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길을 운전하며 싱싱하게 푸른 들판과 소들을 보고 수확기에 접어든 옥수수밭을 지나 눈이 부시게 푸른 목화밭을 지나갔다. 땅에서 피우는 눈송이들로 하얗게 치장될 가을 들판을 상상하며 굽이굽이 휘어진 도로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했다. 옆에 앉은 남편은 눈과 손이 스마트폰에 바빠서 자연의 기운에 감탄하는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천천히 자동차를 몰다가 전통적으로 옥수수와 목화를 재배하는 지역에 선보인 해바라기 들판 옆에 차를 세웠다.

앨라배마 중부의 들판에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꽃을 심은 농부에 감사했다. 가까이 가서 보자고 남편을 재촉하니 여전히 전화기를 잡은 남편은 꿈쩍않고 “벌레가 싫어서 차안에 있겠다” 했다. “나와 취향이 다른 남자와 참 오랫동안 살았구나” 툴툴거리며 혼자 해바라기 밭에 다가가니 바쁘게 꽃을 옮겨 다니는 벌들과 고요가 맞아줬다. 42에이커의 넓은 들판을 꽉 채운 해바라기를 감탄하며 입구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떠나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일정한 구간으로 자리잡은 내 키보다 훨씬 큰 해바라기 밭고랑에는 걸을수 있는 공간이 아치구조로 쭉 열려 있었다. 천천히 걸어들어가 해바라기 들판에 나를 섞었다.

요즈음 연이어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상사가 마음의 평안을 앗아갔다.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인 대형사건들에 놀란 가슴을 달래는 와중에 정부를 전복하려던 터키 군인들의 쿠데타가 실시간으로 중계되어 사고지역에서 먼 거리에 사는 나까지 불안에 휩싸였다. 사상과 이념에 피부색까지 사람사이에 깊은 골을 팠다. 나와 다름을 수용못하고 생면부지 낯선이에게 극단적인 행위를 서섬치않는 끔찍한 사건이 자주 일어나니 아찔하다. 더구나 오랜 세월 곪았던 사회병폐가 전국 각지에서 우르르 터지는 것을 숨가쁘게 보도하는 케이블 뉴스가 정신을 쏙 빼놨다.

사랑과 배려가 빠진 의식의 공백에 버퍼 역활을 하고 국민들에게 안전감을 안겨줄 현시대의 영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혹시나 하고 대통령 선거를 기다리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희망을 잃어간다. 억울한 많은 희생자들의 소리없는 비명에 함께 고통을 받으며 마치 미쳐가듯, 몇 사람이 전체 사회에 끼친 파장에 휩쓸렸던 긴장감이 해바라기 들판에서 조금씩 풀렸다. 

이제 갓 피어난 꽃들도 있지만 뜨겁게 작열하는 오후의 햇살에 대부분의 꽃머리들은 동쪽을 향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열기를 뿜던 노란 정열의 꽃잎들은 대충 떨어졌고 숙인 얼굴에 알알이 영그는 해바라기씨들이 톡톡 튈듯 익어간다. 한점의 부끄러움이 있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터득하면서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 사이를 얌전하게 걷던 나도 해바라기와 충돌을 피해 고개를 숙이니 자연히 지혜를 나누어 받는다. 또한 흙과 가까이 만나니 눈에 보이지 않는 성스런 느낌이 전해진다. 어수선한 마음으로 찾아와 넓은 해바라기 밭에서 평안과 충만감을 얻는다. 자연의 힐링 파워다.

살다 보면 별일 다 있다더니 그런 일이 나를 기다렸다. 해바라기밭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고 차에 오르니 남편이 시동생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I miss her so much” 기가 막혀서 고개를 젖는 남편에 나도 수긍했다. 60대 후반인 시동생의 첫번째 아내가 최근에 세상을 떠났다. 40년 훨씬 전에 이혼한 여자의 죽음에 대한 그의 반응이 놀랍도록 솔직하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연애하다 두 사람은 결혼했다. 나이 어려 결혼하고 덩달아 철부지 부모가 된 생활에 적응못한 그들은 바로 이혼하고 제각기 삶을 살았다. 진실로 옛 아내가 그리운지 아니면 그녀를 만났던 시절의 젊음이 그리운건지, 지금 함께 사는 아내는 우짜라고 시동생은 형에게 이런 고백을 할까. 동생이 쏟아낸 감정에 충격받은 남편은 내가 해바라기밭에서 받은 평안을 깨뜨렸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 도시에 멈췄다. 내 마음이 어수선해서 해바라기 들판을 찾아간다니 따라나선 남편이다. 이제는 그의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려고 소문난 맥주집에 들렀다. 앨라배마 각지에서 제조한 16가지의 맛이 다른 맥주들 중에서 남편은 ‘Miss Fancy’를 주문했다. “그 동생에 그 형”이라 했더니 뜻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씩 웃는 남편따라 나도 실없이 웃는다. 차원이 복잡한 사람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