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년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면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추억 여행을 했다.  친근한 지역의 이름에 내 손가락이 닿으면 언젠가 그곳을 찾아갔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정경과 사람들을 다시 만나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때 가졌던 가슴을 꽉 채우던 흥분에 행복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낯선 곳이 궁금했고 그리고 찾아가면 재미있었다.  낯선 거리나 산야,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준 잔잔한 감동이 좋아서 욕심을 내어 다녔다.  남들은 좋은 자동차나 스테레오에 반했을 적에 나는 내 월급의 반을 여행비용으로 사용하며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정경에 푹 빠졌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본 많은 정경을 가슴에 담을 수가 없어서 전체 사진이 아름답게 찍힌 포스트카드를 열심히 사서 모았다.  포스트카드의 분량이 늘어날수록 조금 더 큰 박스를 구해서 옮겼다가 언제가 큰 박스가 꽉 찬 후부터 박스에 들어가지 못하는 카드들은 책장 옆에 쌓았다.  어린 딸들이 관심을 보이면 포스트카드가 담긴 박스는 내 보물상자이니 손대지 못하도록 주의를 줬다.  

가끔 상자를 열어 안에서 잠자고 있는 보물들을 깨워서 바닥에 죽 펼친다.  지역별로 분류해서 고무줄로 감아서 두었는데 고무줄이 녹은 것은 다시 새 고무줄로 감아준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내 발자국의 흔적들이 세월의 흐름을 얌전히 따른다.  성장기에 한국의 곳곳을 다니며 모은 포스트카드는 색상이 많이 변해 산뜻한 맛을 잃었다.  그때 찾아다녔던 명승지의 사진들이 선명하지 않아 내 나이의 숫자가 가시처럼 따갑다.  그러나 경복궁과 불국사의 사진엽서는 여전히 당당하다.

모국을 방문하면 옛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환경이 사라진 곳에 들어선 낯선 건물과 거리가 나를 미아로 만든다.  그리고 간직하고 있는 옛 포스트카드를 무색하게 한다.  새로 구한 사진엽서들은 빛바랜 엽서가 주는 정겨움이 없고 더불어 새롭게 창조된 모국의 자랑거리들은 나와 공감대가 없어 친해지지 못했다.

유럽의 많은 지역 포스트카드들은 시간을 멈추고 예술작품처럼 은은한 멋을 가졌다.  언제 찾아가도 그 자리에 있는 건물과 시가지는 세상에서 없어져버린 내 어린시절의 고향과 달리 안정감이 있고 나에게 편안함을 준다.  오랜만에 찾아가도 길을 잃어 버리지 않는다.  고풍스런 유럽의 포스트카드로 역사의 흔적을 더듬다가 미국 50주 각처에 산재한 광활한 대자연의 카드를 보며 야생마를 연상한다.  상당히 매혹적인 대륙 곳곳을 다시 찾아가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우습지만 훗날 나이 들어서 여행을 못하게 되면 꺼내서 추억을 되새김하려고 모았던 카드들이 팬데믹을 견딘 에너지원이 됐다. 

이른 봄부터 분위기가 술렁이더니 이젠 변화가 완연하다.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많은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름다운 꿈도 많이 꾸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바꾼 새로운 일상에서 무엇보다 나를 위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재점검하는 기회였다. 

사회 전분야에서 예전처럼 활동을 재개하니 활기가 있다.  동네 야구장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연극장도 왕성한 의욕을 보인다.  하루하루 바뀌는 나무들을 보며 숨을 쉴 적마다 새로운 시작이라 여긴다.  이제 캐피탈 시티 클럽이 본격적으로 오픈했다.  실내 이용이 가능해서 거의 일 년 만에 저녁을 먹으러 클럽에 갔다.  몽고메리 다운타운에 우뚝 선  23층 건물의 위층에 있는 클럽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지는 평화로웠다.  아래로 나즈막한 건물들이 정겨웠고 동서남북 확 터인 지평선은 마음을 활짝 열어줬다.  우리 부부처럼 모처럼 클럽을 찾은 사람들이 밝게 나누는 대화와 웃음소리에 둘러싸여서 예전의 분위기를 즐겼다.

달콤한 음악을 연주하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할렐루야’ 노래를 연주해서 놀라게 했다.  암울하던 일년을 잘 견뎠다는 것일까.  전에 늘 입었던 짙은 청색 양복을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초로의 남자가 데려간 2020년에 잠시 숙연했다.  피아노 선율에 실린 ‘할렐루야’ 기도가 하늘에 길게 흩어진 저녁놀에 실려가는 것을 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내일 새로운 하루를 기약하는 태양처럼 백신 주사를 맞은 사람들의 숫자가 늘면서 사람사회에도 안전한 내일이 찾아옴을 믿는다.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온 지인들과 이제 자유롭게 만나고 또한 곧 어딘가로 여행할 수 있으니 진실로  Life is good 이다.  사는 것이 춤을 추듯이 가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