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피우는 말썽에 삶의 지혜가 따라온다. 새해초부터 남편과 라멘과 라면의 씨름판을 벌리고 나서 배운 것이 있다. 실없던 게임에 승자는 없다고 여겼는데 아니다. 한 수 배운 내가 이겼다.

다툼은 엉뚱하게 시작되었다. 몽고메리에 사는 일본인들의 연말파티에서 ‘더티 산타’ 선물 교환이 있었다. 각자 선물 하나를 가져와 간단한 룰에따라 고르고 뺏거니 하며 선물을 교환한 후에 하나를 가져가는 재미있는 교환 방식이다. 30여가지 물건중에 맥주 케이스와 훈제연어와 라멘 5개가 든 패키지가 단연 인기였다. 점잖은 일본인들은 뺏는 것을 민망히 여겨 질서를 지켰다. 자신이 고른 선물이 맘에 들지 않아도 얌전했다. 내 순서에 둘째 사위가 좋아하는 맥주 케이스를 뺏았더니 다음 번호를 가졌던 젊은 주재원이 뺏아갔다. 젊음의 용기가 신선했다.

또 다른 인기 품목인 훈제연어와 토요수산의 라멘 패키지를 가지려고 몇 사람이 뺏고 뺏았다. 마침 남편의 차례가 되자 3 사람의 손을 거쳐간 그 선물을 마지막으로 차지했다. 의기양양 선물을 가져온 남편은 일본산 라멘을 먹고 싶어했다. 다음날 끓여주었더니 아주 맛있다며 좋아했다. 맛을 보니 담백하고 깔끔했다. 그러나 남편은 말 실수를 했다. “일본산이 한국산 보다 더 맛있다.” 톡 쏘는 매운것은 좋아하지만 얼큰한 것은 싫어하는 남편과 맵고 얼큰한 것을 좋아하는 나는 원래 라면을 즐겨 먹지 않는다. 한달에 한두 번 먹던 별미음식이다.

1월 초 흐리고 비가 부실부실 내리던 주말에 스시가 먹고 싶던 남편이 애틀란타 가자고 했다. 날씨탓으로 미적이던 나를 충동한 것은 내가 사고 싶은 것 사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냉큼 일어나 준비하고 따라나섰다. 애틀란타의 일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식품점에 갔다. 라면코너를 기웃이며 일본산 라멘을 찾는 남편을 따르다가 다양한 라면의 종류에 놀랐다. 한 두 가지 외에는 거의 낯설었다. 갑자기 한국산 라면을 비하한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진열대 시작부터 라면이 4개든 패키지들을 무조건 집어서 카트에 담았다. 식품위에 라면 패키지들이 수북히 쌓여 산을 만들었다. 계산대에서 그것을 본 남편이 “미쳤냐?” 고 화를 내어서 뭐든지 사주겠다는던 약속을 상기시켰다.

다음에 일본 식품점에 들렀다. 가게 확장없이 수 십년 제자리를 지키는 식품점에서 남편이 고른 것은 일본산 라멘 패키지들이었다. 내가 한국산을 많이 샀으니 자기도 일본산 사겠다고 고집해서 말리지 않았다. 다행히 한국산처럼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 좋았다. 혈압과 콜레스테롤이 높아 염분이 많은 음식을 피하는 부부가 라멘과 라면을 잔뜩 사갖고 돌아오며 새해 시작부터 거꾸로 사는 것이 우스웠다.

하나씩 맛보자며 맵다는 일본산 라멘부터 시작했다. 면발이 가늘었고 매콤한 맛이 은근했다. 남편은 좋아했지만 나한테는 그저 그랬다. 며칠 후 한국산 라면을 끓였다. 틈새라면. 매운 것을 잘 먹는 남편도 고개를 흔들 정도로 화끈하게 매웠다. 그 다음 기회에는 나가사끼 홍짬뽕을 끓였더니 남편이 두 손 들었다. 아직 불닭볶음면을 맛봐야 한다고 하니 “노 생큐” 했다. “한국사람 매운맛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경고라 했더니 땀을 닦으며 못마땅한 눈총을 주었다.

농심, 오뚜기, 팔도, 삼양 회사들에서 만든 컬러풀한 라면 패키지들을 쭉 늘어놓아 보았다. 처음 라면을 본 적을 기억하니 라면문화의 거대한 변천사에 경이감이 일었다. 더욱 우스운 일은 미시시피에 사는 올케가 들러서 순한 채소 라면이라 색다르니 맛보라면서 라면 패키지를 주고갔다. 그러잖아도 라면이 잔뜩 쌓였는데 하나가 더 늘었다. 라면 부자가 되었다.

누군가 보내준 좋은 글이 생각났다. ‘일본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어느 장소에서든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말라며 훈계하고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남에게 양보하라고 가르친다. 그에 반해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절대 남에게 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 교육을 받은 나도 배려와 겸손이 결핍되었나 보다.

남편과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하면서 같은 음식을 갖고 라멘과 라면이라 부르며 도토리 키재기로 아웅다웅했다. 남보다 더 나으면 더 행복하다고 믿는 착각에서 깨어났다. 함께 공존하는 화평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다음에는 담백한 라면을 끓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