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숱이 적어서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살짝 잡아 당기듯이 빗질해서 왼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잡고 오른손으로 가위질을 하는데 갑자기 남편의 머리가 앞으로 푹 숙여졌다. 가슴이 섬뜩했다. 급하게 어깨를 흔들었더니 남편이 부수수 깨어났다. 겨울의 따스한 햇살에 그는 꼬박 졸았다. 믿고 싶지 않지만 남편은 노인이다. 남편의 안녕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무의식속에 꿈틀거렸다.

주말 오후에 뒷뜰에서 남편의 머리를 자르면서 집안 미용사가 된 사연을 회상했다. 이민 초기였다. 영어를 못하니 미용실 가서 머리손질을 부탁하는 것을 거북해하신 어머니가 딸자식들에게 머리를 맡겼다. 우리는 미용사들이 머리 만지는 것을 눈여겨 본대로 흉내냈다. 여러 딸이 어머니의 머리를 손질했는데 유독 내 손길을 마음에 들어하셨다. 양쪽 머리의 길이가 고르질 않아 맞추려고 노력하다가 당신이 원하시던 것보다 머리 길이가 훨씬 짧아진 적이 많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불평없이 “시원하게 잘 짤랐다” 하셨다. 어설프던 가위질이 거듭될수록 조금씩 익숙해져서 양쪽이 엇비슷하게 맞추어졌다. 그후 미용실 부품을 구입해서 어머니 머리에 파마도 해드렸다. 굵은 컬이 제멋대로 엉켜도 그것 역시 좋다고 하셨다.  

할머니 머리를 관리하는 것을 지켜본 딸들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나에게 머리를 맡겼다. 덕분에 집안에서 정기적으로 미용실을 열었다. 그러나 사춘기에 들어선 딸들은 까다로운 손님으로 변해서 나보다 전문가를 선택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이래라저래라 주문없이 나를 믿으셨다. 어머니는 산뜻하게 커트 하는것을 선호하셨다. 어머니가 우리집에서 아들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후에도 나는 어머니의 고정 미용사였다. 미시시피로 어머니를 찾아가면 “운전해 오느라 피곤할텐데 괜찮다”며 말리셨지만 어김없이 미용실을 열고 어머니 손님을 맞았다.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셨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 자식들이 자주 찾아오지 않으니 가까이 살며 찾아올 수 있는 자식을 잡으셨다. 머리 자르는 것은 부수확이었고 진짜로 원하셨던 것은 자식 얼굴 보기를 바라셨던것 같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미국과 한국,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흩어져 사는 가족들의 소식을 전해 주셨고 나는 우리집의 생활을 보고했다. 남편 흉도 보고 내 자식들 장래도 의논했다. 어머니는 나의 생각을 바른 길로 인도하셨고 부정적인 생각들은 걸러내도록 도와주셨다.

세월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머리숱은 줄었고 빨리 자라지도 않았다. 더불어 조근조근 지혜를 나누어 주시던 어머니가 시간과 장소를 과거로 돌리셨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가 재미있을 적에는 머리 자르는 속도가 느렸다.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가위질이 잘못되어서 자른 부분을 다시 자르며 많은 가족들로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옛일을 함께 회상했다. 어머니의 건강이 쇠약해지며 이야기의 맥락이 끊어지고 뒤섞여서 혼선을 빚었다. 한 많은 삶의 자락을 잡고 회상하시던 어머니는 잠깐씩 침묵을 지키셨다. 어머니의 기억창고에 단단히 뭉쳐있던 마음 아픈 기억들은 삐져 나온 머리카락처럼 잘라내고 싶었다. 졸졸 시냇물 흐르듯 힘없던 어머니의 속풀이들이 멈추고 정물처럼 의자에 앉으신 어머니의 머리를 자를 적에는 가슴이 먹먹했다.

정기적으로 이발소에 잘 다니던 남편이 몇 년 전 미시시피 다녀오는 길에 불쑥 이제부터는 자기의 머리도 잘라달라고 요청했다. 오랫동안 어머니와 여자 가족들의 머리를 자른 것을 본 남편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라 기꺼이 응했다. 그러나 남편은 힘든 손님이다.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잘라달라고 요구한다. 아기의 머리결처럼 부드럽고 가늘었던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만졌던 감각이 손끝에 남았다. 남편의 머리를 정리하는 나의 손끝에 가벼운 떨림이 있었다. 검고 수북하던 머리카락이 마른 잎처럼 떨어져 나가고 이제는 헤아릴 정도로 숫자가 적으니 어머니의 머리를 만지면서 느꼈던 애잔함이 되살아났다.

매번 “수고했다. 고맙다.” 하시던 어머니와 달리 깨끗하게 머리를 잘라 미남을 만들어 주어도 남편은 고맙다는 말없이 휑하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생각하니 고정 이발사로 수고해도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적이 없다. 나의 봉사를 당연시하는 남편에게서는 어머니처럼 깊은 사랑이 전해오지 않는다. 뒤따라 집안으로 들어서며 남편의 무심함에 툴툴거렸다. 사랑을 구걸하는 기분이 착잡했다. 사랑의 둥지였던 어머니가 그립다. 예전처럼 어머니의 머리를 자르며 어머니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