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1월은 제발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

이러는 이쁜아짐입니다.

 

 

옷장에 외투 점검 들어가야 할 만큼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해는 짧아져서 오후 다섯 시면 어둡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난 일들은 자꾸 머리 속으로 비집고 들어 오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러지 말아야지

이러면 안되는데

아마 나처럼 이렇게 한심하게 사는 사람은 없을거야

이러면서 그냥 내일부터 열심히 살면 돼지

오늘까지만.

 

 

남편 허리띠가 다 찢어져서 못쓰게 된지가 한참인데

동네 99전 가게에서 허접한 3불 짜리 하나 사다 던져 주고

일단 이걸로 대충 하라고 때운 다음에

겨우 남편하고 시간 맞춰서

걸어서 왕복 한 시간 반 거리의 마샬을 다녀 오면서

추수감사절 얘기를 했어요.

 

 

저는 시골 안가고 그냥 집에 있는게 어떻겠냐고.

 

 

시어머니 건강이 여름부터 계속 안 좋으셔서

이번 추수감사절은 둘째 시누가 요리 하기로 했고

저희는 버스 안 타고

둘째 시누네 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그 집 차 타고 시골까지

왕복 그렇게 함께 갔다 오자고 제안을 받아서

버스타기 싫어하는 남편은 신이 났는데

(차비도 훨씬 절약 되고요)

 

 

저는 마냥 좋지는 않아요.

 

 

작은 소형차 뒷자리에 일단 저 집 딸래미 카싯이 있고

그 남은 공간에 남편과 제가 타는데 제가 저러고 가면 허리도 많이 아프고

스케줄이 저렇게 되면

저는 차 타는 순간부터 시골에 머무는 내내 저 집 딸래미 전담 베이비 시터가 되는데

길어 봐야 사나흘 애 좀 보는게 어떻겠냐 싶어도

지금 제 상태가 저게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거기다 몇 년 전에 생긴 터키 트라우마 이후로

터키는 정말 쳐다보기도 싫고.

 

 

 

남편이야 대놓고 말은 절대 못하는 사람이고

저 대신 자기가 아이랑 놀아 주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아이가 원하는 건 저이기 때문에

별 효력이 없을 것이고

제가 또 낮잠도 못 자고 비실비실 힘들어 하면

남편은 아무 말도 시누한테 못 하면서 혼자 스트레스 받을 것이고.

 

 

 

추수감사절 임박해서

제가 컨디션이 좀 좋아지면 가는 걸로 하고

일단 지금 상태로는 안가는 걸로 남편하고 얘기를 끝냈어요.

 

 

 

내가 그릇이 이것 밖에 안되서 미안하다고.

당신 집에 하나 밖에 없는 아이고

그 애가 나를 잘 따라주면 고마운 마음으로 잘 놀아줘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그렇게 얘기를 마무리 짓고

둘째 언니한테 전화 해서는

나 추수감사절에 시골 안 가고 집에 있을 거 같으니까

김치 만두 해 먹지 않겠냐고.

김치만 사다 주면 내가 하겠다고.

 

 

 

그랬더니 언니가

요즘 한참 배추 세일하는데 김치를 담그면 어떻겠냐고 제안.

맛없게 되면 만두 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럼서

배추를 사다 자기가 절여 놓을테니

다음 날

저랑 큰 언니랑 와서 함께 담그자고

자꾸 김치를 하자고 하는 거예요.

 

 

 

아 나는 김치까지는 한 박스씩이나 담고 싶지 않고

그저 김치 만두 한 번 해먹고 싶었을 뿐이라

저는 김치 담그는 건 빠지 겠다고 언니랑 큰 언니랑 둘이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남편이 옆에서 안절 부절.

 

 

그래도 부인이 가시는게...

부인이 참여를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부인이 가셔서...

언니들한테만 맡기면...어쩌고 저쩌고.

 

 

 

결국

저희 집에서 지금 배추 열 두 포기 절이고 있어요 지금.

 

 

 

배추 한 박스를 사면

절여야 하는 도구들이 필요하고

부엌은 우리 집이 제일 작은데

모든 도구는 우리 집에 있고

언니가 배추를 자기 집에 사다 놓고

그리고 우리 집에 와서 배추 절일 도구를 가져 가고 어쩌고 하느니

아우 복잡해.

 

 

 

 

김치를 대량으로 담글 때 제일 힘든 건

양념을 버무리기 전까지의 과정이잖아요.

배추를 절이고 씻어서 물 빼놓는 것 까지.

언니들은 다 일하느라 바쁘고 힘들고

사실 제가 지금 시간이 제일 많아요.

배추 한 박스 사다가 둘째 언니가 절이고 씻고 할 걸 생각하니

안되겠더라고요.

 

 

 

그냥 차라리 배추랑 무 한 박스씩 사다 우리 집에 떨궈 놓으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다가

막판에 제가 장보는 것도 합류 했어요.

배추도 내가 고르고

무도 내가 고르고

갓도 두 단 사고

 

 

 

큰 언니한테는 내일도 올 필요 없고

쉬는 날이니까 그냥 쉬고

저녁 때 빈 통이나 들고 와서 담아 가라고 했고

 

 

둘째 언니한테도

어차피 다 절여 놓고 씻어 놓으면 그 다음도 내가 혼자 할 수 있으니까

언니도 올 필요 없다고 했더니

혼자 다 하면 너 병 난 다고 절대 안된다고

마늘이랑 생강은 자기가 갈아서 준비해 온다고 하더군요.

 

 

 

장 보러 가기 전에

오랜만에 하는 대량 김치라

검색 할 만큼 하고

줏어 들은 거 대충 정리해 마음을 정해 놓은 터라

 

 

배추 한 박스

무 한 박스

집에 실어 온 시간 오후 4시 반.

배추 열 두 포기 잘라서 우거지 할 것 따로 추려 놓으며

반 자르고 칼 집 한 번 더 내서

소금물 담가 놓고

배추 빈 박스랑 쓰레기 내다 버리고 나서

후다닥 동네 채소 가게 나가서 마늘과 생강 사 가지고 온 시간 다섯 시.

 

 

 

삼십 분 밖에 안 걸렸네 우하하.

 

 

황태 대가리와 멸치로 육수 내고

마늘 까고 생강 껍질 벗겨서 휘리릭 갈고

액젓과 새우젓 섞고

고추가루 풀어서 양념 다 해 놓은 시간

다섯 시 반.

 

 

인터넷 검색 했더니 양념을 미리 만들어서 하루 숙성하면 더 맛있다고 해서

미리 했어요.

 

 

뭐 별거 아니네.

한 시간 밖에 안 걸렸네.

 

 

 

지금 배추는 제대로 절이고 있는 건지

소금물 염도는 제대로 한건지

잘 모르겠는데

여튼 하기는 했어요.

 

 

 

남편이 저더러 진짜 일 잘 하신다고 감탄을.

 

 

큰 언니 전화와서는

배추 사 왔냐고

그냥 수요일에 같이 하자고 하길래

벌써 배추들 다 소금물에 담겨 있고

양념도 만들어 놨다고 하니

끝내 준다고 감탄.

 

 

 

둘째 언니한테 전화해서

양념 다 해 놨으니까 마늘 생강 해 올 필요 없다고 하니

'역사 났네'

 

 

 

배추가 잘 절여질 지

양념은 또 제대로 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몰라요.

어차피 이 집 저 집 네 집이 나눠 먹을 거니까

맛없는 김치 두 포기씩 쯤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고

나머지는 그냥 바로 푹 익혀서 만두 만들면 되니까.

 

 

 

내 언니들 힘들까봐

혼자 김장하는 기분 내면서

배추는 한 박스씩이나 사다 절여 놓고 나니까

남편 여동생 아이 보기 힘들다고

추수감사절 안 간다고 한 게 마음에 조금 걸리는 것이

 

 

 

무리가 되더라도 가는게 옳은 걸까요..

김치 열 두 포기 혼자 담그는 것 보다

시누 딸래미 며칠 전담하는게 몇 배는 더 힘들 것 같이 느껴지는게

내가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하나...

아 고민된다.

 

 

 

사람마다 조금 더 잘 하는 게 있고

적성에 맞는게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을 할 때에는 몸도 마음도 더 힘이 들고 하긴 한데

저는 밥은 대량으로 하는게 별로 안 힘든데

아이 돌보기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거든요.

 

 

 

적성을 떠나서

내가 내 조카가 아니라서

아이를 다루는 부분을 내 마음대로 못하기 때문에 더 힘이 드는 건가

아니면 그저 마음이 덜 가서 하기가 싫은 건가

아 복잡해요.

 

 

 

남편이 내 식구들 생각하는 것 보다

나는 남편의 식구들 생각을 덜 하는 거 아닐까

하고 고민하다

그냥 늘 하던대로

'난 소중하니까'

컨셉 밀고 나가야 하나. 갈등.

 

 

 

일주일 더 기다렸다가

컨디션 웬만해지면

마음 다 잡고 남편과 함께 가는 쪽으로 해 보자,

지금 이렇게 생각 고쳐 먹고 있는 중이예요.

시부모님 생각도 해야 하니까.

 

 

 

11월도 싫고

터키도 싫고

아이한테 시달리는 것도 싫고

 

 

 

다 싫다 싫다 싫다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나 정말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모든게 다 귀찮고 싫지..

 

 

 

그러다

배추 한 박스 무 한 박스 사다 놓고는 눈썹이 휘날리게

샤샤삭 나 홀로 김장을 준비해 놓고

우거지 다 데쳐서 봉투에 나눠 담아 냉동실에 넣고 나니

뿌듯한 기운이 뱃 속에서 스멀스멀.

 

 

 

무 세 개 까짓거 아침에 금방 채 썰면 되고

네 개는 숭덩숭덩 썰어서 김치 속에 박고

두 개는 동치미 하고

하나는 단무지 담그고

하나는 통닭무 만들고

나머지 하나는 국 끓여 먹던 매운탕 끓여 먹던 반찬으로 쓰고

 

 

다 됐네.

 

 

 

올해도 어김없이 다짐은 합니다.

내가 기필코

이 뉴욕을 떠나

겨울이 없는 동네로 이사를 가서 정착해 살리라.

기왕 올 것이면

겨울은 빨리 와라. 패딩 파카 다 빨아 놨다.

낙엽도 더 이상 보기 싫다.

 

 

 

그래도 내일이면

김치가 왕창 생길 테니까

오늘 저녁은 기분이 좀 낫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나 홀로 김장을 잘 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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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다 끝냈고요.

사진 보여 드릴께요.

 

 

 

 

 

 

 

 

 

 

 

 

 

 

 

 

 

 

 

 

 

 

 

 

 

 

 

 

 

 

 

 

 

 

 

 

 

 

 

 

 

 

 

 

 

 

 

 

 

 

 

 

 

 

항아리에 차곡 차곡 담았어요.

이 항아리는 제가 쌀통으로 쓰는 저희집 재산목록 1호인데

검색 할 만큼 하고 또 고수의 한 말씀이 필요하여

전화카드 사서 서울 사시는 이모한테 국제 전화 넣었어요.

 

이모 말씀이

김치를 대량으로 담갔을 때는 익히는 것도 큰 통에 같이 익히면 더 맛있게 익는다고 하셔서

쌀 털어서 비닐 봉지에 담아 버리고

얼른 씻어서 김치 담았어요.

 

언니들한테는 한꺼번에 익힐 거니까 내일 모레 와서 가져 가라고 했고요.

 

 

 

 

 

 

 

 

 

 

 

 

 

 

 

 

 

 

 

 

 

 

 

 

 

버무리자 마자 신라면 블랙과 시식.

 

 

이거 좀 짭짤한데...익으면 괜찮아 지겠지요?

무도 큰 걸로 세 개나 넣었거든요.

그럼 배추는 지금 짭짤해도 익으면 얼추 간이 맞겠지요? 아 떨려라..

 

 

담글 때는 맛없게 되면 만두나 대량으로 하면 된다, 했는데

막상하고 나니까 욕심이 생겨요.

맛없게 되면 너무 슬플거 같아요.

들어간 재료가 얼마에 들어간 품이 얼마에

잠까지 설쳐가며 들어간 나의 희망이 얼만데..

 

 

저 어젯밤에 빨리 김치 담그고 싶어서 잠도 설쳤거든요.

빨리 내일이 와라.

오늘이 이미 내일이었으면 좋겠다..이러면서.

 

 

만두 만들어 먹기 아까울 만큼 맛있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자꾸 항아리 뚜껑 열어 보게 되는데

그냥 좀 가만히 놔둬야 되겠죠?