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비가 5월의 꽃을 피운다” 했는데 3월에 내리는 비는 현시대 사람들을 닮아 성급하다. 벌써 4월의 기운을 데려왔고 서둘러 5월의 꽃을 부른다. 세게 혹은 약하게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치 주말에 본 로시니의 오페라 ‘세미라미데’의 서곡을 연상시키며 나를 흥분시켰다. 한쪽 어깨가 비에 흠뻑 젖어도 기분이 좋아서 개와 보조를 맞추어서 걷는 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예전에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은 그저 기분이 좋아서 거리로 나섰던 추억을 회상한다. 70년대초 종로나 명동에 있던 클래식 음악다방들은 내 젊은 시절에 숨통을 뚫어준 피난처였다. 강의가 없는 날만이 아니라 심지어 강의를 빼먹고 가서 죽쳤을 정도로 ‘돌채’나 '티롤' ‘르네상스’ 다방들은 그 당시 내 인생에 중요한 문화공간이었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과 음악다방을 우리들의 아지트로 만들고 즐겨 앉는 의자에 이름표를 붙일 정도로 우리는 단골손님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어수선한 세상살이를 잊었고 예술과 사랑을 논하며 젊음의 기개를 맘껏 피웠다. 특히 우리가 신청한 음악이 흘러나오면 감성을 충족시키며 행복했다. 그렇게 음악세계에 빠져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 통금 시간 가까이에 막차를 타려고 뛰었던 날들이 많았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표 보다 커피값이 주머니 사정이었던 시절, 어둑한 감상실의 의자에 깊숙이 앉아 눈을 지긋이 감고 비범한 음악을 들으면서 삶과 죽음, 사랑과 고통, 종교와 구원, 자연과 인간의 조건을 풀어헤친 작곡가의 설명을 들었다. 클래식 음악을 통해서 날씨의 변화를 느끼고 계절의 흐름도 함께 살았다. 훗날 남자친구와 데이트 장소로도 유용했던 추억의 다방들이 과거로 사라진 것을 알았던 날 가졌던 허탈감은 아직도 느낀다. 그때 열린 귀로 클래식 음악에 편견을 가졌던 내가 어느 사이에 변했다. 나의 가슴을 채워줬던 고전음악들이 슬그머니 빠져나간 자리에 켈틱 음악이 들어섰다. 웅장한 교향악에 가졌던 강한 애착이나 협주곡의 부드러운 선율에 가슴 떨렸던 감흥을 잊고 그저 감미로운 멜로디에 만족하며 사는 보통사람이 됐다.

클래식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온 아쉬움에 작년 크리스마스에 나 자신에게 선물을 했다. The Teaching Company에서 제공하는 The Great Courses 중에서 위대한 작곡가 10명의 과목들을 주문했다. 고전음악에 다시 접근하고 싶었다. 솔직히 젊었던 시절의 나를 찾고 싶었다. 음악 역사가인 로버트 그린버그 교수로부터 전세기에 살았던 작곡가를 한 사람씩 새롭게 소개받는다. 박식한 그가 작곡가의 삶과 음악을 세세하게 소개하는 바람에 지적 충동을 받는다. 그는 사람과 음악의 인과응보를 재치 있게 감정을 개입하며 열정적으로 한 사람의 완벽한 인생 스토리를 풀어준다. 그린버그 교수의 애석하거나 감탄사의 물결을 함께 타니 음악에 작곡가의 애환이나 고통이 느껴져서 얼얼한 날들이 많지만 그래도 좋다.

18세기 고전음악의 대가인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하이든에서 20세기 진보적인 성향의 음악가인 러시아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까지 제각기 독특하면서 또한 비슷한 10명의 천재 음악가들과 사귀면서 아름다운 봄날을 보낸다. 교향곡의 화음을 좋아했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고난과 역경을 견디며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은 사람들의 삶에 푹 빠져든다. 시대나 사회의 불리한 상황도 음악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열정에 불을 지폈다. 천재 음악가들의 사람 자체와 작품이 창조된 상황을 이해하니 그들의 작곡기법보다 그들이 자신의 정서를 음악적인 표현으로 쏟아낸 감정의 홍수에 긴 여운이 남는다. 죽을 때까지 창작열에 불탔던 그들에 고무되어서 나도 새삼스럽게 무엇인가 창조하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음악을 좋아하는 토박이 친구에게 요즈음 공부한 작곡가들을 소개하니 그녀도 호기심을 가졌다. 내가 가진 오디오 코스를 빌려주고 우리는 재미있는 클래식의 정보를 나눴다. 삶을 어느정도 살고 나서 다시 만난 작곡가들과 그들의 음악은 내 삶의 품위를 높여준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귀로 집중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눈을 뜨고 모든 감각기관으로 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만 아니라 주변의 자잘한 소리가 제각기 오묘한 화음을 가졌다. 마치 관악기와 현악기가 조화를 이루는 교향곡처럼 내가 살아온 세월과 자연의 사운드가 화합해서 연주하는 대교향곡이 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