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한 남편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친구를 보러 가는 일이었다. 그가 켄터키 주에 사는 옛 친구 데이비드 밀러를 찾아가는 길에 나도 동행했다. 켄터키대학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다 만난 인연이 두 남자를 평생지기로 엮었다. 데이비드는 백만 불짜리 미소와 뛰어난 유머감각을 가진 휠체어를 탄 정상인이다.

2살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 데이비드는 신체장애자가 됐다. 상반신은 뒤틀렸고 하반신은 마비됐다. 가슴을 에워싼 보호막에 연결된 가죽 벨트 여럿이 상체를 잡아주고 휠체어가 발을 대신한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어릴 적부터 독립심을 키워주느라 그가 혼자서 움직이는 훈련을 냉정하게 시켰다. 그는 기어서 2층 집안을 오르내렸고 7살부터는 집안 청소를 도왔다. 덕분에 그는 누구의 도움없이 자신을 돌볼 수 있고 가능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한다.

60년대 장애자의 편의를 봐주는 램프같은 설비가 없었다. 휠체어로 계단을 오르내려 강의실을 갈 적에 염치불구하고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던 데이비드는 원래 소심하던 성격을 활발한 외향적으로 바꿔야했다. 그리고 전공분야는 달랐지만 신체장애자인 데이비드와 동양인 이민자였던 남편은 성향이 비슷해서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남편은 데이비드의 장애를 묵살했고 데이비드는 남편의 피부색을 묵살했다. 두 사람은 상부상조해서 함께 캠퍼스를 누비며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장애는 제한이 아니라 도전이라 받아들인 데이비드는 대학졸업 후 비영리단체에서 장애인들의 권익 향상에 기여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이 인정받아 1972년 전국에서 선정된 그는 워싱턴 DC의 의회와 백악관에 초청받았고 닉슨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헬렌 켈러처럼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사회봉사로 장애자에 대한 편견을 깨워준 데이비드는 희망의 불씨였다.

나는 오래전 독일에서 데이비드를 처음 만났다. 남편이 여자를 만났다 했더니 데이비드가 독일로 찾아왔다. 장애자 시설이 없던 공항에서 데이비드는 간호사의 보호를 받으며 구급차에 실려서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런 불편을 겪고도 환하게 웃는 그를 만났을 적에 솔직히 많이 놀랐다. 남편은 데이비드의 신체장애에 대해서 사전에 일러주지 않았다. 장애자와의 체험이 전혀 없어 당황한 것은 잠시였고 너무나 능청스런 두 남자들 덕분에 나도 편하게 데이비드와 사귀었다. 그리고 정상인보다 더 정상인 그의 삶의 자세를 존경했다. 그때 중세 고도시의 울퉁불퉁한 자갈길은 휠체어를 탄 데이비드나 밀던 남편을 애먹였지만 우리는 명승지를 다니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한번은 주말에 폭스 마치를 했다. 시골 들판과 나지막한 언덕길을 구비구비 도는 10 킬로미터 구간을 남편이 데이비드의 휠체어를 밀며 걸었다. 폭이 좁은 언덕길에 구덩이가 많이 파인 곳에서 그만 사고가 났다. 데이비드는 튕겨 구덩이에 떨어졌고 휠체어는 옆으로 굴렀다. 휠체어를 바로 잡은 남편이 두 팔로 기어서 오른 데이비드를 간신히 휠체어에 앉히자 지나던 독일인들이 “딱해라” “미친 미국인들” 해도 두 남자는 아랑곳없었다. 남들보다 두배의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이 종착지에 도착하자 텐트 안의 사람들이 박수로 환영해줬다. 이 추억을 회상하면 두 남자는 늘 호탕하게 웃는다.

데이비드는 한국도 방문했다. 80년대 중반 한국의 환경이나 거리는 장애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데이비드에게 서울 여러 곳을 보여준 후 민속촌을 갔다. 그곳에서 동동주를 처음 마신 두 남자가 취했다. 흥이나 휠체어를 밀던 남편 탓에 데이비드는 휠체어에서 떨어져 뒹굴었다. 음식점 아낙들이 달려와서 데이비드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며 남편을 꾸짖었다. 그러나 아낙들의 손길이 좋았다며 데이비드가 남편에게 다시 휠체어를 힘껏 밀어달라고 부탁했다가 나의 핀잔을 받았다. 나의 고향 대구에서 집안 어른을 만난 후 경주 고적지도 관광했다. 청년들의 도움으로 불국사 계단을 오른 데이비드는 사찰 안까지 잘 구경했다.

대학친구 중 한명이 얼마전에 세상을 떠났다. 두 남자는 그를 그리워하다가 서로의 건강을 챙겼다. 바퀴를 손으로 밀던 휠체어가 전동휠체어로 바뀐 바람에 데이비드의 생활은 편해졌지만 팔의 근육이 약해졌다. 데이비드는 도요다 밴의 내부를 자신의 신체에 적응토록 운전석은 회전할 수 있고 버튼으로 속도를 높이거나 제동을 걸수 있는 컨트롤박스를 장착해서 300파운드가 넘는 전동휠체어를 싣고 직접 운전해 다닌다. 예전에 그가 사용했던 휠체어는 접어서 트렁크에 실었는데 전동휠체어는 우리 승용차에 실을 수가 없는 덩치여서 이번 방문 동안 어딜가든 데이비드가 운전해야해서 미안했다.    

이번에 데이비드는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고 옷을 입는데 2시간 반이 걸리고 만사에 느려졌다고 실토했다. 그동안 자신의 고난을 들어내지 않더니 그도 변했다. 세월따라 변한 두 남자의 모습을 찬찬히 보니 나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수 십년 전 내가 처음 만났을 적의 박력이 없다.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는 그들이 짓궂은 젊은 노인들로 정정하길 바라는 소망은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