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30년 전에 스친 옷깃이었다. 우리집의 전화 자동 응답기에 남긴 메시지는 독일에 있는 ‘미유럽사령부’에서 일했던 영 그레이를 찾고 있었다. 분명 나였다. 약간 쉰 목소리의 이름이 낯익어서 반가움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다음날 아침 전화기를 들고 그가 남긴 번호를 누르면서 안경뒤에 숨었던 그의 날카로운 푸른 눈을 떠올렸다. 오래전 독일에서 근무할 적에 그는 나의 직속 상관이었다. 30년이 지난 현재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있는지 많이 궁금했다. 전화기를 잡고 반가워서 한바탕 수선을 피운 후에 우리는 그동안 각자 살아온 삶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는 30년 복무한 군에서 퇴직한 후 연방정부 일을 했다. 총 50년 이상의 세월을 나라에 봉사했지만 업무처리 방식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었던 그는 2006년에 완전히 손을 떼고 안락한 은퇴 생활을 한다. 얼마 전 웹사이트를 서핑하다가 우리가 함께 근무했던 유럽사령부 소속 J-5 (연합 정책과)의 기념 코인을 발견했다. 네바다주의 어떤 곳에서 파는 기념 코인을 주문해서 보니 선명한 유럽사령부의 로고가 추억을 불러 일으켜서 감회가 깊었단다. 그래서 옛 동료들에게 주려고 코인을 더 주문했다. 그가 과거에서 현재로 뛰어와 나를 찾은 이유였다.

누가 옛 추억은 아름답다고 했는가. 이젠 정녕 아름다운 추억이 된 과거이다. J-5에 근무하던 육해공군 군인들은 각자의 군복 색깔이 아니라 퍼플색이되어 서로 도우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나의 임무는 기밀서류를 관리 보호하는 일이었다. 등급에따라 다르게 취급해야 했던 기밀서류들에 머리끝이 곤두서던 곳이어서 매일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했다. 한치의 오류도 용납이 되지 않았고 금고 관리도 엄격히 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와는 철저히 서로 의지하고 신임했다. 그렇게 3년을 일했으니…30년이 지난 후에도 이렇게 찾아오는 방문객이 있다.

매사에 세밀했던 그는 나를 찾았듯이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모두 추적해서 찾았다. 이제는 전국 여러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옛동료들의 근황을 들으니 그들이 보고 싶었다. 특히 육군이었던 ‘다나’와 해군이었던 ‘카멘’이 결혼하고 자식들을 훌륭히 키웠다는 뉴스에 참으로 기뻤다. 예전에 그 둘은 사사건건 의견충돌이 많았던 독신주의자였다. 서로 연락없이 살아온 세월이 길었듯이 우리들의 삶도 많이 변했다. 한때 가족처럼 의지하고 살았던 동료들과 재회하자고 그에게 보챘다.

이제 나이 80을 바라보는 그는 여행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가 살고 있는 오하이오주로 가겠다고 했더니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실토했다. 혼자 늙는 것이 아닌것을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우선 모두와 이메일로 연결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노병들의 쿰바야는 움직일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가면 된다. 옛 동료들과 의기투합해서 오하이오주에서 재회하면 세월이 변화시킨 우리들의 모습에서 먼 길을 지나온 사람살이의 훈훈함을 나눌것 같았다.

30년의 세월을 훌떡 넘어서 나를 찾아준 방문객은 진정 반가운 손님이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며 한 일들을 열거했더니 그는 사람은 한 평생 5가지의 경력을 쌓을 가능성을 가졌다고 했다. 그렇게 못하면 인생의 표면만 긁고 지나가는 것이라며 무엇을 했던 예전처럼 내가 극성을 피웠다면 분명 잘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가 한번도 보지 못한 나의 작은딸이 이달에 영국인과 결혼한다고 했더니 날더러 소설같은 인생 행로를 산다면서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나를 “엄청난 책임을 요구하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던 Special Lady”라 기억한다고 했다. 그러니 나의 딸들도 어련하겠느냐며 자랑스럽다고 했다. 올 봄에 책을 발간했다고 했더니 그것 또한 놀랍고 반가운 소식이라며 기뻐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나를 믿어준 든든한 후원자였다.

아름다웠던 과거를 찾아다준 그에게 감사하고 앞으로 연락하며 살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남편이 부러워했다. 나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았지만 과거에 스쳐간 지인이 이렇게 찾아서 연락해온 적이 없었다. 했던 일이 달라서 였는지 모른다고 위로해 주었다. 오하이오로 옛 지인을 만나러 갈적에 운전을 도와 주겠다며 자진하여 나선 남편이 고마웠다. 남편이 좋아하는 베이컨을 구우며 푸짐한 아침을 준비하던 내 귀에 창밖의 새소리가 마냥 흥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