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세상을 떠난 지인이 생전에 나에게 여러번 일깨워준 말이 있다.  “너는 늙지 마라” 던 그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살게 되니 몸과 마음이 진실로 어수선하다.  그런데 이심전심이라고 한국에 사는 옛친구가 최근에 우리가 나이듬을, 그 인식의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녀는 대학시절 합승한 택시의 앞자리에 앉았던 어떤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면서 읊어준 독일어 시가 생각난다고 했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를 천천히 읊어봤다.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참으로 귀엽고 예쁘고 깨끗하여라/ 너를 보고 있으면 서러움이/ 나의 가슴 속까지 스며든다/ 언제나 하느님이 밝고 곱고 귀엽게/ 너를 지켜주시길/ 네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나는 빌고만 싶다’  

시공을 건너뛰는 뭉클함이 가슴에 안긴다.  이 친구는 어려서부터 예뻐서 부러움을 받다가 대학시절에는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끌었다.  그녀의 청순한 미모에 반한 낯선 남자가 이런 좋은 시를 읊어 줬는데 그의 기도는 자연의 순리에 따랐다.  매일 조금씩 늙는 것을 못 느끼다가 어느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확 늙어 있어 충격을 받았다는 그녀에게 “미인인 네가 그러면 나는 어쩌라고” 답해주고 싶었다.  사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러서 우리가 이제는 노인층에 진입한 사실이 황망스럽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 두렵다는 친구와 달리 나는 꿈을 꾸는 것이 두렵다. 

내가 자주 꾸는 꿈은 늘 같은 스토리다.  기차가 시야 밖으로 벗어나고 있다.  수런수런 밀고 밀리던 사람들은 다 기차를 타고 떠났고 시골의 한적한 정거장은 텅 비었다.  멀리 떠나가는 기차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기차가 떠난 정거장처럼 빈 속이 어지러워 나무 벤치에 앉았다.  기차 시간에 늦게 도착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나는 기차를 타지 않았는지 궁금했으나 기차를 노친 것은 아쉽지 않았다.  열차의 긴 그림자조차 사라지자 길게 뻗어있는 선로에는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쬔다.  철로 주변의 환경이 약간씩 바뀌지만 기차를 떠나보내고 혼자 막연하게 낡은 벤치에 정물처럼 앉아있는 나를 멀찍이서 딱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또 한사람의 나 자신이다. 

이런 어수선한 꿈에 시달리다 깨어나면 어둠을 쫓으려 집안을 환하게 밝히지만 익숙한 내 생활공간조차 낯설다.   왜 하필이면 전세기의 환경을 가진 시골 기차역이 무대인지 모르겠다.  이런 꿈을 꾼 날은 종일 어지럽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집히는 것이 있다.  세상이 바뀌고 생활양식의 변화에 관념조차 휘청거리는 환경에서 나는 아직도 익숙한 과거의 아날로그 의식을 꽉 잡고 있다.  순발력이 떨어져서 바뀐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니 의식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뒤쳐짐과 소외감이 무의식적으로 꿈이 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나이는 그저 숫자라고 우기지만 심신의 변화는 속수무책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 또한 거북스럽다.  좋은 것은 시력이 나빠져서 세상을 부드럽게 보게 된 것이고 불편한 것은 기억력 감소와 집중력의 쇠태다.  더구나 바위에 새겨졌다고 믿었던 추억도 때에 따라 적당히 재편집 되고 흩어져서 마음이 아프다.  무엇보다 중요하거나 다급한 일이 아닌 작은 이슈들도 불안하게 심장을 헐떡이게 하고 감성이 메말라가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하니 입안이 마른다. 

하지만 가끔 엉뚱한 착각을 한다.  시간을 과거의 한 순간으로 잠시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요즈음 친구 덕분에 하이네의 시를 읊으며 독일을 그리워한다.  독일은 나와 특별한 인연의 나라다.  사춘기 시절부터 내 마음에 둥지를 틀었던 수많은 독일 작가들의 작품이 하나 둘 깨어나 다시 내 마음을 사로잡고 독일에서 살았던 3년의 추억이 마음을 다그친다.  남편을 처음 만났던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괴테와 쉴러, 헤세의 체취를 느끼고 베토벤과 슈만의 음악에 푹 빠지고 싶다.  남편에게 과거로의 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더니 처음에는 별로야 하던 남편이 흥미를 보인 순간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아무튼 독일에서 슈만의 ‘아름다운 5월에’ 듣게 되어 마음이 설렌다.  “너는 늙지 마라” 조언을 기억하며 맘껏 유럽을 나돌아 다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