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관심 보여 주셨던 드라마 촬영 건은...
아무 소식 없었어요.
많이들 궁금 하셨을 텐데, 진즉에 알려 드렸어야 했는데
여전히 터진 입으로 할 말은 죄송합니다...뿐.
죄송해요.
그냥 아무 말이 없더라고요.
밖에 촬영도 없었고요.
이런 일들은 기획 단계에서 변경이나 아에 엎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니
둘 중 하나 였다 생각 하렵니다.
프라이버시냐 꽁돈이냐의 사이에서
더 깊게 고민할 필요 없어져서 저는 홀가분하고
한참 들떠 있던 남편은 오히려 저보다도 더 추후 상황에 관심이 없어요.
그 간 저는 일이 바빴던건 아니고
이래 저래 마음이 뒤숭숭하고
심란함을 무기 삼아 특기인 게으름의 세계에 푹 빠졌었고
그래도 잘한 일 하나는
친구, 남편 회사 파티 참석 하라고
장거리 오버나잇 베이비 시팅 다녀 왔습니다.
작년 이 맘때
남편 회사 파티 있는데 안 간다고 해서
애들 때문에 그러냐, 이 언니가 가주랴 말을 툭 던졌더니
말 만으로도 고맙다고
그런데 남편 회사 옮긴지 얼마 안 됐고 그래서 그 회사 연말 파티 분위기 파악부터 좀 해야 하니
이래 저래 이번은 그냥 안 가기로 마음 굳혔다
그러더라고요.
올 해는 가기로 했다 하길래
애들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동네 친구 집에서 저녁에 봐 주기로 했다고.
열 시 까지 데릴러 가기로 하고요.
내 친구가 그래도 인간성이 좋아서 그런지
이럴 때 나서주는 동네 친구가 있는 건 참 잘된 일인데
그 집도 자기 집 애들이 있는데 말이죠.
그 친구 참 고맙네.
그런데, 내가 간다.
회사 파티 갔다가 밤 열 시까지 온다는 것은
그것은 사실 가나 마나한
말도 안되는 시간이라고.
내가 가서 잘 테니까 애들 어디 다른 집 보내지 말고
시간 걱정 하지 말고 할 일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 부터 파티 준비 탄력 받아서
3인방을 이루는 또 다른 친구, 패션 디자이너. 와 함께
드레스 고르는 것 부터
신발, 악세사리, 머리, 손톱
빈틈없이 계획을 짰어요.
파티 당일은 마침 그 날 하루 종일 시간이 빈
디자이너 친구와 일찌거니 기차 역에서 만나 출동해서
일단
순대와 떡볶이 어묵탕이 환상적인 삼합으로 주린 배부터 채우고
디자이너 친구의 총 지휘 아래
마나님 치장 성심성의껏 도와 드리고요.
친구들 내 보내고
본격적인 베이비 시팅 타임.
애들은 참으로 엄마, 아빠가 없는 상황을 잘도 알아서
제가 말 안 들으면 지옥 훈력 시킬라 했더만
목소리 한 번 높일 일 없이 말을 잘 듣더만요.
저녁 먹이고 났더니
큰 아들(6살) 소파 위에서 온 힘을 다해 텀블링.
조금 있다 분위기 살피던 작은 아들(4살) 합류.
제 생각엔 엄마나 아빠는 분명 이 행동을 못하게 저지 할 거 같았는데
이건 제가 모른척 하면서 가만 놔 뒀어요.
초장부터 잔소리로 우리들의 시간을 시작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이 녀석들이 제 간보기를 한 거죠.
어? 이모가 아무 말을 안 하네? 어디 좀 놀아 볼까?
신이 났나 봅니다.
그랬더니 소파에서 내려 와서
한 녀석은 식탁 위로,
한 녀석은 부엌 아일랜드 위로.
그 때 제가 둘 다 동작 그만, 하고 내려 오라고 했어요.
큰 녀석 부터 내리고
그 다음 작은 녀석.
왜 내려 오라고 하는지 이유는 말해 줘야 하니까.
밥 먹는 데 니까 올라 가지 마.
거긴 올라 가는데 아니야.
이렇게 이유 말하면 이 녀석들이 코웃음 칠 거 같아서.
한 녀석씩 눈 마주치면서
위험하니까 내려 오라고 했어요.
이모가 오늘 여기 있는 이유는 오로지 너희들 안전하게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너희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면 이모는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기로
너희가 안전하게 있는 것을 지켜 주기로
엄마 아빠랑 약속 했다고요.
현경이 현영이 저만했을 때
조용한 목소리로 눈 똑바로 쳐다 보면서 얘기하면
바로 분위기 가라 앉던 추억 돋더만요.
아 이게 얼마 만의 느낌이야...
이 녀석들이 슬금슬금 내려 와요.
이 기선 제압을 계기로 이 이후 시간은
뭐 그냥 화기애애 그 자체.
술래잡기 하자길래 신나게 30분 정도
말도 안되는 규칙의 술래잡기도 했고요.
서로 술래를 하겠다고 고집 부리는 거 부터 해서
한 놈 찾으면 다른 한 놈은 꼬발르기
그럼 다른 한 놈은 꼬발랐다 약이 올라서 화 내고
아니 둘째가 알려 줘서 이모가 널 찾은게 아니고
이모가 너 냄새 맡고 찾은 거야.
이모는 너 냄새를 맡을 수 있거든.
동생이 자기 숨은 데 알려 줬다고
약이 잔뜩 올라서 화내던 녀석이 금방 멋쩍게 웃으면서 제 손을 잡더니
하하하, 내 발이 냄새가 나지요? 내 발냄새 맡은 거지요?
아니 발 냄새 아니고 너한테 나는 좋은 냄새가 있어. 이모는 그걸 맡을 수 있거든.
저러면서 대충 시간 때우다
저 집 애들은 일찍 잠자리 들어 가는 교육이 확실히 되어 있는 애들이라
(제가 가서 봐주겠노라, 흔쾌히 마음을 먹은 이유)
양치 시키고 자라고 들여 보냈어요.
재우는 것도 아니고 시간 되서 자라고 방에 들여 보내면 알아서 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났더니
뭐 할 일 있나요.
친구 책장에서 소설책 하나 빼서 읽기 시작했어요. '완득이'
중간에 밥은 두 번 챙겨 먹었고요.
그거 딱 다 읽고 나니까
친구랑 남편이 들어 오더라고요.
남의 집 가서 애들 둘 보면서
먹을 거 다 챙겨 먹고
소설책까지 한 권 끝내는 저는 능력자가 분명합니다.
파티는 어땠냐고 잠깐 물어 보고
친구한테 자기전에 와인 한 잔 더 할래냐고 물었더니
언니 한 잔 하고 싶으면 하자고 그러길래
아니 난 그게 아니고
너 바로 잘 거 아니면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을라고..
그래서 밤 열 두시에
친구 친정 어머니가 한국에서 소포로 보내 주셨다는
신상 라면 하나 끓여 먹는데 참 맛있더군요.
친구 남편이 피곤한 얼굴로 저 라면 먹는 모습을 앞에 앉아서 지켜 보고 있길래
피곤하면 나 신경쓰지 말고 얼른 들어가 자라고.
나는 라면 정도는 혼자 얼마든지 지켜봐 주는 사람 없이도
맛있게 먹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라면 먹고 양치하고
따땃하게 온도 올려 준 게스트 베드룸에서 꿀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그 집 공식 네스프레소 거지답게 커피 세 잔 빼 마시고
친구 남편이
자기는 애들하고 집에 있을테니
둘이 어디 쇼핑 가고 싶음 가라고 가서 저 선물 하나 사 주라고요.
제가 이미 베이비시팅 값으로 한국서 온 귀한 신상 라면 가져 가기로 얘기 되어 있다고 했고요.
라면 챙기고
친구가 제가 그 집 가서 커피 마실 때 마다 좋아라 했던
커피 머그를 두 개 줬어요.
제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나도 이거 사야겠다 막 그랬던 건데
언니 그래서 그거 샀냐고 물어 보길래
그러고 나서는 또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다고. 했더니
잘 됐다, 하면서 두 개 주더라고요.
냉동실에 순대 사다 놓은 것도 챙기라고 해서 고것도 살뜰히 가방에 넣고.
디자이너 친구가
버건디 색 원피스랑 겨울 스카프 준 거랑
남편 패딩 자켓이랑
빈 여행 가방 들고 가서 완전 꽉꽉 채워 가지고 왔어요.
친구들이 낮부터 가서 치장 도와주고 한다니까
친구 남편이 그냥 회사 파티 한 번 가는데 뭘 그리 요란하게 그러냐고 했다길래
제가 절대 요란한 거 아니라고 했거든요.
남편들도
그런 거 봐야 내 마누라 중요한 사람인거 아는 교육 효과 된다고요.
내가 속이 문드러져도 남편 욕 하고 싶은거 필터링하면서 꾹꾹 참는 것도
내가 그러면 남들도 내 남편 우습게 보게 되니까 그런 것 처럼
남편도
남들이 나를 잘 해 주는 걸 봐야
이 사람이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또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는 거죠.
나야 여기 언니들이 있어서
폴 서방이 그런 걸 보지만
너는 여기 친정이 없으니 친구들이 보여 줘야지.
아 우리 마누라는 밤에 어디 간다니까
친구가 하루 잠까지 자고 가면서 애들 봐 준다고 하는구나,
이런 거 한 번 보여 줘야 줘.
베이비시팅을 얼마나 끝장나게 잘 했냐면
친구 큰 아들이
이모 집에 가지 말고 여기서 포에서 살라고, 엄마는 매일 밤 나가도 좋다고.
함정은
저 녀석이 너무 애교가 끝장이고 사람 좋아해서
누구한테나 저렇게 말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ㅎㅎㅎ
이모도 더 있고 싶은데 이모부가 이모 보고 싶다고 자꾸 전화해서
이모도 집에 가 봐야 한다고
아주 정중히 양해 구하고
뽀뽀 진하게 해주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나왔습니다.
친구 파티 갈 꽃단장 준비 잘 해 주고
친구 애들 베이비시팅 무사히 잘 마치고
좋은 거 얻어 온 것들 바리바리 싸 들고 집에 왔더니
여섯 살, 네 살 어린이들 보다 더 손이 많이 가는 남편이
저를 보자 마자 하도 징징징 거려서 혈압이 좀 올랐었는데
제가 잘 참았어요.
어린이들은 제가 조용히 나직히 요점만 얘기해도 잘 알아 듣는데
이 사람은
웃어 줘야 하고 달래 줘야 하고 다독여 줘야 하고
당신이 없던 금요일 밤에
제가 집에 왔는데
갑자기 토마토가 굴러 떨어져서 그걸 피하다가
기타를 놓고 있었는데
그래서 제가 넘어져 가지고
갈비뼈 두 군데가 금이 간 것 같아요.
지금 너무 힘들어요..
토마토가 어디서 왜 갑자기 굴러 떨어 졌으며
자빠진 졌으면 자빠진 건데 그게 왜 토마토 탓이며
갈비뼈가 금이 간 게 두 개라는 건 자기가 어찌 알며
갈비뼈에 금이 가면...
숨도 쉬기 힘들만큼 아프고 응급실 가야 할 건데...
아 그랬구나...많이 아프겠구나...
에구 나쁜 토마토 같으니라고.
어디 좀 보자.
어머나 많이 아프겠네...
어떡해..움직이지 말고 필요한 거 있음 말 해.
나 집에 왔으니깐. 이젠 당신 옆에 와이프가 있잖아. 쪽.
아...혈압이 뻗쳤지만...제가 이제 내공이 보통이 아니예요.
나 없다고 늦게까지 어디서 술 쳐 먹다 집에 와서
발 헛 디뎌서 자빠졌구나?
토마토가 움직이는 동물이냐? 갑자기 당신 들어 오니까 굴러 떨어지게?
술 먹고 자빠져서 아픈 걸 나더러 어쩌라고.
갈비뼈에 금이 가면 숨이나 제대로 쉬어 질 거 같아?
기분좋게 친구네 가서 하루 자고 놀다 왔는데
오자 마자 진짜 기분 잡치고 열 받게 한다?
본심은 이러고 쏘아 부치고 싶었으나...
친구한테 얻어 온 패딩 입혀 봤더니 아주 잘 맞고.
남편도 아주 좋아하면서
이렇게 좋은 걸 그 친구는 왜 자기 남편 안 주고 자기를 주냐고.
너 이뻐서 주냐? 나 보고 주는 거지.
이 말도 참고 넘어 갑니다.
훈훈한 와중에 속 터지면서. 대충 이러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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