의 지쳤던 모습에서 완연히 다르게 변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던 말은 맞다. 60대이지만 젊고 아름답게 바뀐 그녀를 보고 나의 남편이 심술을 부렸다. 친구의 아내와 약혼자를 반갑게 맞아주지 못하는 마음은 백 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들을 냉대한 남편의 태도에 나는 많이 섭섭했다.

우리생활에서 친구 자식들의 결혼소식은 드물게 듣는다. 그러나 지나가는 바람처럼 간혹 원근에 사는 지인들이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잖아도 지난달에 켄터키 주에 사는 옛 대학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알고 우울해하던 남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핸들을 잡고 쌕쌕하던 남편의 머리속에 돌아가던 활동사진을 나도 보았다. 세상 떠난 친구와 만들었던 아름다웠던 추억의 단편들이 줄지어 떠올라 인생무상에 씁쓸했다.

남편의 뇌리 깊숙이에서 꿈틀이던 질문이 하나 있었다. 차마 입밖에 꺼내놓지 못하는 그의 질문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혹시 자기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나도 그녀처럼 데이트를 하려나? 하는 의문이었다. 힐끔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눈치가 대답을 요구했지만 나는 창밖의 깊은 어둠에 시선을 숨기고 한 아름다웠던 부부를 생각했다.

몇 년 전, 크루즈여행을 끝내고 알래스카 내륙 도시 페어뱅크스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였다. 비행기가 앵커리지를 이륙한 후에 승무원이 방송을 했다. 일등석에 좌석이 둘 비었는데 크루즈 선상에서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Mr. & Mrs. 누구” 하고 이름을 부르며 앞쪽에 있는 일등석으로 그들을 초대했다. 비행기에 꽉 찬 승객들은 박수를 치며 신혼부부를 축하했다. 중간쯤의 좌석에서 천천히 일어나던 신혼부부는 놀랍게도 80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나와 승객들은 더욱 요란스럽게 박수를 치며 그들의 행복을 빌었다. 서로 팔을 부축하고 일어나 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가던 꾸부정한 신혼부부의 뒷모습이 눈물나도록 아름다웠다.

사랑에 무슨 나이 제한이 있나. 혼자 외롭게 노후를 보내는 것보다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지는 해를 마주본다면 석양도 일출이 될것인데. 아무튼 ‘일편단심 민들레’는 전설의 고향 스토리이다. 그리고 이 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이다. 가슴에 묻은 죽은자의 몫까지 열심히 사는 것이 남은 사람의 의무이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권리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약혼자의 팔을 잡고 밝게 웃던 그녀에게 맘껏 축복을 빌었다.

집에 도착해서 차를 세운 남편에게 그가 가졌던 질문을 바꾸어서 답을 주었다. 혹시나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남편이 결혼한 딸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좋은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단 젊은 여자가 아니라 세대 차이가 없도록 남편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를 만나라. 습성과 취향이 같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고 종알거렸더니 남편이 폭소를 터뜨렸다. 남편의 얼굴에 걸렸던 검은 구름이 날라갔다. 그때 훗날 어디에선가 친구 아내와 약혼자를 만나면 분명 남편이 먼저 악수를 청할것이라 생각한 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만약에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내가 친구의 아내처럼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면 남편은 저세상에서 찾아와 나를 괴롭히겠다고 윽박질렀다. 남편의 고집스런 소유욕은 이승과 저승을 모른다. 세상 욕심은 죽어도 버리지 못하겠다는 남편이 은근히 밉다. 중요한 것은 잃은 것이 아니라 가진 것임을 왜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